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다가가야 합니다!
참고말씀: 수21:41; 대상25:1-31; 갈6;2; 요일4:10,11
읽을말씀: 마5:46-48
주제말씀: 마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첫째, 세상 사람들은 친한 사람들과만 계속 교제합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6,47)
일반적으로 사람은 누구를 사랑합니까?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입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누구를 좋아하게 됩니까? 자기를 좋아해주는 사람입니다. 누구에게 호감을 느끼곤 합니까? 자기에게 호감을 주는 사람입니다. 누구에게 먼저 인사를 건넵니까? 자기와 친한 사람들입니다. 누구에게 먼저 다가갑니까? 자기를 좋아해줄 것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다보니 친한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어떻게까지 행동합니까? 아무 데도 안 가려고 하고 또 아무런 일도 안 하려고 합니다. 즉 친한 사람들, 곧 ‘친구가 없으면’ 교회도 오기 싫어하고 ‘친구가 없으면’ 예배의 자리에도 안 가려고 하며, ‘친구가 없으면’ 수련회 등에도 안 가려고 합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듯이, 나이가 어리거나 처음 온 경우에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가고 온 지 몇 년이나 되었다면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더 이상 ‘친구가 없어서’라고 말하지 말고, 이제는 내가 누군가의 친구(친한 사람)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형들이나 누나들은 동생들에게 그리해야 하고, 먼저 온 사람들은 나중 온 사람들에게 그리 해야 하며, 리더나 임원들은 회원들에게 친한 사람들이 되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혹자는 새로운 사람이 왔을 때, 세 사람만 그에게 인사를 건네주어도, 그 사람은 절대로 그 공동체를 떠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에게 누군가가 다가가서 친한 사람이 되어주면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성장하지 않거나 정체된 공동체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 회원들이 친한 사람들과만 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관심 한다는 점입니다. 그대로 방치하는 것입니다. 성장하지 않는 반의 특징도 무엇입니까? 일부만 똘똘 뭉쳐있고 나머지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공동체나 소모임이 이렇게 된 데에는 누구의 탓이 제일 큽니까? 그들의 리더(leader)입니다. 어째서입니까? 그들은 가장 손쉬운 방법, 즉 열심 있는 몇몇만 바라보고, 그들과만 공동체를 이끌어가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리더가 흔히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실수 중 하나임을 깨닫지 못한 채 말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가장 많은 문제와 잡음을 야기 시키는 곳은 어디입니까? 아마도 찬양팀일 것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찬양팀 단원들끼리만 똘똘 뭉쳐 지내고 다른 이들과 좀처럼 섞이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순수봉사집단이 왜 그렇게까지 된 것입니까? 특권의식과 강한 유대감 등이 그들 스스로를 우월집단으로 여기게 만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나 부서의 찬양팀은 ‘만인 찬양대’(대상25:1-31)으로 가는 게 옳으며, 각 반으로 분산되는 게 옳습니다. 가능한 한 많은 회원들이 찬양팀에 들어오게 함으로써, 모두가 다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골고루 기회를 주어야 할 것입니다. 참고로, 다윗 시대의 성전 찬양대는 24개 팀, 총 288명이 순번대로 돌아가면서 봉사하되, 그들 대부분은 레위인으로써 이스라엘 12지파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들과 모든 형제 곧 여호와 찬송하기를 배워 익숙한 자의 수효가 이백팔십팔 명이라 이 무리의 큰 자나 작은 자나 스승이나 제자를 막론하고 다같이 제비뽑아 직임을 얻었으니.”(대상25:7,8) /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기업 중에서 받은 성읍은 모두 마흔여덟 성읍이요 또 그 목초지들이라.”(수21:41)
결국 예수님은 이러한 세태를 향해 어떤 경종(警鐘)을 울리셨습니까?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며,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모습들이 누구와 별반 다를 게 없다고 하셨습니까? 세리들이나 이방인들입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불신자와 다를 게 무어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6,47)
우리나 우리의 공동체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혹 우리의 모습도 이와 같지는 않습니까? 본문의 말씀을 잘 귀담아 듣기를 원하고 또 마음 판에 새기기를 원합니다.
둘째, 소원의 사람은 먼저 다가가고 서로를 돌아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반면 소원의 사람은 어떻습니까? 즉 하나님께 소원을 받은 사람은 어떤 태도를 보이게 됩니까? 먼저 다가갑니다. 어째서입니까? 주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그들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며, 자기와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과 교제하기에 힘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 같은 명을 하신 것입니까? 이 같이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닮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즉 하나님은 언제나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먼저 사랑을 베푸시므로,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그분의 자녀인 우리도 마땅히 그 본을 따라서 그분이 주시는 힘으로 먼저 다가가고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1)
이 같은 이유 외에도 우리는 또 무슨 이유 때문에 먼저 다가가야 합니까? 소원이 가진 특징 때문입니다.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까? 함께 이루어가야 하는 특징입니다. 즉 하나님의 소원은 누구의 것을 막론하고 그 사람 혼자서 이룰 수 없고 그가 속해 있는 공동체 내에서 함께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모세 혼자서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아론이나 훌, 여호수아 등과 함께 이룰 수 있었고, 다윗 혼자서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요나단이나 나단, 믿음의 용장들과 함께 이룰 수 있었으며, 사도 바울 혼자서 이루지 않고 바나바, 디모데, 누가, 실라, 브리스가와 아굴라, 디도, 마가 등과 함께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우리는 서로에 대해 어떤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까? 서로의 소원을 도와야 하는 의무와 책임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의 소원을 가지고 있듯이, 상대방도 하나님의 소원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는 주 안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함께 소원들을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우리는 소원의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먼저 다가가고 서로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소원의 사람이듯이, 상대방도 소원의 사람임을 명심하면서, 한 공동체 내에서 함께 소원들을 이루어가기를 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드림 팩토리(Dream Factory)임을 명심하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