자유의 여신상에 대한 아이디어가 처음 나온 것은 만찬석상에서 역사학자와 조각가가 나눈 대화였다. 1865년에 베르사유에 인접한 한 마을에서 연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유명한 법률학자이며 역사학자였던 에두아르 드 라불라예는 젊은 조각가인 프레드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와 미국과 프랑스의 관계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드 라불라예는 미국 예찬론자로서 세 권의 방대한 미국사를 저술하기도 했던 만큼, 다가오는 미국의 100주년 독립기념일을 누구보다 잘 의식하고 있었다. 그기 미국에게 기억에 남길 만한 인상적인 선물을 프랑스가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자 조각가는 거대한 조각상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하지만 당시에 이런 제안은 구체화되지 못했다. 나중에 바르톨디는 이집트로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이집트의 巨像에 깊은 감명을 받은 바르톨디는 귀국하자마자 당시 막 완성된 수에즈 운하 입구에 스스로 조각한 거상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정부 고위층을 만나 자신의 계획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가 정부의 허락을 얻기도 전에 프랑스와 프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바르톨디는 전쟁에 참전해야 했다. 그러나 미국 독립 100주년 기념 선물용 조각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1871년 처음으로 미국을 여행하면서 북적거리는 뉴욕항에 도착했을 때 그는 조각품을 설치할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다. 배가 채 항구에 이르기도 전에 바르톨디는 거상에 관한 스케치를 끝냈다. 이제 그의 계획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 계획에 참여한 예술가와 기술자 및 자금주는 5년이면 여신상이 완성될 것으로 예상했다. ‘세계를 밝히는 자유’라는 이름의 여신상은 원래 높이 46m, 무게 225t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여신상의 옷자락만 해도 주석이 300장 이상이 필요했다. 여신상 비용은 프랑스가 지불하기로 하고 미국은 여신상의 콘크리트와 철로 된 발판을 구축하기로 했다. 이 작업의 기술적인 측면을 총감독하기 위한 인물로 바르톨디는 프랑스의 철도 설계업자인 알렉산드르 귀스타브 에펠을 임명했다. 또 바르톨디는 고귀하며 현명하고 모성애적인 여신상의 얼굴을 조각하기 위해 자신의 어머니 모습을 빌렸다. 그녀는 아들의 작업을 위해 기꺼이 모델이 되어주었다. 처음부터 프랑스는 이 계획을 아낌없이 후원했다. 프랑스 시민들은 편지봉투에 현금과 수표를 담아서 계획에 참여했고, 정부는 ‘자유 복권’을 발행하여 모아진 기금으로 이 계획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총 40만 달러의 기금이 확보되었다. 당시 프랑스의 작곡가 샤를 구노는 이를 위한 칸타타를 작곡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선물을 받을 당사자인 미국 대중의 반응은 비교적 냉담한 편이었다. 국민들은 다음과 같은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그렇게 거대한 조각상을 과연 미국이 필요로 하는가, 아니 원하기나 하는가?” 당시 출판업자였던 조셉 퓰리처는 자신의 신문인 ‘World’지에서 기금 모금 캠페인을 벌였다. 1885년 3월의 사설에서 퓰리처는 이렇게 썼다. “우리가 여신상을 세울 자리도 마련하지 않은 채 프랑스의 거대한 여신상을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우리 뉴욕시와 전체 미국인에게 결코 지울 수 없는 치욕으로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 또한 퓰리처는 뉴욕의 백만장자들이 호화생활을 하면서도 여신상 발판에 필요한 경비를 내는 데는 인색하다고 비판했다. 퓰리처의 캠페인이 시작된 지 두 달 뒤에 27만 달러의 거금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여신상의 계획은 예상된 시기에 완성되지 못했다. 미국 독립 100주년 기념일이 다가왔을 때는 여신상의 일부만이 완성되었을 뿐이었다. 이 완성된 일부라도 미국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자유의 횃불이 필라델피아의 독립 기념행사에 전시되었다. 다시 2년 뒤에 사람들은 프랑스의 박람회에 전시된 거대한 여신상의 머리를 볼 수가 있었다. 자유의 여신상을 건립하는 작업도 대단히 어려웠지만 이것을 미국으로 운반하는 작업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1884년 여신상의 외부와 내부를 부분 부분으로 나누고 이들 부분을 200개의 거대한 나무 상자에 넣었다. 거대한 트럭이 50만 파운드나 나가는 이 상자들을 기차역으로 운반하고, 70량의 기차가 이들을 해안으로 운송했다. 1885년 5월 드디어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 전함에 실려 미국을 향해 출항했다. 1886년 10월 28일에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여신상의 제막식에 참석했을 때는 아직 여신상에 바쳐진 불멸의 시가 쓰여지지 않았을 때였다. “자유의 공기를 갈망하는 너 가난하고 피곤한 무리들이여” 이 시구는 1903년에 여신상에 헌정된 것이었다. 그때 여신상은 그 근처의 엘리스섬으로 몰려드는 미국 이민자들에게 희망의 등불로 인식되고 있었다. 당시 뉴욕의 에마 라자러스라는 시인이 1883년에 쓴 소네트 ‘새로운 거상 The New Colossus’의 일부가 바로 위에 인용한 시이다. 스페인 포르투갈계 유대인 민족주의 운동에 평생을 바친 시인으로, 러시아의 소설가인 투르게네프도 그녀의 작품을 칭찬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녀의 시 ‘세로운 거상’은 당시의 평론가나 일반 대중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이었다. 그녀가 이 작품을 쓴 것은 뉴욕의 디자인 아카데미가 주최한 작품 경매에 출품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그녀는 미국은 세계의 박해받는 대중을 위한 피난처라는 소신을 피력했다. 1887년 그녀가 암으로 사망한 지 16년 뒤에 이 소네트의 마지막 5행은 청동판에 새겨져서 미국의 기념비적인 시로서 보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