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와 자유인의 안전 – 이태원 참사를 보고
세월호 침몰에 이어 이태원 참사로 안타깝게도 또 많은 젊은 생명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우리 사회는 왜 이렇게 위험한가요? 한창 피어날 나이에 어처구니없이 삶을 놓쳐버린 영혼들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미국에서는 아이들이 사탕을 얻는 핼러윈 놀이가 우리나라에 와서 어른들의 귀신놀이가 되었습니다. 국적도 없는 추태라고 나무랄 수도 있겠으나 함께 어울린 외국인들도 적지 않았다고 하니 또 하나의 한류 문화가 생기는 중이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올해에는 몰려든 인파로 백수십 명이 압사당하는 끔찍한 참사로 끝났습니다.
유가족협의회가 결성되고 현장을 통제하지 못한 정부 책임을 묻는 문책의 목소리가 큽니다. 대통령의 진정 어린 사과와 주무 장관의 사퇴를 요구합니다. 거대 야당의 국회는 국정조사를 요구하면서 행정안전부 장관의 해임 건의를 의결하였고, 만약 대통령이 거부하면 탄핵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습니다. 이에 맞선 여당은 국정조사를 하기로 했으면 그 결과나 보고 책임을 추궁하든가 해야지 느닷없이 해임 건의부터 의결하고 나섰다고 야당을 맹비난합니다. 기가 막힐 유가족들의 상처를 공감하면서도 필경 진흙탕 정치싸움으로 전락하고 마는 상황 전개에 화가 납니다.
참사의 잘잘못을 놓고 공방이 치열합니다. 모든 인재(人災)가 그렇듯이 그 본질은 결국 안전불감증입니다. 경찰은 수많은 인파가 몰릴 것을 예상했음에도 예년처럼 지나갈 것으로 보고 별다른 대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일부 압사 위험을 신고한 사람도 있었지만 같은 위험을 느끼면서도 제때에 현장을 빠져나오지 않은 시민도 문제입니다. 결국 경찰과 시민의 안전불감증이 사태를 만들고 키워 참사를 빚었습니다.
이제 한국은 국제사회가 공인한 선진국입니다. 그러나 이태원 참사의 공방은 우리의 부끄러운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수준 낮은 법치관은 물론이고 우리가 자유를 누릴 자격에서도 얼마나 미흡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국정조사를 거쳐야 해임을 건의할 수 있다는 규정이 없는 만큼 국회는 조사 없이 해임 건의를 의결해도 됩니다. 그러나 국정조사를 하기로 했다면 그 결과나 보고 해임이나 탄핵을 결정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정부와 여당은 이 점을 내세워 야당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 특검이 조사를 막 시작한 시점에서 그 수사 결과를 보지도 않고 탄핵을 추진했던 국회의원 상당수가 지금의 여당 인사들입니다.
자신들이 그때 했던 일을 잊었을 리 없는데 지금의 여당은 거대 야당이 일의 순서를 뒤집었다고 비난합니다. 조사를 하겠다면서도 해임 건의를 먼저 의결하는 무지막지한 태도에서 야당은 그때나 지금이나 일관성이라도 보이는데 여당은 한술 더 떠 이랬다저랬다 하는 꼴입니다. 정상적 법치라면 선처벌⦁후조사보다는 조사 결과를 보고 처벌을 결정하는 모양새를 갖추어야 옳습니다. 해임이나 탄핵을 의결할 근거가 이미 충분하다면 국정조사와 특검은 무엇 때문에 하나요?
법치의 충분조건이 합법성뿐이라면 순서를 뒤집어도 법치랄 수 있겠습니다. 사실 현재 여야를 막론하고 우리 국회의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법치관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각각 합법적 조치라도 이것을 앞뒤가 맞지 않는 순서로 엮는다면 옳은 법치가 아닙니다. 상식에 어긋나는데도 내게 유리하다고 일의 선후를 뒤바꾸고 개별 조치의 합법성만 내세우는 법치는 법꾸라지의 저급한 정치일 뿐입니다. 처벌받아 마땅한 사람까지도 잘못을 수긍하지 않을 빌미나 줍니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미성숙한 점을 감안하면 우리 정치인들은 여나 야나 모두 지금도 법치를 배우는 중이겠지요.
수많은 인파가 몰릴 것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는데 아무 대비 없이 방치한 경찰의 안전불감증은 반드시 응징하고 고쳐야 합니다. 그런데 혼잡을 예측하고 현장 대책을 지시할 임무를 책임져야 할 지위는 아무리 높게 잡아도 행안부 장관에까지 이를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장관에게 경찰의 안전불감증을 관리하지 못한 정치적 책임을 물을 수는 있겠으나 그 경우에도 일단 진상 조사와 사태 수습의 시간은 주어야 합니다.
이태원 참사는 세월호 사건과는 달리 자유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핼러윈 놀이 참여자들이 인파의 위험을 느꼈을 때 그에 맞추어 움직였어도 참사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피해자가 현장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던 세월호 사태와는 이 점에서 다릅니다. 최초의 압사 위험 신고가 접수된 오후 6시 넘어서부터 실제 참사가 발생한 10시 넘어까지 장장 4시간입니다. 이 긴 시간 동안 현장은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일촉즉발 아비규환의 연속이었겠지요. 압사 위험 신고가 줄을 이었음을 볼 때 현장에서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전불감증에 사로잡힌 사람은 빠져나갈 기회가 있어도 빠져나가지 않습니다. 특히 매일매일 출퇴근 지옥철에서 특정 구간의 지옥을 견디는 데 이력이 난 우리 젊은이들은 그렇게 결정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그날 이태원 뒷골목의 아비규환은 지하철의 잠깐 혼잡이 아니었습니다. 아차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그대로 갇혀버리는 지옥이었기에 잠재적 압사 위험이 현실의 참사로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이 지옥은 누가 만들었나요? 4시간 동안이나 교통을 통제하지 못한 경찰의 책임이 큽니다. 동시에 같은 시간 동안 위험을 느끼면서도 빠져나오지 않은 시민의 안전불감증도 문제입니다. 안전불감증 때문에 적시에 빠져나오지 못한 피해자들은 계속 인파에 휩쓸려 다니면서 현장을 지옥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였습니다. 이 선택의 책임은 결국 안전불감증에 빠져 자신의 자유를 그렇게 행사한 개인의 몫입니다.
우리나라 관청은 수영 위험지역에 예외 없이 ‘수영 금지’라는 경고판을 내걸지만, 미국과 유럽의 경고판은 급류나 깊은 수심, 그리고 낮은 수온 등 위험 요인을 경고하는 데 그치고 ‘Swim at your own risk’라고 안내합니다. 수영할 자유를 금지하는 대신 위험 요인을 안내하는 선에서 그칠 만큼 개인의 자유를 존중합니다. 수영 위험지역에서 누가 수영하다 익사하기라도 하면 우리나라는 수영을 방치한 관청을 비난하지요. 그러나 서양에서는 사망자 개인의 책임으로 돌립니다.
국가는 시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지만 자유인의 안전은 상당 부분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안전불감증을 정부만 책임진다면 시민은 든든한 보험을 가진 셈이라 도덕적 해이에 빠져 안전을 소홀하게 다룹니다. 이번 참사에서 보았듯이 한국은 매우 위험한 나라입니다. 시민이 안전불감증에 대한 자기 몫의 책임을 거부하면 비슷한 참사가 또 일어날 것입니다. 정부는 자유를 더 통제하려 나서겠지요.
이태원 참사는 우리 사회가 법치와 자유에서 아직 더 많이 배워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이번에도 정쟁에만 휘말려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면 국민의 안전불감증은 여전하여 같은 일이 언제든 재발할 것이고 정부는 자유 통제의 명분만 늘려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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