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진본능
손현숙
몸의 골격이 환하게 드러나는 옷은 몹시 위태롭다는 것을 나이가 아주 많이 들어서야 알았다 나를 염려하던 그녀는 내게 농담처럼, 너무 투명하면 너도 깨지고 남도 깨뜨리는 법이란다
물속에서 백 미터를 건너는 일은 그리 힘들지 않은 일이다 숨을 참고 결승점에 닿으면 키작은 나도 바닥을 짚고 일어설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때, 문득 해가 지고 사방 길이 열리면 너와 나를 구별하기란, 별을 보고 길을 찾던 시절의 낭만 같은 것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선 길 끝에서 네가 울고 있었다 과녁을 향해 팽팽하게 쏜 화살이 왜, 네 심장에 가서 꽂혔는지 나도 모르는 일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오월의 보라향기 같은 너를 잃어버리고 대신 받아 쥔 지도 속에는 또 다른 과녁이 피처럼 선연하다
길도 없고 별도 없는 그곳에 도착하려면 정직한 패로는 갈 수 없겠다 우회도로를 두리번거리다 말고 나는 지금 누구를 깨뜨려서 나를 깨뜨리는 중일까,
본문보다 긴 각주
침대에 모로 누워 수면내시경 한다
주사 바늘 꽂고 하나, 둘, 다음은 기억이 없다
셋은 허방에 든 완전 숫자
부전승으로 승리한 오픈 게임 같다
두 팔을 쭉 뻗어 가위 바위 보를 할 때도
삼 세 판을 넘어서기 어렵다
‘세 밤만 자면 엄마가 데리러 올게’
손톱이 뾰족한 이모 집에 맡겨졌던 날
약속은 새빨간 거짓말로 발이 저렸다
‘가을이 와서 아프다’로 써내려간
문간방 언니의 유서를 본 적 있다
과꽃의 둘레만큼이나 글씨는 흐려서
검지의 세 째 마디가 깊고 음하다
찬밥에 물 말아 삼켰을 밥알의 곤두박질은
산자의 생을 송두리째 흔든다
섰다판의 파투처럼 어지럽게
단잠을 잔 것인지, 죽음의 손아귀에 붙들렸던 것인지
간호사는 내 어깨를 노크처럼 두드린다
돌아오는 길을 놓친 나는 하나, 둘,
셋은 찾지 못해 헛발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