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 역사관 영어영문학과 20070203 조만수
성경적 기독교를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있어서 역사관(Outlook on history)이 가지는 비중은 매우 크다. 그것은 성경적 기독교 진리가 참으로 절대적인 진리체계라고 한다면 역사에 관한 문제가 제외될 수 없기 때문이다.역사를 올바르게 해석하고 이해하려면 그에 앞서 먼저 인간과 신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전제 되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역사란 인간 사회의 변천 및 발전의 과정, 또는 그것을 기록한 학문이기 때문에 반드시 인간에 대한 선지식이 필요한 것이며, 인간과 역사에 대한 지식에 앞서 모든 지식의 근본이 되는 신지식은 당연히 전제되어야 할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관을 논하기 앞서 기독교 신관 및 인생관을 이미 논한 바 있다.
기독교 역사관을 논하는데 있어서 전제가 되는 선지식에 관한 것은 생략하기로 하고 기본적인 원리문제들에 관해서만 언급하기로 한다.
1, 기독교 역사관의 원리
시 33:10 ~ 16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곧 그 거하신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을 하감하시도다.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로다.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성경적인 기독교의 역사관은 일반적인 역사관과는 다른 독특한 원리(Principle)를 가지고 있다.
역사관의 원리가 다르면 역사에 대한 해석이 전혀 다르게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잘못된 역사관의 원리에 의하여 역사를 잘못 해석하게 된다면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에 있어서 많은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반면에 올바른 역사관의 원리에 의하여 역사를 올바르게 해석하게 된다면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에 있어서 갈등이 없는 것은 물론, 목적이 분명해지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올바른 역사관의 정립은 올바른 역사원리에 의하여 역사 해석이 올바르게 이루어질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역사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 원리에 대하여 알아 보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업이다.
기독교 역사관의 원리는 역사의 근본에 대한 원리와 역사 진행과정에 있어서의 방법에 대한 원리와 역사의 종국에 있어서의 결과에 대한 원리 등으로 대략 구분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원리 등은 모두가 기독교적 역사해석의 기본원리가 되며 기독교 역사관 이해에 중요한 역활을 한다.
1) 유신론적 역사이다. (근본적 원리)
사 45:5 ~ 7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이가 없느니라.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기독교 역사관이나 일반 역사관에 있어서, 역사를 주관하는 근원적인 실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가 역사관의 근본적원리로 나타난다.
역사는 과연 누군가가 주관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치 않으면 우연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같은 질문에 대한 일반적인 철학에서의 대답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철학적인 역사관은 근본적 원리가 여러가지로 주장 되어짐에 따라서 역사관 역시 다양한 이론에 의한 주장들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첫째는 계몽주의 역사관을 들 수 있다.
계몽주의자들은 역사의 방향과 진행을 주관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라고 보았다.
즉 인간의 이성의 힘은 역사의 방향과 진행을 마음대로 주관하며 조정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의 역사관은 18세기 프랑스 혁명당시 계몽운동(Enlightenment)의 중심 사상인데 이같은 계몽주의 사상이 현대인들의 생각속에 다분히 침투되어 있다.
인간 자신의 이성적인 힘으로 건전한 사회, 국가, 또는 세계가 건설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의 사상은 바로 계몽운동 중심 사상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계몽주의자들의 말대로라면, 역사는 인간이성의 산물이라는 뜻인데 이와 같은 역사관은 기독교의 유신론적 역사관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둘째로는 헤겔(Hegel)의 역사관이 있는데 헤겔은 독일의 관념론 철학의 대표자로서 그는 역사의 방향과 진행을 주관하는 것이 인간의 자유라고 하였다.
인간은 모름지기 자유를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유를 얻기 위하여 노력하는 결과에 따라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헤겔은 정신의 변증법적 운동인 정, 반, 합의 원리에 의해 역사철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역사속에서 계속 이어지는 사건들은 서로가 아무런 관계없이 일어나는 단순한 사건들이 아니고 이 모든 사건들을 전체적으로 종합해서 보면 반드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의미를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는 범신론(Pantheism)적 경향으로 흐르는 신관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
따라서 헤겔의 신은 그 자신의 사상체계에 맞도록 억지로 고안된 신으로서, 역사진행 과정에 따라 계속 일어나는 사건들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어떤 힘을 말하는 것이다.
헤겔의 말대로라면 그의 역사관은 범신론적이라는 뜻인데 이와 같은 역사관은 기독교의 유신론적 역사관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헤겔의 범신론은 인본주의적 산물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유가 만들어낸 역사의 의미를 신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헤겔의 신은 기독교의 하나님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따라서 헤겔의 역사관도 기독교의 역사관과도 아주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헤겔은 역사관의 근본적인 원리를 인간의 자유라고 하였으나 알고보면 인간의 자유는 기독교 역사관의 근본 원리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섭리하시는 과정에서 사용하시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셋째로는 랑케(Ranke)의 역사관이다.
랑케는 19세기 독일의 역사가로서 실증과 경험을 역사의 근본 원리라고 주장한 사람이다.
랑케에 의하면 인간들이 실제적으로 실증과 경험을 해보기 위하여 노력한 결과로 이루어진 사건들을 곧 역사로 본 것이다.
즉 인간에게는 실증이나 경험을 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어서 이같은 본능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실제적으로 실증과 경험을 시도하게 되고 그 결과로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이론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아름다운 사상체계가 있는데 그것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아름다움을 경험하기 위해 행동하는 결과에 따라 역사의 방향과 진행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랑케의 역사관 역시 철저히 인본주의적인 것으로서 기독교 유신론적 역사관과는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칼 마르크스 역사관이다.
칼 마르크스는 인류의 역사를 물질적 생활, 곧 경제 관계의 방면에서 보고 정신적 활동도 물리적 생활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하여 경제적 관계에서 일어나는 계급 투쟁이 인류 역사의 근본이 된다고 하는 유물사관(Historical Materialism)의 주장자이다.
헤겔에 있어서는 역사의 근원적인 원리가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 뒤에 있는 관념(idea)적인 하나님이라고 말한 반면, 칼 마르크스는 기독교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물론, 헤겔의 관념적인 하나님마저도 제거해 버리고 역사의 근본적인 원리를 물질 자체로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칼 마르크스의 역사관 역시 기독교의 유신론적 역사관과는 거리가 먼 것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계몽주의자들이나 헤겔이나 랑케 또는 칼 마르크스 등의 역사관은 철저히 인본주의적이거나 유물론적인데 반하여 성경적인 기독교 역사관은 유신론적이며 신본주의적이라는 점에서 그 근본적인 원리를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나 물질은 근본적 원인으로서의 역사의 주체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역사의 주체는 근본적 원인이 되시는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다만 하나님께서 역사를 섭리하시는데 있어서 인간의 이성은 제 일차적 도구이며 물질은 제 이차적 도구일 뿐이다.
즉 역사의 근본 원인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인 능력에 의하여 작정하신 바 뜻대로 역사를 진행시키는데 있어서 인간의 이성이나 물질을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말이다.
따라서 성경적인 기독교 역사관은 주권자 하나님께서 근본적 원인이 되시는 유신론적 역사관이다.
2) 직선적 역사이다. (방법적 원리)
전 3:1 ~ 1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멜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때가 있느니라.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기독교 역사가 직선적 역사라는 말은 역사의 방법론적인 원리를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를 섭리하시는 과정에 있어서 어떠한 방법으로 역사진행을 이끌어 가시는지를 알아 보려는 것이 방법론적 원리인데 그 역사진행의 방법론적 원리가 직선적이라는 말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나 출생하는 인간들이 모두가 다양하고 산발적이며 복잡한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사건들은 하나의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시작과 함께 끝을 향해 일관성있게 진행되어져 간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만사를 시작과 동시에 끝날 때를 정해 놓으시고 역사의 끝을 향해 직선적으로 진행시켜 가시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관은 하나님의 창조로 역사가 시작이 되어 역사 진행 과정에서의 의미를 가지고 이미 정해 놓으신 심판의 날을 향해 곧바로 진행해 가는 목적론적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섭리 방법은 그의 주권적인 속성과 잘 어울린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주권적인 능력에 의하여 창세전에 피조세계의 전역사를 시작에서부터 과정은 물론 종말까지 완전하게 분명한 의미와 목적을 담아 계획(작정)하셨다.
이와 같이 전능자 하나님의 역사적인 계획은 반드시 한치의 착오없이 창조를 통하여 시작하시고 진행시키셔서 정하신 끝날에 심판을 통하여 역사의 끝을 맺음으로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계획을 계시하신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역사는 하나님께서 특별계시역사로 보여주신 것이다.
구약역사는 주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로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셔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출발시키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 초기에 아브라함에게 장래 후손들을 통하여 큰 민족국가를 이루어 주실 것을 언약해 주셨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를 섭리하시는 목적이었다.
이스라엘 역사의 출발과 함께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가지고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바대로 한치의 어김없이 역사를 곧바로 진행시켜 하나하나 이루어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것들은 첫째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자손에 대한 언약이었고, 둘째는 땅을 차지하게 해 주시겠다는 언약이었으며, 셋째는 큰 민족을 이루어 다스리게 해 주시겠다는 언약이었다.
즉 국민과 국토와 국권을 주셔서 이스라엘 민족국가를 이루어 주시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상의 세가지 중요한 언약들을 모두 다 성취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첫번째 언약대로 아브라함 후손들로 하여금 애굽에서와 광야에서 장정만 육십만이 넘도록 자손이 번성하게 해 주셨고,
두번째 언약대로 번성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여호수아로 하여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땅을 정복하게 해 주셨으며,
세번째 언약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사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유다지파인 다윗왕가를 세워 큰 민족국가를 이루어 살게 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역사는 역사 초기부터 하나님께서 목적과 방법을 작정하시고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셔서 언약대로 이루시기 위해 역사를 작선적으로 진행시킨 목적론적 역사이다.
구약의 역사적인 계시는 타락한 인간에게 특별히 주신 계시인데 일반적인 계시인 세계역사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역사의 원리나 의미 또는 목적 등을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인간이 타락으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어 버려서 영이 죽은 인간의 이성적 기능으로는 도저히 일반계시역사를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특별계시역사를 통하여 중생한 자들로 하여금 역사의 원리와 의미 또는 목적 등을 깨닫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섭리하신 것이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역사진행 과정중에 후회하시거나 뜻을 돌이키셨다는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이와 같은 내용이 얼핏 보기에는 직선적 역사관과 위배되는 내용으로 보이지만 좀 더 깊이 상고해 보면 하나님께서 후회하시거나 뜻을 돌이키시는 것 자체가 궁극적인 하나님의 계획과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 역사관의 방법론적 원리는 작정하신 계획대로 목적을 향한 진행 과정에서의 의미를 가지고 직선적으로 섭리해 가시는 목적론적 역사임이 분명하다.
불교에서는 윤회적 방법의 역사를 말하는가 하면, 헤겔의 역사관에서는 정반합의 원리에 의해 나선형의 방법에 의한 역사진행을 말한다.
이와 같은 역사진행 방법의 원리들은 모두가 인간의 사색이나 경험에 의한 이론에 불과한 것으로서 기독교 유신론적 역사진행 방법의 원리와는 판이하게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3) 종말론적 역사관이다. (결과적 원리)
마 24:32 ~ 36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기독교 역사가 종말론적 역사라고 하는 것은 역사의 결과론적 원리를 표현하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기독교 역사의 결과론적 원리는 종말론적이라는 뜻이다.
이 원리는 앞에서 말한 바 있는 근본적 원리와 대비해서 이해가 가능하다.
기독교 역사의 근본적 원리는 유신론적이라고 했는데 즉 창조주 하나님께서 역사의 근본적 원리가 되신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역사의 근본적 원리는 하나님께서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심으로 역사를 시작하셨다는 것이고, 역사의 결과적 원리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심으로 역사의 종말을 맺으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결과적 원리는 바로 앞서 말한 바 있는 방법적 원리와 조화를 이루어 이해될 수 있는 원리이다.
방법적 원리가 말하는 바는 역사가 출발점으로부터 종결점을 향하여 직선적인 방법으로 진행한다는 뜻이었는데, 바로 역사의 종결을 전제한 원리였다는 점에서 결과적 원리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반드시 시간과 공존한다.
그리고 시간은 공간을 필요로 하고 공간은 형상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형상은 공간을 만들어 내고 공간은 시간을 가능하게 하며 시간은 역사를 동반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시간과 공간과 형상은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과 형상을 초월하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창조섭리를 통하여 시간과 공간과 형상적인 것으로 만드신 것이 피조세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존하는 역사가 하나님의 창조와 함께 시작 되었기 때문에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함께 역사의 종결이 맺어지는 것이다.
일반역사에서는 역사의 종말에 대한 결과적 원리를 말하지 않는다.
다만 우주가 존재하는 한, 역사는 계속해서 끝없이 진행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역사의 결과적인 목적이 있을 수 없고 결과적인 목적이 없기 때문에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의 의미도 찾을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마다 또는 민족국가마다 나름대로의 다양한 역사의 의미나 목적을 설정하고 해석해서 역사를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올바른 역사관을 가진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역사가 역사의 근본적 원리에서부터 빗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 원리를 가지고 있지 않는 일반적인 역사의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결국 일반적인 역사관은 종말론적인 결과적 원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궁극적인 역사의 목적을 알 수 없고, 역사의 목적을 모르기 때문에 역사진행 과정에서의 올바른 의미도 부여할 수 없는 것이며, 의미부여가 불가능한 삶의 현장에서 가치로움을 찾을 수도 없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관이 종말론적인 결과적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궁극적인 역사의 목적이 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역사의 종말은 역사의 목적이 완성되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지 목적이 달성되면 끝내는 법이다.
역사를 출발시키신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목적을 설정해 놓으시고 역사를 진행시키셔서 목적이 완성되면 역사를 종결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 역사관은 궁극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역사의 시작은 물론, 역사진행 과정에서의 의미 부여가 가능한 것이며, 의미 부여가 가능하기 때문에 인간들로 하여금 삶의 현장에서 참으로 가치로움을 발견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역사의 종말은 인류에게 절망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을 한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과 형상을 초월한 영원세계를 전제하지 않고 역사의 종말을 허무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조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의 종말은 영원한 세계를 전제로 한 종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종말이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 도리어 소망적인 것이며 역사목적 완성의 영원한 실현인 것이다.
2, 기독교 역사관의 특성
사 14:24 ~ 27
"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내가 앗수르 사람을 나의 땅에서 파하며 나의 산에서 발아래 밟으리니 그 때에 그의 멍에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고 그의 짐이 그들의 어깨에서 벗어질 것이라.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성경적인 기독교의 역사관은 일반적인 역사관에서는 비교적 찾아 볼 수 없는 몇 가지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기독교 역사관과 일반적 역사관은 그 원리부터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역사관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성격이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다.
기독교 역사관은 원리부터가 특수하므로 성격에 있어서도 몇 가지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기독교 역사관의 원리가 특수성을 띠고 있다는 것부터가 특성의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원리 부분을 앞에서 언급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고 이 원리부분의 특성을 제외한 나머지 내용부분에서의 특성 몇 가지만을 언급하기로 한다.
기독교 역사관의 입장에서 역사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먼저 하나님의 절대 주권성을 발견하게 되고 다음으로는 역사 내용 자체가 모두 긍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1) 역사섭리에 대한 주권성이다.
대상 29:11 ~ 12
"여호와여 !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기독교 역사관에 있어서 특성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역사섭리의 주권성이다.
즉 피조세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역사섭리의 주권성은 앞에서 이미 논술한 바 있는 기독교 신관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관에 대한 올바르고 정확한 이해만 있다면 하나님의 역사섭리에 있어서의 주권성은 이해하기가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다.
먼저, 기독교 역사관의 특성으로 하나님의 주권성이 언급되는 까닭은 피조세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온갖 역사적 사건들이 창세전 하나님의 작정섭리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창세전 작정섭리에 대하여는 이미 기독교 신관에서 하나님의 사역중에 하나임을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그 확실한 근거로는 신관에 앞서 기독교 성경관을 언급하는 가운데 성경의 내용을 총체적으로 간추려 제시한 내용으로 충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만들어 놓으신 것을 비롯해서 인간의 타락,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아벨의 죽음, 노아시대의 홍수, 바벨탑의 파괴, 아브라함의 선택, 이삭의 출생, 야곱 사랑, 야곱후손의 애굽에서의 노예생활, 출애굽사건, 광야 사십년 방황, 가나안 정복, 다윗왕국 건립, 이스라엘의 분국, 북이스라엘의 패망, 남쪽 유다의 바벨론 포로생활, 예루살렘 귀환, 다윗왕국의 재건, 예수의 출생, 죽으심, 부활, 승천, 성령강림, 복음전파, 예수재림, 최후의 심판, 영원한 천국 등 모두가 창세전 영원에서의 하나님의 절대적 작정섭리에 의하여 과거에 이루어진 것이며 현재 이루어지고 있고 앞으로 이루어 질 것 등이다.
성경에 나타나는 사건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서 쉴사이 없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온갖 사건들도 어느것 하나 예외일 수 없는 것이다.
선사시대를 비롯해서 고대 에집트 문명, 앗시리아 문명, 바빌로니아 문명, 페르시아 문명, 그리스 문명, 로마 문명, 또는 인도 문명, 중국 문명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온갖 문명의 역사들도 모두가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창세전 작정섭리에 기초한 것이다.
이에 대한 확실한 근거 역시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등 여러 선지자들의 예언에 잘 나타나 있다.
다음, 하나님의 주권성이 기독교 역사관의 특성 중 하나로 언급되는 또 하나의 까닭은 온 세상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사건들이 모두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의 역사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물질의 가장 작은 기초단위인 소립자로부터 시작해서 웅대한 우주 천체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하나님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것이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세균이 번식하는 작은 일로부터 시작해서 우주 천체가 파괴되는 엄청난 큰 일에 이르기까지 어느 사건 하나도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마 6:26 ~ 30 참고)
혹자들은 생각하기를 어느정도 큰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지만 그 나머지 일들은 인간이 한다고 착각하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과 인간이 합력해서 그 무엇을 이루어 간다고 오해하는 자들도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어떠한 일이든지 전적으로 인간 자신의 힘으로만 이루어진다고 하는 오만한 생각을 하는 자들도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공중의 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고,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다고 했다.(마 10:29 ~ 31)
바울은 아덴에서 전도할 때에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 17:26 ~ 28)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으키며 의로 불러서 자기 발 앞에 이르게 하였느뇨 열국으로 그 앞에 굴복케 하며 그로 왕들을 치리하게 하되 그들로 그의 칼에 티끌 같게, 그의 활에 불리는 초개 같게 하매 그가 그들을 쫓아서 그 발로 가보지 못한 길을 안전히 지났나니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태초부터 만대를 명정하였느냐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사 41:2 ~ 4)고 말씀 하셨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로서의 역사이든, 일반계시로서의 역사이든 간에 온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역사적 사건들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섭리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 성경적 기독교 역사관의 특성이다.
2) 역사내용에 대한 긍정성이다.
행 4:24 ~ 28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기독교 역사관에 있어서 또 하나의 특성은 역사내용에 대한 긍정성이다.
다시 말하자면,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역사의 궁극적인 선한 목적을 정해 놓으시고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그의 정하신 뜻을 따라서 모든 만사를 섭리해 가신다는 대 전제 아래 역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내용들이 부정적이 아닌 긍정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시간 세계와 함께 출발한 인류역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온갖 사건들의 연속으로 이어져 왔다.
크게는 우주의 운행으로부터 시작해서 작게는 미생물들의 생존과 번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복잡한 크고 작은 일들로 역사가 이어져 온 것이다.
이렇게 이어져 온 역사과정에서 전쟁과 폭동 그리고 평화와 안정은 물론, 기쁜 일이나 괴로운 일 또는 행복한 일이나 불행한 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기준에 의한 선악간의 모든 사건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궁극적인 선 즉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과정적 사건들이라는 뜻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진다는 점이 기독교 역사관의 특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섭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창조사역은 세상 종말을 전제하고 타락은 구원을 전제하며 때리심은 싸매심을 전제하고 헐으심은 세우심을 전제하고 흩으심은 모으심을 전제로 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 세상 종말을 정해 놓으시고 창조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인간이 타락하도록 버려두신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작정해 놓으시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이나 세상 종말을 섭리하시는 사역 또는 타락과 구원, 때리심과 싸매심, 헐으심과 세우심, 흩으심과 모으심 등의 모든 사역은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바 궁극적인 선을 이루는 과정이라는 점에서는 하등의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에 모두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적 차원이나 도덕적 차원에서는 서로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관은 모든 것의 가치기준을 인간이나 도덕률에 두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창조주 하나님 자신에게 그 평가 기준을 두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역사관에서 모든 만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그 가치평가 기준으로 삼았을 때의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셨는데(사 45:7) 인간이 보기에는 빛과 어두움이 정반대가 되는 성질의 것이지만 하나님에게는 빛과 어두움이 일반인 것이다.(시 139:12)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엿새동안 모든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다고 하신 것같이 이 세상 모든 역사도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으시도록 끝맺으실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역사 섭리의 선한 목표이시다.(롬 8:28)
기독교 역사관은 역사 진행 과정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을 구분 없이 긍정적 시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어떠한 사건에도 사건마다의 의미를 부여할 수가 있게 된다.
예를 들면 역사과정에서 일어나는 전쟁 그 차체만으로는 부정적 평가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 그 자체는 물론 부정적인 것이며 선한 것은 아니지만 그 전쟁의 결과로 얻어지는 많은 역사적 교훈은 물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역사의 궁극적인 선한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데 있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적 사건이라는 점에서 긍정적 시각에 의한 의미부여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와는 반대로 역사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평화 그 자체는 긍정적인 가치평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역사속에서는 진정한 평화가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설령 불완전한 평화라 할찌라도 그것이 이루어져서 일단은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 불완전한 평화로 인하여 더 큰 역사의 비극을 초래하게 될 경우 이것 역시 부정적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기독교 역사관은 이와 같은 경우의 불완전한 평화도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한 목적을 이루어가는 과정적인 방법적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받아 들여지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관은 모든 일에 긍정적 가치평가에 의하여 의미 부여가 가능하게 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어떠한 어려운 상황아래 처한다 할찌라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것은 물론, 역사의식과 함께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역사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감사하며(살전 5:18) 보람된 생활을 하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한다.(히 11:33 ~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