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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국지 [列國誌] 574
■ 2부 장강의 영웅들 (230)
제9권 장강은 흐른다
제 30장 도망자 오자서(伍子胥) (6)
소관(昭關)을 무사히 통과한 오자서(伍子胥)는 그물에서 벗어난 잉어처럼 기쁨을 만끽했다.
공자 승(勝)을 등에 업고 성큼 성큼 큰 걸음을 옮겨놓았다.그렇게 한 시각쯤 걸었을 때였다.
문득 저편 앞에서 한 사람이 오고 있었다. 그런데 낯이 익었다. 자세히 보니 좌성(佐誠)이라는
사람이었다.좌성(佐誠)은 지난날 당읍(棠邑)에서 관리 노릇을 하던 사람이었다.
오사(伍奢) 부자가 죽음을 당하기 전 영성으로 옮겨갔는데, 아마도 그 후 원월(薳越)을 따라
이 곳 소관으로 옮겨온 모양이었다. 이를테면 그는 오자서의 옛 부하였다.
오자서(伍子胥)는 몸을 숨기려 했으나 너무 늦었다. 두 사람은 정면으로 마주쳤다.
좌성(佐誠)도 오자서를 알아보았다. 크게 놀란 빛으로 말을 걸어왔다.
"지금 초나라가 당신을 잡으려고 난리법석이 아닌데, 어떻게 소관(昭關)을 통과하셨습니까?"
오자서가 태연히 대답했다."왕은 내게 귀한 야광주(夜光珠)가 하나 있다는 걸 아시고
그걸 바치면 용서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나는 이미 그걸 다른 사람에게 줘버려서
지금 그것을 도로 받으러 가는 길이다.
원월(薳越) 장군에게 이런 사정을 얘기했더니 어서 찾아오라며 통과시켜주더군."
그러나 좌성(佐誠)이 그런 거짓말에 속을 리가 없었다."나를 어린애로 아십니까.
원월(薳越) 장군께서 그까짓 야광주를 찾아오라고 당신을 통과시킬 리 있겠습니까?
만일 그 말이 사실이라면 당신은 나와 함께 잠시 소관(昭關)으로 다시 갑시다.
제 귀로 원월 장군의 말씀을 들으면 그때 보내드리겠습니다."
거짓말이 통하지 않자 오자서(伍子胥)는 작전을 바꿨다. 은근히 협박했다.
"좋다. 너는 나를 데리고 소관으로 가라. 하지만 나는 이미 야광주를 너에게 주었다고 말하겠다.
그러면 너 또한 중벌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이래도 나를 소관으로 데려가겠느냐?"
"왕께서 명하시기를 당신을 놓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가족까지 몰살시키겠다고 했습니다.
만일 내가 당신을 데려가지 않으면 나는 물론이고 내 가족까지 죽임을 당합니다.
당신은 나를 살려주는 셈치고 나와 함께 가주십시오."기가 한풀 꺾인 것이 분명했다.
"지금 우리를 보고 있는 사람은 없다. 네가 혼자 소관(昭關)으로 돌아간들 나를 놓아주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어찌 너와 네 가족이 죽임을 당할 리 있겠느냐?
그러지 말고 네가 나를 보내주어라. 만일 일이 잘못되어 훗날 내가 잡히더라도
결코 너를 만났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그러면 너는 아무 탈이 없을 것 아니냐?"
오자서(伍子胥)는 이렇게 회유하는 한편 손으로는 은근히 허리춤에 찬 칼을 만지작거렸다.
여차하면 베어버리겠다는 뜻이었다.좌성(佐誠)은 눈치가 빠른 자였다.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과연 길 가는 사람이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대로 헤어지면 아무 일이 없는 것이다.더욱이 오자서(伍子胥)는 천하에 널리 알려진
용력의 소유자요 호걸이었다. 그와 맞서 싸운다 하더라도 자기만 죽을 것이 뻔했다.
"알겠습니다. 당신은 어서 길을 가십시오. 하지만 결코 나를 만났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나 또한 당신을 만난 적이 없는 것으로 하겠습니다."좌성(佐誠)은 한 옆으로 비켜섰다.
그 앞을 지나가며 오자서가 한마디했다."너는 나를 보내줌으로써 네 목숨을 구한 것이다."
좌성은 소관(昭關)으로 돌아가서도 오자서를 보았다는 말을 일절 하지 않았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기보다 그래야 자신의 목숨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자서(伍子胥)는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급히 걸었다.저(滁)라는 땅에 이르렀다.
저하(滁河)에 연해 있는 마을로써 커다란 모래톱을 이루고 있는 곳이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망망한 큰 강에 높은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런데 배가 한 척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오자서(伍子胥)는 마음이 다급했다. 좌성이란 자가 언제 마음이 변해 원월에게 보고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지금쯤 원월(薳越)이 추격군을 거느리고 쫓아오는 중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앞에는 큰 강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었다.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 바람에 쓸려서 강변의 우거진 갈대들이 흐느끼듯 처량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아, 하늘이시여. 나의 원수를 갚아주시려거든 배를 내어주시고, 그렇지 않으면
추격군을 보내주십시오.'오자서(伍子胥)는 도도하게 흘러가는 저하(滁河)의 물결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비통하게 절규하였다.그러나 모래톱과 갈대가 끝없이 펼쳐진 저하(滁河) 근처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지 않았다. 배도, 추격군도 보이지 않았다. 오자서의 간장만 타들어갈 뿐이었다.
그렇게 반나절을 기다렸을까.문득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여왔다.
너무나 희미하여 그것이 노래소리인지 바람소리인지 잘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오자서(伍子胥)는 귀를 기울이며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저멀리 하류에서
조그만 점 하나가 보였다. 그 점은 강물을 거슬러오며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고기잡이 배가 분명했다.
한 노인이 배를 저으며 한가로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아, 하늘이 나를 버리시지 않는구나.'
오자서(伍子胥)는 기뻐하며 급히 몸을 일으켜 노인을 향해 외쳤다.
"어부여, 나를 건네주시오."고기잡이 노인이 오자서의 외침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흘깃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오자서(伍子胥)는 더욱 다급하게 손짓했다.
"어서 이리로 와 나를 건네주시오!"그런데 웬일인가.
고기잡이 노인은 오자서(伍子胥)를 본 둥 만 둥 여전히 강물위에 떠 있는 것이 아닌가.
배를 돌릴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계속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제 노랫소리는 오자서의 귀에도 명확히 들려왔다.해와 달이 물 속에 잠기어 달리는구나.
내 언제 그대와갈대 언덕에서 만나려나.
오자서(伍子胥)는 발을 동동 구르다가 문득 그 노랫소리에 담긴 뜻이 예사롭지 않음을 직감했다.
공자 승(勝)을 품에 안고 강물을 따라 하류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갈대가 우거진 언덕에 당도했다.
그는 갈대밭 속으로 들어가 몸을 납작 엎드렸다.숨죽이고 한참을 다시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 황혼이 깃들며 주변이 어두워졌다. 그제야 고깃배는 천천히 갈대밭 언덕으로 다가왔다.
고기잡이 노인이 또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밀려오는데
그대 마음은 근심과 슬픔뿐이로구나.
달이 이미 솟아올랐는데
어째서 건너려 하지 않는 것인가.
오자서(伍子胥)는 공자 승(勝)을 품에 안고 갈대밭에서 나왔다.
월광 아래로 고기잡이 노인의 손짓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배에 올라탔다.
노인이 긴 삿대를 들어 강물을 찔렀다. 배가 가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인도, 오자서(伍子胥)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은색 달빛이 출렁이는 강물에 반사되어 눈을 쏘아댈 뿐이었다.
575편에 계속
열국지 [列國誌] 575
■ 2부 장강의 영웅들 (231)
제9권 장강은 흐른다
제 30장 도망자 오자서(伍子胥) (7)
오자서(伍子胥)를 실은 배는 한 시각도 못 되어 저하(滁河) 건너편 언덕에 닿았다.
오자서가 몸을 일으키며 감사의 말을 던지려는데 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젯밤 꿈에서 였지요. 큰 별 하나가 내 배에 떨어졌소. 그래서 나는 오늘 이상한 사람이
나에게 강을 건네달라고 청할 줄 짐작했소이다.아니나 다를까. 그대가 내 배를 탔소.
내가 그대의 용모를 보아하니 범상한 사람 같지는 않소이다. 속이지 말고 그대의 신분을
내게 말해주시오. 당신은 어떤 사람이오?"
오자서(伍子胥)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노인을 믿고 자신의 이름과 그간의 일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듣고 난 노인은 놀라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했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참으로 고생이 많았구려. 보아하니 며칠 굶은 것 같은데, 그 몸으로 어찌 먼 길을 가겠소.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시오. 내가 곧 밥을 가지고 오겠소."
노인은 버드나무 밑에 배를 매어두고 밥을 가지러 마을로 갔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밥을 가지러 간 노인이 돌아오질 않는 것이었다.
오자서(伍子胥)는 의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현상금으로 곡식 5만 석에 벼슬까지 걸려 있는 몸이 아닌가.
그를 신고만 하면 누구든지 벼락부자가 된다.
오자서(伍子胥)는 슬그머니 공자 승(勝)을 품에 안고 배에서 내려 갈대밭 우거진 곳으로 몸을 숨겼다.
그들이 갈대밭으로 들어간 지 얼마 안 있어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고기잡이 노인이었다. 손에는 밥과 생선국이 들려 있었다.
노인은 배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보이는 것은 어둠뿐.
오자서(伍子胥)와 공자 승(勝)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제야 노인은 오자서(伍子胥)가 자신을 의심하고 숨은 것을 알았다. 주위를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갈대밭 속에 숨은 사람아, 나는 나의 이익을 위해 밀고하는 사람이 아니오. 어서 나와 밥을 먹으시오."
그제야 오자서(伍子胥)는 몸을 일으켜 갈대밭에서 걸어나왔다. 노인이 타박하듯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나를 의심하고 몸을 피했소?"오자서는 얼굴을 붉히며 사실대로 대답했다.
"용서하십시오. 오랫동안 쫓기다보니 근심과 걱정이 쌓여 마음에 생기는 것은 의심뿐입니다.
노인장께서 오래도록 돌아오시지 않으니 어찌 암귀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잠시 몸을 숨겼습니다."
노인은 노인대로 자신이 늦은 이유를 설명했다."여기서는 인가가 멀리 떨어져 있소.
다녀오는 데만도 한 시각이 넘게 걸리지요. 아무튼 시장하실 터이니 어서 밥을 드시오."
오자서(伍子胥)와 공자 승(勝)은 노인이 가져다준 밥과 생선국을 배부르게 먹었다.
너무나 고맙고 감사했다. 오자서는 답례를 해주고 싶었으나 수중에 가진 돈이 없었다.
잠시 고만하다가 허리춤에 찬 칼을 풀어 고기잡이 노인에게 내밀었다.
"이 칼은 옛날에 초왕이 우리 조상에게 하사한 칼입니다. 나의 대까지 삼대를 전해온 가보(家寶)지요.
이 칼엔 보석으로 만든 별이 일곱 개가 박혀 있소. 값으로 치자면 백금이 넘을 것입니다.
노인장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어 이 칼로 대신할까 합니다. 받아주십시오."
그러나 고기잡이 노인은 손을 저으며 사양했다.
"내가 알기로 오자서(伍子胥)를 잡아바치는 자에겐 곡식 5만 석과 상대부 벼슬을 내린다고 하였소.
만일 내가 보답을 바랐다면 곡식 5만 석과 상대부 벼슬을 받지. 어찌 백금밖에 나가지 않는
그대의 칼을 받겠소.더욱이 나는 칼이 필요 없지만, 그대는 칼이 필요할 것이오.
군사들에게 붙잡히기 전에 어서 이 곳을 떠나기나 하시오."
"그렇다면 노인장의 존함이나 알려주십시오. 죽지 않으면 반드시 이 은공을 갚겠습니다."
노인이 조용히 대답했다."나는 그대의 원통한 사정을 돕고자 배에 태워 건네주었을 뿐이오.
다시 말하거니와, 보답을 바라고 그대를 도운 것은 아니니 그대는 염려말고 어서 길을 가시오."
"노인장의 마음은 알겠습니다만, 이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발 존함이라도 알려주십시오."
"그대는 죄인, 나는 죄인을 도와준 사람. 그러니 그대와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름을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소.더욱이 나는 배를 저어 흐르는 물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오.
비록 이름을 일러준다 한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겠소?"
"만일 하늘이 우리 두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해준다면 나는 그대를 '갈대 속 사람'이라고 부를 터이니,
그대는 나를 그냥 '고기잡이 노인'이라고 부르시오. 이 정도면 우리가 서로 기억하기 좋지 않겠소"
오자서(伍子胥)는 노인에게 네 번 절을 올리고 걸음을 옮겼다. 몇 발짝 가다가 문득 몸을 돌이키며
노인에게 부탁했다."만일 뒤쫓는 군사가 있으면 이 몸의 종적을 누설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러자 별안간 고기잡이 노인이 하늘을 우러르며 길게 탄식했다.
"나는 그대에게 인덕을 베풀었건만, 그대는 어찌 오히려 나를 못 믿는 것인가?
만일 뒤쫓는 군사가 있어 그대가 붙잡히면 그때는 공연히 나만 의심을 사겠구려. 좋소이다.
내 차라리 목숨을 버려 그대의 의심을 풀어드리겠소."
노인은 말을 마치자 배로 올라타 뱃줄을 풀었다.
삿대와 노를 버렸다. 배가 강물 한가운데로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노인은 배 한복판에 서서 좌우로 마구 흔들었다. 배는 급류에 휩쓸려 기우뚱거리다가
마침내 뒤집혔다. 강물 속에 빠진 노인은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본 오자서(伍子胥)는 땅을 치며 후회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아아, 고기잡이 노인은 나를 살려주었거늘 나는 오히려 노인을 죽였구나. 슬프도다. 슬프도다."
오늘날에도 안휘성 저현(滁縣) 땅에 가면 해검정(解劍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바로 그 정자가 당시 오자서가 고기잡이 노인에게 주려고 칼을 풀렀던 곳이라고 한다.
한 시인이 이때의 일을 노래한 것이 있다.
오랫동안 낚시질을 즐기던
한 무명 노인이
도망가는 초나라 신하를
편주(片舟)에 태워
건네주었도다.
훗날의 염려를 없애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렸으니
천고에 그 이름 '고기잡이 노인'으로
전하는도다.
576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