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금융의 탄생
토마스 K 맥크로 지음|이경식 옮김|휴먼앤북스|592쪽|2만9000원
2013년 3월 1일
현재 미국 국가 부채는 16조6100억달러. 국민 1인당 5만2000달러(약 5500만원)의 빚을 졌다. 우리나라의 다섯 배다. 다른 나라였으면
파산하고도 남을 막대한 규모지만, 미국 신용은 AAA 같은 최우량등급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독립전쟁(1775~1783) 비용을
대느라 마구잡이로 발행한 통화와 국채로 곤두박질쳤던 적도 있다. 위기를 타개하고 미국 금융의 탄탄한 기초를 설계한 건 두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1757~1804)과 앨버트 갤러틴(1761~ 1849)이었다. 둘의 정책은 정반대였다. 해밀턴이 신용을 회복하고 더 많은 빚을 져서
경제를 일으키자고 한 반면, 갤러틴은 재정 건전성을 위해 국가 부채를 줄여야 한다고 반박했다. 경제철학이 다른 두 장관이 어떻게 미국을 신용
붕괴로부터 구해내고 발전의 초석을 닦았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읽다 보면 어느새 '국익과 타협'이란 국가 경영의 중요한 미덕과
만난다.
◇해밀턴 "국가 부채는 지나치게 많지만 않으면 축복이다"
17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미국 경제는 전쟁 과정에서
쌓인 막대한 부채로 휘청거렸다. 독립 당시 미국은 제조업 공장이 단 한 곳도 없는 농업 국가였고 낮은 농업 생산력만으로는 이자도 갚기 힘들었다.
게다가 1781년까지 미국에는 단 하나의 은행도 없을 만큼 금융에 무지했다. 대농장주였던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은 심지어 빚을 지는 것을
부도덕과 연결해 생각했다. 어디에도 빚을 해결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
이때 등장한 사람이 해밀턴이었다. 해밀턴이 재무장관을 맡은 1789년
미국에는 최소 50개의 통화가 제각각의 가치를 가지고 유통됐다. 여기에 연방정부의 통화와 부실채권까지 더해졌다. 부채 이자율도 제각각이었다.
해밀턴은 신용 회복을 위해 기존 부채를 액면가대로 되사는 파격적인 안을 내놓았다. 아무도 미국 채권을 액면가로 사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정신 나간 소리 같았다. 그는 현금이 아닌 채권으로 기존 채권을 사는 묘수를 제안했다. 그것도 4%로 이윤이 박한 채권이었다. 그런데 채권
보유자들이 이 제안에 움직였다. 명목 이율만 높은 쓰레기 채권을 정리하고 이자가 박해도 정부가 신용을 보증하는 새 채권으로 갈아탄 것이다.
해밀턴은 이자 지급과 원금 상환을 보장한다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수입관세에서 일정액을 이자 지급용으로 비축하는 정책으로 채권 매입자를
안심시켰다.
그는 "국가 부채는 지나치게 많지만 않다면 국가에 축복이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신용의 토대를 다지기 위해 창업을
독려했고 회사가 망해도 주주에게 제한적인 책임만 지게 하는 유한회사를 장려했다.
◇갤러틴이 택한 제3의 길
해밀턴이 연방의 권한을
강화하자는 워싱턴의 재정 참모였다면, 갤러틴은 각 주의 독립성을 지지하는 느슨한 연방을 지향한 토머스 제퍼슨을 위해 일했다. 하원의원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모든 면에서 해밀턴과 대립했다. '미합중국의 재정에 관한 스케치'(1796)라는 의회 보고서에서 그는 국가 부채를 '불법이며
해악'이라고 규정했다. 1801년부터 1813년까지 재무장관으로 재직할 때도 기본적으로 이 노선을 지켰다. 국민 세 부담을 줄이고, 모자라는
세수는 공공용지 매각으로 보충했다. 이는 오늘날 공화당의 노선이다.
정치인 갤러틴은 해밀턴과 반대각을 세웠지만 후배
재무장관으로서는 해밀턴을 존경했다. 그는 해밀턴 재임 중 연방정부 수입이 4배 늘었고 해밀턴 시절 46대1이었던 부채와 세수 비율도 8.3대1로
줄어들었다는 것에 감사했다. 부채에 대해 "지나치게 많지만 않으면"이라는 해밀턴과 "정부 지출도 줄여 부채를 갚아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은
강조점만 다를 뿐, 실은 신용을 적절히 관리하자는 말의 다른 표현이란 점을 간파했다. 1810년엔 심지어 연방 대출프로그램을 고안해 창업자들에게
돈을 나눠주자고까지 했다.
그가 제퍼슨 대통령과 맞선 것은 오늘날 정파의 이익만 따지는 한국 정치 상황에도 곱씹어볼 부분이다. 제퍼슨
대통령이 취임 직후 전임 대통령 워싱턴과 해밀턴 장관이 저지른 실수를 찾아내라고 하자 갤러틴은 "해밀턴은 단 한 차례의 실수도 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그는 더 나아가 이전 정부의 신용 회복 노력 덕분에 국가 부채를 줄이려는 제퍼슨 정부의 목표 추진이 가능했다고 봤다. 연방정부 주도로
토목 공사를 일으키려다 주정부 단위의 개발을 주장하는 제퍼슨주의자들이 반발하자 "융통성이 없다"며 자신의 정치적 동지들을 비판했다. 해밀턴이
세운 미합중국은행이 폐쇄되는 것을 막기 위해 뛰었다.
◇이민자 재무장관의 힘
미국 10달러 지폐 인물인 해밀턴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 6명 중 유일한 이민자다. 카리브해의 작은 섬 세인트네비스의 덴마크 식민지 출신인 그는 9세에 고아가
됐고 15세 때 단신으로 미국에 입국했으며 독립전쟁 때는 워싱턴 휘하에서 부관으로 근무한 뒤 초대 대통령 밑에서 재무장관을
지냈다.
해밀턴은 인격자는 아니었다. 외도하다가 꽃뱀에게 걸려 곤욕을 치렀고, 분을 참지 못하고 결투에 나섰다 총에 맞아 피살됐다. 다만
그는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인물이었다. 세인트네비스섬에서 불우하게 지내던 시절, 그는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네드, 내 야망이 어떤
것인지는 내가 점원이나 뭐 그와 비슷한 비천한 처지를 경멸하는 것을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거야. 운명이 내게 이런 처지를 짐 지웠지만 나는
성격상 여기에 만족할 수 없어." 미국으로 건너간 그가 13개의 주정부로 나뉜 연방국가보다 강력한 연방정부로 묶인 나라를 원한 것도 개인의
명예를 국가 차원으로 확장했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성향은 "연방공화국의 관점에는 고귀하고 장엄한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은 국내에서의 평화와
번영, 국제적으로는 존경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은 주(州)에서는 왜소하고 경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 있다"고 한 데서도 알
수 있다.
갤러틴도 제네바 출신 이민자다. 두 사람뿐 아니라 건국 이후 50년간 6명의 재무장관 중 5명이 이민자였다. 워싱턴과 제퍼슨 등
초기 국가 지도자들은 농업만 아는 농장주들이었다. 저자는 그러나 이들이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재정에 밝은 이민자를 적극적으로 발탁하는 것으로
국가발전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김태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