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장의 사진! 어찌보면 극히 단조롭고 별반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존재의 진리가 작품이 되는 순간을 떠올려 본다면 사정은 사뭇 달라진다. 작품의 배경은 유서깊은 절집 해인사. 이 시간 해인사에서는 성철 큰스님의 다비식이 거행되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작가의 시선과 마음은 더이상 고승의 죽음과 사리에 있지 않고 출가자의 일상, 즉 지붕잇기에 머물러 있다. 한 장 한 장 마루를 이어 내려가는 장면에서 해탈은 참선이나 깨달음에 있다기보다 노작勞作에 있음을 암묵적으로 보여준다. 그 노작은 인위적이지 않으며 거의 무위에 가깝다. 이러한 무심과 무심한 노작이야말로 해인삼매에 드는 길이 아닐까. 그것은 또한 하강의 상승, 현실이라는 초월의 국면에 있다. 사진 속 출가자-수행자는 화면 전체의 구성으로 보아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나 대자연을 압도하고 있다. 이는 곧대지(가) 작품 속으로 솟아오르는(하이데거,「예술작품의 근원」) 순간이다.
한편, 렘브란트가 약관의 나이에 그린〈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로〉(1627)를 보게 되면, 빛과 어둠의 대비와 극적인 분위기가 잘 드러나 있다. 이 그림에서사도 바울로는 책을 무릎에 펼쳐 놓고 사색에 잠겨 있다. 좌측에 창이 있고 인물의 뒤쪽으로는 기둥과 벽이 보인다. 기둥 우측으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의 공간이 있다.이는 어둠의 심연이자 또다른 빛의 공간으로서 모호한 신비감을 환기한다. 렘브란트가 즐겨 사용했던 가장 암시적인 기법으로서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명암법)는 불확실한 것, 규정하기 힘든 것, 무한한 것을 드러내기에 적합하며, 이는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이와 같은 예술적 표현과 체험은보다 많은 생mehr Leben, 아니생 이상의 것mehr als Leben을 나타낸다. 깊이와 너머의차이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완전히 어둠에 싸여 있다. 이는 미세한 부분들이 진동하는 리듬이다(게오르그 짐멜,『렘브란트-예술철학적 시론』). 넓적한 돌 위에 올려져 있는 바울로의 맨발은 또 어떤가? 구약성경에서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신발을 벗듯이, 바울로는 자신만의 고유한 내면의 음성을 듣는다. 어둡고 깊고 돌처럼 견고한 목소리가 바로 그것이다. 렘브란트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의 빛에 대비되는 동아시아 문명의 사유이미지로서현玄이 있다. 우석영의『낱말의 우주』에서 보면, 현은 단순히 검다는 뜻이 아니라 그윽한 것, 먼 것, 고요한 것, 신묘한 것을 말한다. 딴은, 도와 마음, 갓난아이처럼 부드럽고 연약하지만 미처 그 깊이를 다 헤아릴 수 없는 존재로 규정된다. 현대시의 정신과 방법이 가시적이고 언어 지향적인 면이 앞서 있음에 비해, 사물과 마음-언어의 접점으로서, 새로운 전통과 정신 내지는 방법론으로서 현은 현묘하고 또 현묘하여 온갖 묘리가 들고나는 문이다.(玄之又玄 衆妙之門: 노자,『도덕경』1장). 동양에서 깊은 것들은 모두 어둡다. 현은 땅의 색이기도 하면서 사유의 깊은 지경이다. 아름다움에는 우울과 신비가 섞여 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어둡다. 현의 시를 알고 느끼는 것만큼 매혹적이고 우리를 홀황의 경지로 내모는 게 있을까. 막스 피카르트의 말처럼, 인간은 이 한 편의 완전한 시를 들은 다음 우수憂愁를 느낀다. 그것은 심연으로부터 함께 울리며 솟구쳐오른 전체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 현의 시학과 관련한 다형 김현승의 시를 일부 분석 감상해 보기로 한다. 먼저「검은 빛」이다.
노래하지 않고,
노래할 것을 더 생각하는 빛.
눈을 뜨지 않고
눈을 고요히 감고 있는 빛.
꽃들의 이름을 일일이 묻지 않고
꽃마다 품안에 받아들이는 빛.
사랑하기보다 사랑을 간직하며, 허물을 묻지 않고
허물을 가리워 주는 빛.
모든 빛과 빛들이 반짝이다 지치면,
숨기어 편히 쉬게 하는 빛.
그러나 붉음보다도 더 붉고
아픔보다도 더 아픈,
빛을 넘어 빛에 닿은 단 하나의 빛.
-「검은 빛」전문
어둠과 빛의 사이-존재를 이해하는 것이 이 시의 관건이라면, 시는심연을 응시하는 결정적인 시선이다. 검은 빛과 색의 특징은 몰입에 있다. 그것은 감정을 단순히노래하지 않고,/ 노래할 것을 더 생각하는 빛이다. 그런 노래로서, 사유의 빛과 소리야말로 현존재에 다름아니다. 노래를 통해 존재는 개방되고, 이미 곁에 다가서 있다. 존재의 빛은 눈을 뜨고 있는 게 아니라,고요히 감고 있는 모습이다. 두 눈을 감은 채 침묵을 유지하며 그 빛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현의 사유이미지는 더욱 잘 드러난다. 존재의 향기와 음성을 듣고 청종하는 이가 시인이라면, 그는꽃들의 이름을 일일이 묻지 않고어둠의 빛을 순전히 내부로 받아들이며 꽃의 소리를 듣기에 부심한다. 여기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간직하고 보존한다는 뜻으로, 작품을하나의 작품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시인은 인간과 우주의 비밀인사랑을 (온전히) 간직하는 자로서 더는 허물을 묻거나 말하지 않고,허물을 가리워 주는 빛의 그늘을 자처하고 나선다. 검은 빛은모든 빛에 지쳐 스러져 분산되면서도 모든 것을 통일한다.(모든 빛깔에 지친/ 너의 검은빛-통일의 빛, 김현승.「재」). 환한 어둠으로서 현은붉음보다도 더 붉고/ 아픔보다도 더 아픈고통의 실재이며,빛을 넘어 빛에 닿은 단 하나의 빛이다. 그 어둠의 빛은 생의 환희와 살아있음의 홀황이다. 더 생각하고 더 고요하며,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마침내 쉼을 얻는, 〈아름답고 깊고 먼 것〉으로서 현의 사유 이미지는존재의 배후에 깊은 표현 정지의 무無를 보는 일, 형상을 깊이 포착하는 일이다. 검은 빛의 눈과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다른 한 편은「산까마귀 울음소리」라는 제하의 시다.
아무리 아름답게 지저귀어도
아무리 구슬프게 울어 예어도
아침에서 저녁까지
모든 소리는 소리로만 끝나는데,
겨울 까마귀 찬 하늘에
너만은 말하며 울고 간다!
목에서 맺다
살에서 터지다
뼈에서 우려낸 말,
중에서도 재가 남은 말소리로
울고 간다.
저녁 하늘이 다 타버려도
내 사랑 하나 남김없이
너에게 고하지 못한
내 뼈속의 언어로 너는 울고 간다.
-「산까마귀 울음소리」전문
이 시는 존재의 언어와 말함[die Sage]의 세계를 소리 심상을 통해 잘 드러내고 있다. 여기, 문명의 세계와는 달리 여전히 길들여지지 않은 새가 있다. 온몸이 검은 색으로 둘러쳐진, 아니 검은 색 그 자체인 까마귀와 까마귀의 울음소리. 그것은 겨울 하늘, 하나의 사물이 빚어내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존재의 언어에서 발현되는 깊은 울림이다.목에서 맺다/ 살에서 터지다/ 뼈에서 우려낸 말이거나,저녁 하늘(마저) 다 타버리고 난 뒤 마지막 남은 재의 말이다. 재는 무無이자 모든 것이며 너머의 언어다. 울음이 울림으로 화하는 순간, 현의 세계와 언어는 내성의 언어로서 점액질의 소리, 나아가가장 나종의 언어에 닿아 있다. 언어가 당도하는 유일의 집, 또는 장소가 산까마귀 울음소리라면, 까마귀는까마귀의 까옥거림 이상의 것이다. 석양 속에서 울리는 (산까마귀의 울음소리는) 빛보다 더 환하다. 그런가하면, 다형의 시에는 유독 까마귀가 많이 출현한다. 그것은 무채색에다 거친 목소리의 새로, 사이 존재로 현의 이미지와 정신세계를 표방한다.모든 소리는 소리로 끝나지만 겨울 하늘의 까마귀만은말하며 울고간다. 이러한말함의 존재와 내면의 깊은 울림은 절대자에게 고하듯 제의의 형식을 지닌다. 여기서 산까마귀 울음소리는 더이상고하지 못한/ 뼈속의 언어라는 사실. 고하지 못한 뼈의 말은 마침내 광물질의 언어, 즉 보석이 된다. 이런 경계와 차이를 생성하고 가로지르는 언어가 곧 현의 시와 세계인 것이다.
사물의 본성은 단선적으로 파악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특히 시의 세계와 의미란 것은 더욱 애매하고 모호한 것이어서 경계와 차이-사이 공간을 통해 새로운 상상과 에너지를 이끌어내게 된다. 감각과 사유, 언어가 상즉상입하는 시의 영역은 특유의 분위기와 정서를 환기한다. 서정시의 본래면목과 근원, 시간과 장소와 사물의 중류中流, 그리고 향인(香印, 향을 피워놓으면 재의 흔적과 방에 가득한 향기로 시간의 경과를 알 수 있는 것)의 이미지는 현의 시학적 특성에 속한다. 현은생명을 고양시키고 존재 자체를 변형시키기 위한 그늘과 같은 에너지의 장으로서내재성Immanence과도 맥을 같이 한다. 내재성의 경우, 그 어디에도 내재하지 않는 사유의 환경이거나, 사유되지 않은 지점을 말한다. 현은 현은顯隱의 사이에 대한 발견이며, 두 개의 사물을 잇고 나누는 문지방 같은 것이다. 현의 시학에 있어 시간-순간은 영원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사라지는 방식으로 드러나고, 존재의 빛을 환히 드러내면서도 어둠 속에 은폐되어 있는 그것은,어두운 흰색과 빛, 고요한 흐름의 이미지를 나타낸다. 현의 시를 통해 우리는 일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모험이 가능하며, 무엇보다 살아있음의 현재를 경험하게 된다. 우리에겐 그런 무(명)의 감수성과 예지가 필요하다. 끊임없이 변전하는 현실 속에서 무명無明과 고독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직관하고너머-여기의 미학적 진리를 파악하며, 기원紀元으로서 시를 향유하고 음미하는 것은 현의 시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다. 문제는 존재와 언어를 새롭게 경험하고 다시혼돈을 시작하는 것이다. 릴케의 시구(나무, 스스로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 한가운데 언제나 있는 나무/ 하늘의 둥근 천정/ 전체를 음미하는 나무,『佛語詩篇』)에서처럼, 현의 시는 무엇보다 전체를 음미하고 사유하는데 무엇보다 그 본령이 있다. 끝으로, 하이데거가 숙고한 현존재의 존재가 드러나는 영역, 즉 현[現, Da]의 사건과 관련해선 고를 달리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 [끝]
차시예고
4회(05.01.) 김상환 (문학박사/시인) 모든 것은 느낀다 5회(05.08.) 이태호 (철학박사/통청인문학아카데미 원장) 현의 존재론(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