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워서 베끼다
전쟁(戰爭)이 발발(勃發)하면 적(敵)의 모든 것은 증오(憎惡)의 대상(對象)입니다.
그중에서도 적이 사용하는 무기(武器)는 적군과 더불어 제일 먼저 타도(打倒)해야 할 당연한 목표(目標)가 됩니다. 그렇게 해야 이길 수 있습니다. 이는 상식(相識)입니다.
그런데 최전선(最前線)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병사(兵士)들의 입장(立場)은 조금 다릅니다.
물론 어떻게든 격파(擊破)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러면서도 내가 사용(使用)하는 것보다 적의 무기가 더 좋다면 부러움의 대상이 됩니다.
↑아무리 증오해도 상대 무기의 성능이 좋다면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이런 경우라면 일단 빼앗아서라도 사용(使用)하고 당국(當局)에는 같은 수준(水尊)의 대항마(對抗馬)를 공급(供給)해 달라고 요구(要求)합니다.
그래서 적의 무기에 대한 증오의 감정(感情)이나 자존심(自尊心)이 상한다는 것 등은 결코 고려 요소(考慮要所)가 아닙니다.
일단 노획 무기(鹵獲武器)를 사용하면 적에게 두 배의 손해(損害)를 주는 셈입니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모든 수단(手段)과 방법(方法)을 동원(動員)하는 것이 전쟁입니다.
그런데 부러워할 만큼 좋은 무기를 당장 만들어 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독일군이 노획해서 사용 중인 T-34
이때 많이 사용하는 기법(技法)이 베끼는 것입니다.
관련(關聯) 노하우가 부족(不足)하고 시간을 단축(短縮)하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특히 급박(急迫)한 전시(戰時)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차라리 베낄 대상이 있다는 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새롭게 시작하는 것보다 좋은 상황(狀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존재(存在)하지 않던 무기를 새롭게 만드는 것에 비한다면 꽃길이라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닙니다.
제2차 대전 후 미국과 소련이 개발(開發)한 장거리(長距離) 미사일이 대표적(代表的)입니다.
↑V2를 그대로 복제하다시피 한 소련의 R-1
단순(單純)히 아이디어만 따오는 것부터 나사 하나까지 그대로 복제(復除)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종류(種類)는 다양합니다.
물론 카피한다고 원하는 성능(性能)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다 더 좋을 수도 있을지 모르나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개 원작(原作)과 비교(比較)하면 성능이 떨어지는 것이 일반적(一般的)입니다.
실패(失敗)하는 경우는 비일비재(非一非再)합니다.
성공 사례(成功事例)만 알려져서 그렇지 오히려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B-29를 그대로 베낀 소련 최초의 전략폭격기 Tu-4
하지만 그러한 과정(過政)에서 하나하나 터득(攄得)한 기술(技術)은 추후(追後) 도움이 됩니다.
독일 돌격포(突擊砲)의 영향(影向)을 받아 탄생(誕生)한 SU-122 자주포(自主砲)도 그런 사례(事例)입니다.
비록 실패작(失敗作)으로 취급(取扱)받지만 후속(後續)해서 등장하는 소련 자주포의 향도(向導) 노릇을 담당(擔當)했습니다.
사실 돌격포의 영향이 아니었어도 자주포의 등장(登場)은 필연(必然)이었습니다.
그래서 운송 수단(運送手段)의 발달(發達)에 힘입어 전간기(戰間期) 동안 자주포에 대한 이런저런 시도(試圖)가 이루어졌습니다. 소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SU-122는 독일의 돌격포처럼 기갑전까지 염두에 두고 개발되었습니다
아직 개념(槪念)도 확고(確固)하게 정리되지 않던 때다 보니 기갑총국(機甲總局)과 포병총국(砲兵總局)이 개별적(個別的)으로 연구(硏究)를 진행(進行)했습니다.
기갑총국은 화력 강화형 전차(火力强化形戰車, AT)의 개념이었고 포병총국은 말 그대로 자주포(SU)였습니다.
이처럼 구상(構想)하던 방향(方向)이 달랐기에 승자(勝者)가 되기 위해 경쟁(競爭)을 벌인 것은 아니었으나 공교(共敎)롭게도 양측(兩側) 모두 당시에 주력(主力)으로 사용하던 T-26 전차 차체(車體)와 76.2mm 포를 기반(基盤)으로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전간기에 소련 기갑총국이 개발한 AT-1
하지만 기갑총국의 시도는 AT-1로 흐지부지 막(幕)을 내렸고 포병총국의 개발안(開發案)은 다양(多樣)한 구경(口徑)의 주포(主砲)를 장착(裝着)한 변형(變形)들도 연구(硏究)되었지만 당국(當局)의 관심(觀心)을 끌지 못했습니다.
기대(企待)만큼 성능(性能)이 나오지 않았으나 사실 이는 개량(改良)을 통해 해결(解決)하면 되는 문제였습니다. 정작 흐지부지 막을 내린 데는 사연(事緣)이 있었습니다.
1937년 시작된 피(血)의 대숙청(大肅淸, Great Purge)으로 기동전(機動戰)을 주장(主張)하던 이들이 일거(一去)에 제거(制擧)되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理由)였습니다.
↑전간기에 소련 포병총국이 개발한 SU-5
연구가 중단(中斷)된 결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후과(後果)를 불러왔습니다.
1941년 6월 22일 독소전쟁 발발 후(獨蘇戰爭勃發後) 소련군은 마치 물을 만난 설탕처럼 허물어져 내렸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기동전(機動戰)을 수행(遂行)하는 능력(能力)에서 독일군에게 뒤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양한 형태(形態)의 기갑장비를 사용하는 독일군과 마주하면서 그동안 뒷전으로 방치해 놓았던 자주포(自主砲)의 효용성(效用性)이 급격(急擊)히 부각(負角)되었습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