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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간관계
골 3:18-4:1
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25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4:1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골 3:18-4:1 / [새 생활의 인간관계] 아내된 사람들은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은 주께서 여러분에게 정해 놓으신 본분입니다. 19) 남편된 사람들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껴 주십시오. 잔인하게나 거칠게 대하지 마십시오. 20) 자녀들은 언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은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21) 아버지된 사람들은 자녀들이 용기를 잃고 의욕을 상실할 정도로 너무 심하게 꾸짖지 마십시오. 22 남의 종이 된 사람들은 모든 일에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 주인의 눈앞에서만 잘 보이려 하지 말고 언제나 열심히 일하십시오.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고 또 기쁘게 해드리고 싶으면 기쁜 마음으로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 23) 땅 위의 주인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같이 모든 일에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십시오. 3:24) 여러분에게 보수를 주는 분은 주 그리스도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에게 넘치도록 분깃을 나누어 주십니다. 사실 여러분은 이 주님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셈입니다. 25) 그러니 만일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주께서도 여러분에게 응분의 보상을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께서는 꾀를 부리는 자들을 특별히 눈감아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4:1) 주인된 사람들은 종들을 정당하고 공평하게 대하십시오. 여러분에게도 하늘에 주인이 계셔서 여러분의 행동을 살피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은 관계를 가지고 살기 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새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여러 관계 속에서 선한 열매를 맺으며 사는 것입니다. 본 단락은 이를 위한 대 원칙으로 "주께 하듯 하라"는 것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기본적인 인간관계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가정생활의 원칙(18-21) "주께 하듯 하라"는 대 원칙을 가정에 적용한다면 가정의 모든 관계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사랑과 순종입니다. 우리 주님을 생각하여 스스로를 상대방에게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가정에도 중요한 두 가지 관계가 있습니다. 부부관계와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여기서도 가장 중요한 덕목은 사랑과 순종입니다. 본 단락의 구절들을 상대를 비난하는 근거로 삼거나 자신이 받을 사랑을 염두에 두고 묵상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우상 숭배라고 골로새서가 지적하는 탐심 안에서 성경을 잘못 읽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여 새 사람으로 어떻게 내가 아내를 대해야할지 그리고 남편을 대할지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읽어야 합니다. 부부간의 도리가 무너지고, 부부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사상 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도 그리스도인은 나를 택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부부관계도 잘 가꾸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도 동일합니다. 부부사이의 영적 원리보다 더 강조되는 것은 순종의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아가는 본이 되어 상대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직장생활의 원칙(22-4:1)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라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는 외형적인 가치를 충족시켜주는 것으로 만족하기 쉽습니다. 적당하게 책임을 면할 정도로 할 수 있습니다. 종의 경우 아무리 수고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소유가 되지 않기에 더욱 그럴 수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급료를 위해 일하는 직장인들 월급이 비슷한 입장에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진심을 담아 일해야 합니다. 자신의 일을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방편으로 알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실 것입니다. 반면에 주인은 진짜 주인은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종들의 수고에 마땅한 대가를 주고, 이익을 공정하고 의롭게 분배해야 합니다. 그들의 수고로 일이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고용주가 고용인이나 직원들을 향해 품어야 할 마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입니다.
적용: 당신의 인간관계야말로 우리의 영성이 올바른 것인지 가능할 수 있는 시금석입니다. 집에서 가족들 간 신앙의 협력자와 후원자가 되고 있는지요? 당신의 직장이 선교지임을 시인하시는지요?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시 37:5-6)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의지나 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며 믿음으로 나갈 때 우리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 설 교 >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요소
골 3:18-24 / 문기태 목사
괴테는 "왕이나 백성이나 가정에서 행복을 찾는 자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가정에서 행복을 얻을 수 없다면 어디에서도 행복을 얻을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무어(Moore)는 "사람은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찾기 위하여 온 세상을 여행하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와 그것을 찾는다."라고 말했습니다.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가정을 대신할 곳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가정이야말로 지상에 있는 유일한 천국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가정의 중요성은 알면서 가정을 천국으로 가꾸기 위하여 꼭 필요한 행복한 가정의 요소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가정의 '주인공'이 되고 있기에 가정에서 심각성한 문제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정을 세우시고 행복한 낙원을 이루시기 위해 꼭 있어야 할 것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설교 말씀을 통해 여러분이 하나님이 정하신 행복한 가정생활의 기본 요소를 발견하고 여러분 가정에 갖춤으로 여러분의 가정이 모두 천국과 같이 아름답게 변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가정을 더욱 행복한 가정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기본 요소들은 무엇일까요?
첫째, 행복한 가정은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인간 관계의 시작이요. 중심입니다. 사랑이 있는 가정은 성실과 이해와 책임 그리고 헌신이 있으므로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삭막한 개인주의로 바뀐 오늘의 시대는 인간 고립을 맛보게 했고 고립은 무서운 살인자처럼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줄을 끊은 인간은 삭막한 세상을 만들고 만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지막 보루인 가정에서마저도 사랑이 식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려면 가정에서부터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가정의 사랑을 이야기 할 때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는 말씀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족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아가페' 사랑의 뜻은 '상대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주고자 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섬기며 희생하고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가 지금은 90이 다 된 노인입니다. 20여 년 전에 제가 신학교에 합격했는데 처음 입학금은 제가 벌어 모아 놓은 것으로 해결했는데 생활비가 없었습니다. 다음학기 부터는 등록금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이다 라는 믿음으로 입학을 했습니다. 그런데 60을 한참 넘긴 어머니가 가정부를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막내 아들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서 당신께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형님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아들들 얼굴에 먹칠을 할 거냐?고 절대 안된다고 강하게 만류를 하였고 저도 '어머니 기도의 뒷받침이면 충분합니다.' 하고 만류하여 어머니가 가정부로 나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머니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몸도 약하신 노인이 사랑으로 불타니 체면도, 건강도, 고생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아가페적인 사랑이 가정에 넘쳐나야 가족들이 행복해집니다.
홀트 아동복지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한국전쟁당시 홀트씨가 만난 대다수의 아이들은 병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고칠 가능성이 있는 아이들은 병원에 입원시키고 가망이 없다고 여겨지는 아이들은 자신이 직접 데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의외였습니다. 병원에 입원을 시킨 아이들중 대다수는 사망한 데 반해 그가 데리고 산 아이들은 오히려 건강해졌습니다. 집에 남은 아이들에게 그가 해 줄 수 있었던 일은 고작 아이들을 껴안아 주는 일뿐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살갗으로 전해진 사랑이 아이들을 살린 것입니다. 반면 그 아이들의 죽음의 원인은, 그들에게 비타민이나 영양소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가족의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상대방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자기의 만족과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는 다른 가족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절대 행복이 찾아 오지 않습니다.
가족간에 아낌없이 사랑으로 자신을 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희생하심같이 가족간에 서로를 위해 주저하지 않고 헌신적으로 자신을 내어주며 사랑할 때 행복한 가정이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는 사랑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사랑이 얼마나 넘칩니까?
둘째, 행복한 가정은 대화가 있습니다.
(골 3: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우리의 자녀들이 언제 격노하고 낙심하게 될까요?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고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낄 때입니다. 부모가 나를 이해해 주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낙심하고 분노합니다. 그러나 부모들에게 물어보면 펄쩍 뜁니다. 사랑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이 고생을 다 감수하는 것 아니냐? 라고 항변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대화가 단절된 것입니다. 대화가 막혀있으니까 서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대화가 중단되어 있으니까 갈등이 생기고 섭섭함이 커지고 서로를 향한 나쁜 감정만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가정을 위해 대화를 충분히 만들어 가야 합니다.
언어는 사람들만이 가지는 독특한 특성 중의 하나입니다. 사람은 말을 통하여 그의 문명을 이룩해 왔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말을 하고 싶어하고 그의 말로서 자신의 마음을 내 보이는 것입니다.(마12 34-35) 그러므로 대화는 사람들간에 사랑의 줄을 이어주고 우리 안에 품은 사랑을 무르익게 합니다. 행복한 가정을 위한 올바른 대화를 위해서는 상대방을 이해시키려 말고 먼저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대화는 진지하게 들어주는 성실한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대화는 상대방의 위치에서 들어주는 애정을 가져야 합니다. 대화는 상대의 말을 존중해 주는 예의가 있어야 합니다.
마포중앙교회 홍순철장로는 [대화의 1.2.3법칙]을 말합니다.즉 자기의 말은 1분 하고 상대방의 말은 2분 동안 들어주고 3분 동안은 상대방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는 것입니다.그러면 상대는 자기를 이해해 준다고 생각하게 되고 신뢰를 갖게 할 수 있어 대화는 거의 성공할 수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 말만 하면서
다른 사람만 탓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인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훈련하고 시도해 볼만한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대화 단절만큼 안타까운 건 없습니다. 요즘 어린이 열 명 중 두 명은 아버지와 대화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서울 14.5% 농촌 19%). 더욱 놀라운 것은 어머니와의 대화가 없는 경우가 스무 명 중 한 명꼴이나 된다고 합니다(서울 4% 농촌 10%). 어린아이들은 본성 자체가 부모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저 용돈이나주고, 필요한 것을 챙겨주는 일로 해야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미국의 유명한 외교관인 찰스 아담스 씨는 유명한 역사가였던 부르크 아담스의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부자(父子)가 같은 날 쓴 일기는 읽는 이로 하여금 중요한 것을 가르쳐줍니다. 아버지의 일기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아들과 함께 낚시를 다녀왔다. 하루를 어쩔 수없이 애 돌보는 일로 소모해야 했다>. 아들의 일기에는 이와는 정반대의 내용이었습니다 <오늘은 아빠와 함께 낚시를 다녀왔다. 나의 일생에 가장 기쁜 날이었다>. 자녀들이 대화를 원해도 부모가 바빠서 대화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핑계해서는 안됩니다. 부모와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자녀들은 다른 데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남편이 일과 사회적인 분주함으로 아내와 대화를 기피하고, 부모들이 바쁘다고 자녀와 대화를 소홀히 할 때,세상의 많은 위험한 유혹이 우리의 가정과 자녀들을 삼킬지도 모릅니다.
13세기 호헨슈타인가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몇몇 어린이 들에게 대화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최대한 제공하였습니다. 다만 어린이들이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을때 과연 어떤 언어 어느 나라 말을 먼저 상용할 것인가를 실험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나 그 실험은 헛수고였습니다. 왜냐면 아이들은 다 죽었기 때문
입니다. 대화의 단절로 인해 우리의 자녀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대화가 없는 가정, 대화가 없는 삶은 사실상 죽은 가정이요 죽은 삶입니다.
여러분 행복을 원하면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행복한 가정을 만들려면 가정안에 대화가 충분하게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오늘부터 대화가 풍성하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행복한 가정은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창조의 기본 질서로 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통하여 인간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삶의 지혜가 보존, 전승되는 곳이 되게 하셨습니다.
가족의 행복과 안전은 질서에 달려 있습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골 3:18)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골 3:20)
행복한 가정에는 영적인 권위의 질서가 세워져 있습니다. 부모의 권위, 가장의 권위가 세워져야 합니다 이 권위는 하나님이 정하시고 인정을 하신 것입니다. 한 가정의 가장은 그 가정의 머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행복한 가정에는 순종의 질서가 있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10계명이 명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순종을 하나님께 하듯 해야 합니다. 행복한 가정에는 징계의 질서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징계를 포기한 시대며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진 상태입니다. 그러나 징계가 당당하게 아직 남아 있는 곳이 있다면 가정일 것입니다. 징계는 적극적인 사랑의 표시입니다, 잠언서는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3:11-12)라고 하셨습니다 질서는 참된 안전과 자유 그리고 축복이 약속되어 있는 자리입니다.
1954년에 영국군 수송선 엠파이어 윈들시호가 지중해 상을 항해할 때 폭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보일러실에서 승조원 네 명이 죽고 불이 번지자 선장은 하선 명령을 내렸습니다. 1,515명이 승선한 상황에서 구명 담당관이 군인 가족들인 여성과 아이들 그리고 노인들의 순서로 구명정에 태울 때까지 병사들과 선원들은 명령받은 대로 전혀 요동하지 않았고 젊은 병사들을 태우고 난 후 300명의 병사와 선원은 선상에 남았습니다. 구명 담당관은 그들에게 옷을 벗고 물로 뛰어 내리되 구명정 가까이 가는 것은 금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선장과 구명 담당관이 배를 떠났고 얼마 후 화물선 한 척이 지나다가 그들을 모두 구출했습니다. 질서 의식과 자제력은 놀라운 일을 가능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질서가 실종되고 무질서와 그로인한 혼란이 나무하고 있습니다. 법을 지키는 사람만 손해라는 생각이 사람들마다 가득합니다. 모든 권위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스승의 권위, 가장 또는 부모의 권위, 법을 집행하는 경찰이나 법관의 권위, 지도자의 권위가 사라져가고 아무나 권위에 정면 도전을 하려고 합니다. 그때문에 엄청난 혼란이 찾아 오고 결국 그로인해 무질서와 혼란에 우리가 점점 더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부터 질서를 회복해야 합니다. 성경의 명령대로 자녀들은 모든 일에 부모님께 복종하는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사라는 남편을 주라고 부르며 복종했습니다. 남편들을 포함해 모든 가족들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십시오. 진정한 질서의 회복은 피차 존경하며 서로 복종하는 겸손함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넷째 행복한 가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모습이 있습니다.
경외라는 말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존엄하심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표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존중하며 그의 계명에 복종하고 악에서 떠나는 삶의 모습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의 외적인 증거입니다. 시34편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 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을 만드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라 하셨습니다.
옛날에 서대문 영천시장은 콩나물 장수가 많기로 유명했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새벽마다 콩나물 통을 머리에 이고 시장에 나가는 길에 교회에 들러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아주머니의 인생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게 살면서 자식들을 믿음으로 성장시켜 하나님의 일꾼으로 길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아주머니는 아들을 훌륭한 사업가로 키워냈습니다. 아들은 훗날 큰 제약회사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아들은 그의 어머니가 매일 새벽에 교회에 나가 열심히 기도하던 일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문에 지금의 자기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종소리가 연상되도록 자신의 제약회사 심벌마크를 종으로 정했습니다. 그 회사는 빠르게 급성장하여 이름만대도 누구나 다 알만한 회사가 되었습니다. 종근당제약회사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을 지낸 바 있고 미국 영적 대각성기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쳤던 인물입니다. 그의 부인 역시 신앙이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훌륭한 인물이었던 조나단 에드워즈와 그의 후손을 추적하여 그의 가계(家系)를 연구하였습니다. 그의 직계 후손은 현재까지 873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대학 총장을 지낸 사람이 12명, 교수 65명, 의사 60명, 성직자 100명, 군인 75명, 저술가 85명, 변호사 100명, 판사 30명, 공무원 80명, 하원의원 3명, 상원의원 2명, 미국 부통령 1명, 그리고 260명이 평범한 신앙인으로 지냈다고 합니다.
한편 조나단 에드워즈에게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맥스 쥬크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함께 교회 주일학교에 빠지지 않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맥스 쥬크는 어느 날부터인가 믿음을 잃어버리고 교회를 떠나 방탕한 생활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신앙이 없는 여자와 결혼해서 자녀들을 두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연구했던 사람은 그의 친구인 맥스 쥬크의 후손들도 추적해 보았습니다. 그의 후손은 1,292명인데 그 가운데 유아사망 309명, 거지 310명, 불구자 440명, 매춘부 50명, 도둑 60명, 살인자 70명, 별 볼일 없이 산 사람 53명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두 가계의 대조는 경건한 가정이 가족들과 후손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실제로 보여주는 결과입니다. 부모가 경건한 삶을 살 때, 자녀들이 올바른 길을 갑니다. 하나님께 인정받고 복을 받아 잘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가족들과의 사랑의 만남이 이루어 질 뿐 아니라 경건한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만남도 함께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때 참된 행복이 여러분의 가정에 찾아올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에는 사랑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에는 따뜻한 대화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에는 질서가 있습니까? 어버이의 권위가 세워져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가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에 사랑과 대화와 질서가 자리잡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뿌리를 내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국을 이루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주님 중심의 삶
골 3:18-4:1 / 이수영 목사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후5:17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새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 엡4:21-24에서는 이렇게 썼습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리고 골3:10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누구든지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봅니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3:11) 그래서 우리도 그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새 사람을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그 뜻에 순종하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이 세상에 탄생한 새 인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인종, 언어, 문화적 배경, 남녀노소, 신분에 상관없이 새로 창조된 백성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어느 곳에 살고 있더라도 궁극적으로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새 인류이니만큼 새로운 인간관계 속에서 새로운 모습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들어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그 중심에 계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사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의 모든 인간관계가 주님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 중심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지를 가르치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세 가지 기본적인 인간관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는 원리를 제시합니다. 그 세 가지 기본적인 인간관계란 부부간의 관계, 부모자식간의 관계, 주인과 종의 관계를 말합니다. 이 세 기본적 인간관계의 당사자들에게 주는 사도 바울의 명령은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사회질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남편이고 아버지이며 주인인 사람이 아내와 자녀와 종들에 대하여 전권을 쥐고 있고 그들로부터 복종을 받아야 하던 기존질서를 뒤흔드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내, 자녀, 종들보다는 남편, 부모, 주인들에 대한 명령이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 혁명에 가담하는 백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언급한 세 가지 기본적 인간관계 중 첫 번째는 부부의 관계입니다. 본문 18절을 봅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은 일반적인 관습과의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다음 말입니다: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사도 바울은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주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는 마땅한 일이라고 가르치며, 이 도리가 주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아내에게 명령을 하는 주체가 남편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기 이전에 주님께 복종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 안에서 마땅한 일이기 때문에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부부는 남편과 아내 둘만 있는 인간관계가 아니라 그 사이에 주님이 계시고 그리스도께서 중심이시며 주인이시고 명령자이시며 남편과 아내는 함께 주님에게 순종하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남녀가 부부가 될 때는 그런 관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새 인류인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서 진짜 중요한 명령은 남편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본문 19절입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사도 바울은 남편들에게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합니다. 아내를 사랑하되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은 남편 쪽에서 일방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아내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내의 생각에는 전혀 사랑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남편이 사랑이랍시고 일방적으로 자기의 언행을 받아들이기를 강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편들이 아내의 인격과 자유를 존중하며 아내의 감정과 의지를 정확하게 파악해가면서 사랑을 표현하고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남편들이 아내야 괴롭든 말든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며 자기 좋은 대로만 행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신자들에게 편지하면서는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6:25)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어떻게 자기 자신을 주셨습니까? 교회 즉 하나님께서 구원에로 택하신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남편들이 아내들을 사랑한다면 아내들이 어찌 그런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희생적 사랑 없이 아내의 복종만을 요구하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 같은 에베소서에서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라."(엡6:28, 33) 했습니다. 남편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은 아내를 자기 자신과 꼭 같이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아내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라는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완전히 아내의 것으로 만들라는 뜻입니다. 그런 남편에게 아내들이 전적으로 복종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 안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의 전적인 동등성과 상호존중의 정신이 강조되고 있음을 바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언급하는 두 번째 기본적인 인간관계는 부모자식간의 관계입니다. 먼저 본문 20절을 봅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자녀들은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명령 또한 전통적인 가르침과 충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그 말 뒤에 덧붙인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기쁘게 한다"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거의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묘사하는 데 쓰이는 말입니다. 따라서 "주 안에서 기쁘게 한다"는 것은 주 안에 있는 사람들 즉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라"는 말은 자녀들이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마땅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부부관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부모자식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사도 바울의 명령의 강조점은 오히려 부모들에게 주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 21절을 봅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여기서도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부모자식간의 관계가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녀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부모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인격체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의 창조자이시고 주인이신 이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부모는 하나님으로부터 일정 기간 자녀들의 양육을 위탁받았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양육을 위탁하신 이가 하나님이식 때문에 그의 뜻대로 양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권리보다는 책임을 강조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언급하는 세 번째 기본적인 인간관계는 주종간의 관계입니다. 먼저 종의 신분을 가진 신자들에게 하는 명령입니다. 본문 22-23절을 봅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다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종이나 노예들은 주인에게 순종하기는 하지만 기쁜 마음으로 하지 않고 마지못해 하며 눈가림으로만 하기 십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종들에게 그리스도인은 그 주인이 신자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성심을 다해 섬기라고 명령합니다.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 기쁨으로 최선을 다하라고 합니다. 상전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종이라고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자유인이 되었으니 이제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생각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내면의 자유와 평화를 얻는 것 하고 육신의 주인에게 신실한 종으로 남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주인과 종 사이의 관계에도 주님이 계셔야 함을 가르친 것입니다.
이 명령은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곧 우리의 직업의식과 노동의 윤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주신 일이라는 직업관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느 직장에서 어떤 직책에 있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상사의 상격이 어떠하든 고용주의 종교가 무엇이든 불법적이고 부당한 일이 아닌 한 가리지 않고 충성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우리에ㅔ게 할 일을 주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로 여겨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직업과 직무 속에서도 주님이 그 중심에 계신 것이 주 안에서 새 인류인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말합니다. 본문 24-25절입니다: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사도 바울은 여기서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한 것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성실하게 일한 대가를 세상의 주인으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모든 일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일에 있어서 궁극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만유를 다스리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감격과 기쁨과 감사 속에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불의 속에는 마지못해 순종하고 눈가림으로만 일하는 불성실함도 포함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시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지 않는 사람, 겉치레로만 일하는 척하는 사람을 다 알고 계십니다.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하는 말의 뜻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불의를 행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불의의 보응을 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하는 말은 무슨 일에든 성심으로 최선을 다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귀한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의로우시고 모든 것을 정확하게 다 아시는 하나님이 판단하시고 보응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주인은 불의하고 불공평할지라도 궁극적으로 상을 주실 이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인 인간관계를 위한 사도 바울의 마지막 명령은 상전들을 향한 것입니다. 본문 4:1입니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이 세상의 종들이나 주인들이나 모두 하나님 앞에서는 꼭 같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상전들에게는 준엄한 경고가 되며 종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또 위로가 되는 말입니다. 종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상전들을 넘어서 모든 사람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상관이나 고용주인 사람들은 그들의 상전이 하늘에 계심을 잊지 말고 자기 책임과 관리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의와 공평을 베풀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새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일어나야 하는 변화의 핵심은 남편이고 아버지며 주인이던 사람 중심의 삶에서 주님 중심의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명령과 복종의 관계에서 동등과 상호존중의 관계로 바뀌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모든 일에 있어서 주님 중심이 되고 모두가 하나님 앞에 나란히 서는 관계로 바뀌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관계, 부모자식간의 관계, 주종간의 관계는 사도 바울 당대에는 한 가정을 형성하는 기본관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정은 사회의 기본단위입니다. 가정에서의 올바른 관계는 곧 사회에서의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지고 유지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의 관계질서가 새로워지면 사회의 관계질서도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갖게 된 새로운 관계의 삶은 우리 사회를 위해서도 보편적 타당성을 지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평등과 상호존중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주 안에서 새 인류인 우리 그리스도인의 관계적 삶을 아름답게 실천해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골 3:18-4:1 / 안효관 목사
우리 전주는 참으로 살기가 좋은 곳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우리 고을을 온전전(全) 자, 고을주(州를) 자를 써서 전주라고 했습니다. 살기에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고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론 우리 전주가 서울과 같이 큰 도시가 아니라는 것이 아쉬울 때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보고 싶은 영화가 전주에 내려오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제가 보고 싶었고, 또 여러분에게 추천해 드리고 싶은 영화가 “믿음의 승부”라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전주에서는 상영되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미국의 한 작은 시골교회에서 목사님과 5백여 명의 교인들이 소명을 품고 제작한 영화입니다. 영화제작에 들어간 돈이 불과 1만 달러(약 1200만원)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 세게 56개국에서 개봉되어 제작비 대비 3천배가 넘는 수익을 냈습니다. 많은 수익을 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시골의 한 기독교학교에 ‘이글스’라는 미식축구팀이 있었습니다. 6년째 저조한 성적으로 팀이 해체될 위기에 빠지고, 감독은 해임당할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 감독은 모든 위기를 믿음으로 극복하기로 마음먹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합니다. 감독은 어린 선수들에게도 모든 일을 믿음으로 해 나가자고 설득하게 되고, 선수들도 모두 감독의 생각에 공감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결국 미국 고교 미식축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 영화의 한 장면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여기에서 이 영화가 말하고 싶은 승리의 공식을 보여줍니다. 감독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매사에 최선을 다해라. 승리하면 주님께 영광을 돌려라. 그리고 실패해도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나는 이 일에 모든 것을 걸고 최선을 다하겠다. 그리고 나머지는 주님께 맡기겠다.”
그리고 또 하나 감동을 주는 말은 “축구 경기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서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심지어는 혼자서 인터넷을 할 때에도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우리가 신앙인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신앙이 우리의 삶에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기준이 된 삶은 언제나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시작은 골로새서 3:1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통해서 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그 새 생명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기에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3: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하늘로부터 주어진 영원한 생명을 가진 우리 신앙인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삶을 포기하며 살아야 하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분명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고 하늘을 소망하며 살아가지만, 우리 신앙인은 오늘 내게 주어진 삶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이라는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먼저 18-17절에서는 부부관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합니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아내는 지금 내게 주어진 아내로서의 자리에서, 또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핑계 삼아 아내 사랑하는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아내를 더욱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고 하면서 남편의 말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남편에게 더욱 복종합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한다는 이유로 가정에서, 부부관계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우리의 가정생활에서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기도 열심히 한다는 것 때문에 가정 일에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은 가정 일에도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 해야 합니다. 그게 바른 신앙입니다.
20-21절에서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에게는 모든 일에 부모님께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은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이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뜻도 되지만,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란 의미도 됩니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산다고 하면서 부모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리고 부모님들은 자녀를 노엽게 해서는 안 됩니다. 왜 부모님들이 자녀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자녀들을 노엽게 합니까? 아마도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일 것입니다. 첫째는 부모님들이 너무 자식에 대해서 욕심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부모님들이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 사랑이 필요할 때 사랑을 풍성하게 공급해 주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관심이 필요할 때 자녀들의 마음에 흡족할만큼 관심을 기울여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부모님들이 부모로서 자식들에게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자녀로서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부모님 역시 부모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신앙을 핑계 삼아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지 못하거나, 부모로서 해야 할 일에 게을리 하는 것은 결코 아름답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22절에서는 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노예제도가 보편화되어 있던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쓰여진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노예제도가 철폐된 오늘 우리 시대에는 필요 없는 말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오늘날은 로마 시대와 같은 노예제도는 없다 하더라도, 오늘의 사회에도 상사와 부하, 선배와 후배, 고용주와 피고용인이 존재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장이 되어 직원을 많이 두고서 회사를 운영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 사장님 밑에서 직원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직장에서는 윗사람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말단 직원도 있는가 하면, 그 위에서 그들에게 명령도 하고 일을 시키는 상급자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본문 22절의 말씀을 오늘 우리 시대의 상황에 맞게 바꾼다면 ‘직장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2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이 말씀을 오늘 우리 시대의 언어로 바꾼다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남의 수하에서 직장생활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모든 일에 상관들에게 순종하십시오. 상관의 눈치를 보면서 적당하게 하려는 사람들처럼 하지 말고, 오직 주님을 두려워하고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맡겨진 일에 충성하십시오.”
종이 주인을 존경하여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을 것입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런데 성실하지 않는 종은 주인이 보는 앞에서는 아주 열심히 하는 것처럼 합니다. 그러나 주인이 없을 때에는 대충대충 일을 합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은 “눈가림”이라고 말합니다. ‘눈가림’이 무엇입니까?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열심히 하는 척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본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인으로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주인이 보든 보지 않든 모든 일에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합니다. 비록 주인이 없는 곳에서 일할지라도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언제나 그곳에 함께 계셔서 나를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주인은 없을지라도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믿음 때문에 성실하게 일해야 합니다.
고대에는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주인이 종에게 시장에 가서 뭔가를 사오라고 시킵니다. 그러면 종은 주인이 준 돈을 가지고 시장에 갑니다. 시장에 가서 주인이 사오라고 한 것을 삽니다. 예를 들어 1000원짜리 하나를 샀다면 주인에게는 1200원에 샀다고 거짓말을 하고서 나머지 200원은 자신이 착취를 합니다. 대부분 많은 종을 거느리고 있는 주인은 그게 얼마 짜리인지 잘 모릅니다. 주인이 시장에 가서 직접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정확한 가격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 종은 가게 주인과 짜고서 1000원 짜리를 1200원에 샀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가게 주인의 입장에서도 다른 가게에서 사지 않고 자신에게 와서 사주기 때문에 계속 오라고 1000원짜리를 1200원에 팔았다고 종의 거짓말에 동조를 해 줍니다. 그렇게 시장의 가게주인과 짜고서 거짓말을 한 종이지만, 그 내용을 모르는 주인은 종이 심부름을 잘 했다고 칭찬해 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게 눈가림이라는 것입니다. 주인에게는 심부름 잘하고 일 잘하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뒤로는 주인을 속여먹고 거짓된 행동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종을 주인은 칭찬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칭찬하지 않으십니다.
군대에 갔다 온 우리나라 남자들이 군대에서 배운 것 가운데 하나가 ‘대충 철처히’라는 것입니다. 상사에게 꾸중 듣지 않을 정도로만 대충하고 상관이 있을 때에는 아주 잘하는 것처럼 하는 것이 군대 생활을 잘하는 것입니다. 뭔가 남들보다 잘하기 위해서 열심히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열심히 하든 대충하든 국방부 시계는 돌아가기 때문에, 대충대충 꾸중 듣지 않을 정도로만 하고 제대하면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군대에 조금 늦게 갔습니다. 나이 27살에 결혼하고서 졸병으로 군대에 입대해서 30살에 제대했으니까 상당히 늦은 것이지요. 훈련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았는데 통신여단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통신여단 아래에는 전국에 대대가 흩어져 있기 때문에 일단 여단 본부로 갔다가 다시금 대대로 재배치됩니다. 재배치를 받기 위해서 여단 본부에서 약 10명 정도가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고참이 와서는 ‘여기 글씨 좀 쓰는 놈 있어?’ 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 때는 그래도 제가 글씨를 좀 괜찮게 썼거든요. 그래서 제가 손을 들었지요. 그 고참을 따라가서 하루 종일 챠트라는 것을 썼습니다. 당시에는 컴퓨터가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브리핑을 하려면 커다란 전지에 매직으로 챠트를 써야 했는데, 하루 종일 그 일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녁에 대기실에 돌아왔더니, 대기병들을 관리하는 고참이 저에게 ‘야, 그렇게 군대생활하면 죽도록 고생만 하게 돼.’ 그러는 것입니다. 뭐 잘 한다고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것이 군대생활 편하게 하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군대생활 열심히 하려고 하지 말고 대충 하라는 것이지요.
그런 사고가 사회에 나와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사장의 눈에 나지 않을 정도로 대충하고서 월급만 받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일을 합니다. 남이 보지 않는 데서 열심히 하는 것은 바보처럼 여겨집니다. 남이 보지도 않고 알아주지도 않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성실한 사람이라고 평가되기 보다는 ‘바보’ 취급당하기 십상입니다.
22절에서 말씀합니다.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주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 말씀입니다. 눈가림식으로 일하다가는 주인에게는 칭찬받을지 몰라도, 은밀한 것까지도 다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을 날이 반드시 오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오늘을 대충 살 수가 없습니다. 적당하게 남의 눈을 속이며 살 수 없습니다. 오늘 사람에게 칭찬 받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눈을 속이고 거짓된 모습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심판이 있지만, 성실하게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는 상급이 주어집니다. 24절입니다.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사람인 주인을 섬길지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에만 상급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내 이웃에게 행한 모든 일에 상급을 주십니다. 아이를 잘 키워도 상급을 주시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을 해도 상급을 주십니다. 남편에게 잘하고 아내에게 잘 해도 하늘에 상급을 주십니다.
사람들이 눈가림을 하는 이유는 사람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에게 칭찬받기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칭찬을 사모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박수를 받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칭찬하지 않으신다면 그 삶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반대로 세상 사람들은 칭찬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칭찬하신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하며, 그것으로 우리의 기쁨을 삼고 살아갑니다. 그게 바로 신앙인의 정체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하나님께서 칭찬해 주심을 바라며 우리의 삶에 최선을 다하여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보다 하나님께 칭찬받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눈가림식으로 일을 해도 사람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눈가림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를 보시기 때문에 우리는 늘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보든 보지 않든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인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아버지가 자기의 고향으로 가던 중에 생긴 일이라고 합니다. 말을 타고 숲 속을 가던 중 그만 강도를 만나고 말았습니다. 강도들은 그가 가지고 있는 값진 것을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 그리고는 “이게 네가 가진 것 전부냐?”고 물었습니다. 칸트의 아버지가 “이게 전부” 라고 답하자 강도들은 타고 가던 말까지 빼앗은 후 그를 놓아주었습니다. 강도들을 피해 빠른 걸음으로 도망을 치던 칸트의 아버지는 도망치던 도중에 뭔가가 손에 닿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옷 속에 안전하게 꿰매어 보관해 둔 금덩이였습니다. 그는 강도들 앞에서 무서움 때문에 그 금덩이를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경우 그것을 빼앗기지 않았다고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강도떼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왜 되돌아 왔느냐?”는 강도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내가 아까 한 말은 진실이 아니었소. 너무 무서워서 내 옷 속에 감추어놓았던 금덩이가 있는 것을 생각 못했소. 여기 금덩이를 받으시오.” 그 말을 들은 강도들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강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 금덩이를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두목이 나서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어르신의 것을 빼앗으면 우리가 벌 받는다. 이 분의 것을 다 되돌려 주어라.” 그래서 칸트의 아버지는 조금 전에 빼앗겼던 것까지 다 되돌려 받은 후에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세상은 정직하게 사는 자의 것을 빼앗아가려 합니다. 그러나 거짓된 세상에 빼앗긴 정직한 자의 몫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그리스도를 섬김으로 세상에서 정직하고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보응해 주십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 세상의 방식으로 살도록 강요합니다. 세상 방식으로 살지 않으면 우리가 가진 것 다 잃고 말 것이라고 위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세상에 현혹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로마서 12:2)
여러분, 세상이 우리의 귀에 속삭이는 소리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대충대충 살아도 된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적당하게 눈가림을 하며 살아도 된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하듯이 정직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면 언제나 손해만 보게 될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불의를 행하는 자들이 결국에는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세상을 즐기며 적당히 살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때가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교회당 안에서만 신앙 생활하는 척하고, 세상에서는 하나님 없는 사람처럼 살아도 된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정이든, 우리의 직장이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눈가림식으로만 해도 칭찬 받을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눈가림식으로 하지 말고 모든 일을 주님께 하듯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누구의 음성을 들으시렵니까? 멸망으로 끌고 가려는 세상의 속삭임입니까? 아니면 영생의 축복과 기쁨을 누리는 푸른 초장과 잔잔한 시냇가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음성입니까?
우리의 삶의 목표는 세상에서 적당히 즐기다가 가는 것이 아닙니다. 눈가림식으로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면 그것으로 족한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이사야 43:21) 하나님께서는 오늘의 내 삶을 통해 영광 받길 원하십니다. 입으로 부르는 찬송이 아니라 진실하고 성실한 삶으로 부르는 찬송을 받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열심히 일하는 자에게 상주십니다
골 3:23-24 / 이윤재 목사
10월 첫 주일입니다. 이 아름다운 가을에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요즘 얼마나 힘드십니까?”. 요즘 너무 어렵다는 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 원인중의 하나가 세월호라고 말합니다. 세월호로 억울하게 우리 곁을 떠난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지만 그것이 장기화되면서 경제가 많이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어떤 신문 경제면을 보니까 세월호로 인해 우리 경제가 받은 피해는 대략 2-3조라고 합니다. 직접적 피해가 1조, 물속에 가라 앉은 자산이 한 200억, 보험이 몇 천억, 어장과 어민 생업 피해가 몇 천억, 또 그로 인해 어려워진 경제활동등, 경제 침체의 모든 책임이 세월호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세월호로 인해 경제가 더 어려워진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어려운 경제여건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믿음으로 살아야 할까를 묻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어떤 통계를 보니까 직장인의 70%가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경험한답니다. 약 20% 정도는 과로로 탈진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심장마비로 쓰러진 사람의 33%가 월요일에 일어난 답니다. 왜냐하면 월요일은 일을 시작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일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심장에 무리를 준 것입니다. 남성 자살율이 가장 높은 때도 월요일 저녁입니다. 월요일 에 일을 시작하면서 생각대로 일이 안되어 좌절해서 생긴 자살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일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까? 자신의 생각대로 일이 안풀려 마음 고생이 심하지 않습니까? 이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오늘 말씀은 이 주제에 대하여 답변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을 읽어 볼까요? 골3:23-24,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이 짧은 구절은 사도 바울이 전도하면서 만난 많은 직장인들에게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조언을 준 것입니다. 바울 자신도 직접 텐트를 만드는 일을 하면서 선교했기 때문에 일이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힘을 얻기 원합니까? 이 말씀이 어려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되고 새로운 방향이 될까요? 이 말씀은 먼저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다시 23절을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골3:23,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했으니까 일의 종류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일의 종류에 따라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누가 하느냐?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좋은 일, 나쁜 일이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토저가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거룩하고 속된 일은 없다. 다만 거룩하고 속된 생각만 있을 뿐이다”. 사업가 조지 크레인도 말했습니다. “어떤 직업에도 미래는 없다. 미래는 바로 그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있다”.
여러분은 하나님도 열심히 일하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때의 상황이 무엇입니까? 창1:2, “땅이 혼돈하며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위에 있을 때”. 하나님도 천지를 창조할 때, 좋은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천지가 온통 혼돈속에 있고 어둠이 짙게 깔린 허공속에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외치자 빛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최초의 일은 고통가운데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고통속에서 천지를 창조했으니 그 결과가 얼마나 아름다웠겠습니까? 하나님이 감탄해서 소리쳤습니다. “아, 보기에 참 좋다”. 혼돈과 흑암속에서 얻은 열매였기 때문에 그 감격은 더 컷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 그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창1:28절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에덴을 지으신 후 또 말씀하셨습니다. 창2:15, “여호아 하나님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하나님이 그 자신의 일을 우리와 나누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만든 정원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정원의 주인이 되고 우리는 정원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모든 피조물에게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을 주셨지만 일하라는 명령은 오직 사람에게만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은 사람의 사람됨의 고유한 축복입니다. 일은 죄의 심판으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저주가 아닙니다. 모든 일은 본래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가 그 일을 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과 영광스러운 동업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이 의미를 가지고 행복하려면 우리가 먼저 믿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귀하고 천한 일이 따로 없다. 일 자체에 비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내 안에 비전이 있다. 우리는 일함으로 하나님과 동업자가 된다“. 우리 교인들을 보면 어려운 시대에 열심히 일하는 분들이 많아 자랑스럽습니다. 의사인 어떤 집사님은 새벽마다 교회 나와 늦게 까지 기도합니다. 한번은 어떤 목사님이 보니까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느냐? 가정에 무슨 일 있느냐? 물었더니 몇 주전에 환자를 수술했는데 수술 부위가 염증이 생기고 아물지 않아 안타가워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말했답니다. 그 말에 그 목사님도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의사가 최선을 다해 수술할 뿐이지 그 이상을 어떻게 책임지겠습니까? 그런데 환자가 잘 낫지 않는 것까지 마음 아파 기도하니 얼마나 아름다운 의사입니까? 저도 그 말을 듣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의사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회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또 한 분의 의사도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는 데 그는 새벽기도를 마치고 곧장 병원으로 가서 직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병원이 교회가 된 것입니다.
인천 송도에 직장을 가진 한 집사님은 출근시간만 3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새벽 일찍 출근해야 합니다. 새벽기도에 참석할 수 없어 아내가 새벽기도에 나와 설교를 녹음하면 그 설교를 지하철에서 들으며 직장에 출근합니다. 그리고 직장에서 시간만 나면 매일 큐티를 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퇴근 길에는 늦게라도 교회에 들려 본당에 올라와 혼자 기도한 후에 집으로 돌아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 너무 멀어요. 신앙생활 하기 힘들어요”. 했더니 최근에 분당으로 발령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하신 것입니다. 자기일에 충실한 사람들, 직장생활과 교회생활이 한 하나님안에 있게 한 믿음의 사람들, 그들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영국의 스펄전 목사님의 이야기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일 한 사람이 교회에 등록하면 그는 그의 믿음의 증거를 보기 원했습니다. 어느 주일, 한 사람이 등록했는 데 그녀의 직업은 하녀였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몇 주후에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예수 믿으려고 교회 나오는 데 당신이 믿는 증거를 보여주세요”. 여인이 말했습니다. “예, 저는 예수 믿기전에 제가 일하는 집의 먼지를 대충 떨어 양탄자 밑으로 집어 넣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깨끗이 먼지를 담아 쓰레기통에 버립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잘했습니다. 당신은 교인될 충분한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교인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일 뿐 아니라 주인집의 쓰레기를 쓰레기 통에 잘 버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초대 교회에 한 개성 상인이 예수믿었습니다. 그는 주로 중국인과 거래하며 일을 했는 데 한번은 선교사가 중국상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과 거래하는 한국인 누가 예수믿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볼 때 그에게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중죽 상인이 말했습니다. “예, 있습니다. 옛날은 제 돈을 빌려 쓰고 안 갚았는 데 지금은 꼬박 꼬박 갚습니다. 정말 달라졌어요. 예수믿는 것, 참 좋아요”. 안 믿는 사람에게 믿는 사람의 변화는 열심히 교회 나간다는 것이 아니라 빌린 돈 잘 갚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잘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 믿고 자기 직업을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 믿고 자기 직업에 더 충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름을 받자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까? 나중에 다시 보십시오. 제자들은 고기잡은 일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버린 것은일에 대한 잘못된 태도지 일이 아닙니다. 삭개오를 보십시오. 예수님 만나고 세무서에 사표냈나요? 사표낸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다시 여리고 세무서로 돌아가 다시는 남의 것 횡령하거나 배임하지 않고 남에게 선한 일을 하는 착한 세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 만나서 버린 것은 직장이 아니라 잘못된 삶의 태도와 불신앙이었습니다.
구약에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엘리사 시대에 나아만 장군이 문등병에 걸려 요단강에 와서 고쳤습니다. 그리고 돌아가 군인의 일을 그만 두었나요? 성경에 보면 다시 돌아가 아람왕을 도와 나라를 위해 일합니다. 그가 버린 것은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드름을 피우는 교만이었습니다. 또 하나가 있습니다. 왕상 18장입니다. 엘리야 시대에 아합왕은 이방인 아내 이세벨 때문에 나쁜 왕이 되었습니다. 여호아의 제단을 헐고 하나님의 종들을 죽이는 일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때 그에게 오바댜라는 신하가 있었는 데 이 신하는 말하자면 나쁜 왕밑에 있던 좋은 신하였습니다. 그가 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왕이 독재가가 되면 당연히 왕을 떠날 수도 있었을텐데 끝까지 남아 왕을 보필합니다. 그는 자기 일에 충실한 직장인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믿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최초의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흙으로 사람 짓는 일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육체노동입니다. 예수님이 30년동안 무슨 일을 하신지 아십니까? 목수일입니다. 구약의 첫장인 창세기를 열면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농부로 일하시고 신약의 첫장인 마태복음을 열면 예수님은 아버지를 도와 목수로 일합니다. 하나님도 일하시고 예수님도 일하시니 나도 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골3:23 다시 보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그 일을 할 때 하나님과 동역자가 됩니다. 그러면 두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일해야 합니까?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일해야 합니까?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합니다.
그 최선을 다하여 일하는 모습이 오늘 말씀에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먼저 23절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최선을 다해 일하는 첫 번째 방법은 “마음을 다하여”입니다. 어떤 기술이나 기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호랑이는 토끼를 잡을 때에도 두 손으로 잡는다”는 말을 아십니까? 호랑이가 토끼 한 마리 잡는 데 무슨 두 손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만큼 최선을 다한다는 말입니다. 전도서의 말씀입니다. 전9:10,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어떤 일인지 따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돈을 많이 주나 적게 주나 그것을 먼저 계산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네 손이 일을 얻는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잘못하는 일도 힘을 다하여 하다 보면 잘하게 되어 있습니다. 전3:13도 있습니다.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수고해야 낙을 누립니다.
최선을 다해 일한다는 것은 소명에 따라 일한다는 것입니다. 소명은 ”부르심“입니다. 우리가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일로 나를 불렀기 때문입니다. 소명은 내가 하고 싶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소명의 가장 좋은 정의는 ”내가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일한다는 것은 일의 결과와 상관없이 과정에 충실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아십니까? 전3:22,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분복이기 때문이라”. 남의 일을 엿보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불행이 비교에서 나옵니다. 자기 일에 즐거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이 “자기 일”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또 하나가 있습니다. 23절 중간 보십시오. 골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지 말고 사람에게 하듯 하라”. 사람을 그리스도 대하듯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할 때 어떤 일이나 공통적인 것은 일은 혼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사람과 함께 하고 사람을 위해 합니다. 사람이 일의 동역자고 사람이 일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일터에서 사람들과 잘 지냅니까? 사람과 잘 지내는 성경적 기준이 이것입니다. “사람을 그리스도처럼 대하라”. 프랑스 테제 공동체에 가면 대문에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오늘 당신이 만난 사람은 그리스도시다”.
어느 교회 다니는 사장님의 간증을 읽었습니다. 이 분은 온 힘을 다해 열심히 일하는 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의 아내가 어느날 갑자기 말기암 환자가 되었습니다. 의사로부터 앞으로 1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장은 남은 1년 동안이라도 어떻게든 자신과 아내, 두 사람의 생애를 아름답게 보내기 위하여 계획을 세웠습니다. 평소에 아내와 못다 한 정을 나누고 수고한 아내를 위로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3개월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가 새벽 2시였습니다. 사장은 누군가의 도움을 청하려고 새벽 두 시에 자신의 개인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렸습니다. 대략 500명의 명단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전화를 하려고 하니까 이 늦은 시간에 전화하면 실례가 될까 아무에게도 전화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은 답답하고 눈물은 흐르는 데 이 늦은 밤에 전화해도 괜찮을 사람 하나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할 수 없이 교회 요람을 뒤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 중에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도 열심히 나가지 않아 마음 통하는 사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사업은 열심히 해서 돈은 벌었지만 회사에도, 교회에도 자기가 어려울 때 달려와 줄 수 있는 사람 하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사장은 119에 연락해서 혼자 죽은 아내와 함께 병원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남의 이야기같습니까? 혹시 우리는 너무 강팍하게 살지 않습니까? 돈버는 일에 사력을 다하다가 제대로 친구 하나 없는 것 아닙니까? 건성으로 교회만 다니느라 마음을 나누는 친구 하나 없는 것 아닙니까? 다시 말씀 보십시오. 골3:23, “주께 하듯 하지 말고 사람에게 하듯 하라”.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물질은 사용하고, 사람은 사랑하라”.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사용하려고 하니까 문제입니다. 물질을 사용하지 않고 사랑하려고 하니까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에 최선을 다하는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24절입니다. 골3:24,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여기에 “상”이 나옵니다. “상”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받은 사람은 모두 1등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일을 하고 사는 우리는 그 일에 탁월해야 합니다. 탁월성은 전문성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도퍼 지먼이란 경영학자가 전문성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전문성이란 복잡한 것을 능숙하게 해내는 능력이다.” 남들이 볼 때는 복잡하지만 전문가에게는 쉽습니다. 남들이 못하는 것을 하는 것을 전문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전문성을 갖되 한 가지 조심해야 합니다. “기업의 상을 주께서 받을 줄 아나니”. 여기서 “주”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 일을 망치는 가장 나쁜 것이 둘이 있습니다. 비교의식과 경쟁의식입니다. 이 둘은 사실 쌍둥이입니다. 둘의 공통점은 사람을 상대한다는 것입니다. 상급은 주께로부터 옵니다. 주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앤서니 드 멜로라는 사람이 쓴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수도원에서 이루어진 스승과 제자의 대화입니다. 제자는 젊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늘 자신을 비교하고 경쟁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스승은 그러지 말라고 여러 차례 권면했는 데도 제자는 그 일을 계속합니다. 어느날 제자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경쟁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경쟁은 우리 안에 있는 선한 잠재력을 개발시키지 않습니까?” 스승이 말했습니다. “아니네. 경쟁은 우리를 승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시키네. 왜냐하면 경쟁은 우리안에서 상대방에 대한 미움을 조장하기 때문이지”. 제자가 물었습니다. “하지만 경쟁을 포기하면 변화와 진보도 포기하는 것 아닙니까?”. 스승이 말했습니다. “그렇네. 진보와 변화는 다 필요하네. 그러나 이 세상에 정말 필요한 진보는 사랑의 진보라네. 오직 사랑의 진보만 참된 진보야. 자네의 평생 경쟁자는 자네 자신일세. 그리고 자네가 이루야 할 진정한 진보는 자네안에 있는 사랑이 진보하는 것이야”. 같이 합시다. “진정한 진보는 사랑의 진보다”. 사랑이 자라는 것이 최고의 진보입니다. 이것이 성장을 극대화하는 자본주의 경제의 병폐입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든 나만 잘되는 것, 다른 사람과 경쟁에서 무조건 이기는 것, 그것이 어쩌면 이번 세월호 사건의 원인인지 모릅니다. 내 안에서 사랑이 자라는 것이 최고의 진보입니다. 그래서 데이비드 사노프란 사람이 말했습니다. “경쟁은 제품에게는 최상의 결과를 가져오지만 인간에게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온다”. 그렇습니다. 왜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도 행복하지 않습니까? 경쟁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세월호 때문에 어렵다 해도 세계 10워권입니다. 대부분의 나라가 우리 보다 못 삽니다. 그래도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것은 더 잘나가던 나의 과거와 비교하고 나보다 더 잘 사는 옆집과 비교하고, 우리 회사보다 매출을 더 많이 올리는 다른 회사와 경쟁하기입니다.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상은 하나님께 받습니다. 그 분에게 정직하고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남들 잘된다고 내가 못되는 것이 아니며 옆집이 못산다고 내가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기업의 상을 주께로부터 받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귀한 일을 마음을 다하여, 사람을 그리스도처럼 대하고, 오직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는 자세로 열심히 일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에 이 말씀은 꼭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반드시 보상이 있습니다.
24절을 다시 보면, 골3:24,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두 가지가 분명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면 반드시 상받습니다. 그 이유가 중요합니다.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주님이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일의 주인은 주님입니다. 우리 비즈니스의 주인은 주님입니다. 웬만 한 회사의 주인도 열심히 일하는 직원에서 상을 줍니다. 그런데 주님은 공정하고 은혜로우신 주인입니다. 반드시 열심히 일하면 상줍니다.
어떤 상을 줄까요? 무엇보다 물질의 상을 줍니다. 잠언 6:6의 말씀을 아시지요?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왜 개미에게 배워야 합니까? 잠언30:25에 해답이 나옵니다.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하는 개미와”. 개미는 비록 힘이 없지만 부지런합니다. 여름에 미리 겨울을 준비합니다. 어려운 시대에도 사업이 잘되는 분이 있습니다. 우선 부지런하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일해서 얻는 보상은 물질만이 아닙니다. 일은 우리에게 물질을 주지만 우리는 물질 때문에만 일하지 않습니다. 일은 일 자체로 의미가 있으며 일을 통해 우리가 얻는 것은 빵만이 아닙니다. 마틴 루터가 말한대로 하나님은 소젖 짜는 여자아이의 일을 통해 친히 사람에게 우유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유치원에서 가르치는 선생님을 통해 어린 영혼에게 친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시청마당을 쓸고 있는 청소부를 통해 친히 세상을 아릅답게 가꾸십니다. 내가 하는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요 내가 하는 일을 통해 나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합니다. 음식점 하신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의 솜씨를 통하여 하나님이 배고픈 자를 먹이십니다. 학교에서 가르치시는 선생님, 교수님들 계십니까? 여러분은 생계를 위하여 여러분의 지식을 파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르칠 때 하나님이 가르칩니다. 의사들 계십니까? 여러분이 치료할 때 하나님이 치료하십니다. 우리의 일을 다만 물질적 목적에만 둘 때 우리가 피곤할 수 있고 그만 둘 수도 있고 심지어 타락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시려는 본래의 목적의 수단입니다. 나는 그의 통로입니다. 아멘.
지난 여름, 뉴욕을 방문했을 때 리디머 교회라는 곳을 들렀습니다. 이 교회는 일과 신앙을 조화시키는 가르침으로 직업인에게 큰 도전과 은혜를 주는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에 처음 나온 어떤 분의 간증을 그 교회의 잡지에서 읽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맨해튼의 한 회사에서 일하는 아가씨는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파면을 당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는 데 상사가 알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상사는 그 실수를 다 자기의 책임으로 돌렸습니다. 그 탓에 자신의 경력에도 흠집이 났고 승진할 기회도 적어졌고 회사안에서 운신의 폭도 좁아졌습니다.
상사의 처신을 본 아가씨는 너무 놀랐습니다. 고마운 마음을 전하려고 아가씨는 상사에게 작은 선물을 드리며 물었습니다. “너무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겪어서.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죠?” 그때 그 상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뭐, 흔히 있는 일이죠. 큰 일도 아닌데요. 뭘. 꼭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면 한 가지 있긴 있죠”. 아가씨가 물었습니다. “뭔데요?” “예, 제가 교회나가거든요. 그리고 제가 믿는 신앙으로 볼 때 예수님이 남을 위해 대신 죽었지 않습니까? 저도 그것을 작게 실천한 것 뿐이예요”. 평소 교회 나가지 않던 아가씨는 상사가 교회 나간다는 말을 듣고 어느 교회 나가는 지 알아 보았습니다. 그 교회가 리디머 교회였습니다. 그 다음 주 아가씨는 리디머 교회에 등록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내가 다니는 직장의 상사나 동료나 부하 직원이 나 때문에 교회 오는 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가 교회 다닌다는 그것 때문에 나도 당신이 다니는 교회 나가겠다고 말하는 직원이 있다면 그 는 직장인으로서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성공한 사람이 아닐까요? 다른 사람과 치열하게 경쟁하고 때론 다른 사람을 죽여야 하는 세상에 남을 위해 내가 손해보고 남의 실수를 내 실수로 여기는 직장인이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최고의 전도가 아닐까요? 믿음으로 최선을 다해 일하면 이런 상을 받습니다. 잠22:29 말씀입니다. “네가 자기 사업이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근실하게 일하는 사람은 왕앞에 섭니다. 상을 받습니다.
일속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여러분, 제가 마지막에게 여러분에게 이런 희망을 드리고 싶습니다. 지난 주 “월간 현대경영”이라는 잡지에 실린 내용입니다. 우리 나라 최고의 경제 전문가 5분을 초청하여 물었습니다. “세월호 이후 경기가 언제쯤 회복되겠습니까?” 5중의 한 분만 2015년 상반기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4분은 모두 2014년 하반기라고 답변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번 가을에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일 때문에 힘들어 하는 교인들을 생각하고 눈이 번뜩 했습니다. 이 나라 최고 경제전문가 5명중 4명이 그렇다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회복됩니다. 영원히 계속된 불황이 있습니까? 무엇보다 하나님이 그렇게 두겠습니까? 하나님이 경제를 회복시킬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고 믿음으로 일하면 반드시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인이십니다. 그 분이 상주십니다. 반드시 주십니다. 불황이라고 염려하지 맙시다. 주인이 상주십니다. 주여, 이 나라를 살펴 주시옵소서. 세월호 사건으로 침체에 빠진 이 민족을 살려 주옵소서. 회복시켜 주옵소서. 주님의 도움을 믿고 최선을 다해 일하는 성도들에게 상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