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9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루카 21,12-19
내 안의 목숨과도 바꿔서는 안 되는 두 가지
오늘 복음 말씀도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표징의 일부입니다.
이 앞에서는 세상이 생명력을 잃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전쟁과 기아, 전염병과 자연재해 등이 일어날 것인데 이는 자기 주위에 생명력을 잃어가는 사람들이 많다면 그 사람이 죽어가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사람이 건강할 때는 주위 사람들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봉사할 수 있지만, 약할 때는 오히려 봉사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날씨나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오히려 주위 사람들을 건강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생명력이고 은총이라 합니다.
은총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과 함께 ‘진리’에 관한 내용입니다.
세상 마지막 때가 되면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을 모든 사람이 박해할 것입니다.
이때 그들과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라고 하십니다.
저도 책을 낼 때 그런 말을 쓰면 분명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합니다.
그들은 저를 위해 하는 말이지만, 저는 그들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하고 싶습니다.
내 안의 진리를 두려움으로 깨버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느님이 나의 죽음으로 내 안에서 소멸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내 안에 진리와 은총으로 존재하시는데,
믿음이 있다면 이는 죽임을 당하더라도 지켜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잔 다르크 성녀는 그야말로 선한 영향력을 미친 존재입니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습니다.
먼저 은총이 충만하였습니다.
1412년경 프랑스 돔레미(Domrémy)에서 태어난 잔 다르크는 13세 때 하느님에게서 오는 환시를 봅니다.
16세 때 전쟁에 참여하고 17세 때 적군에게 잡혀
그쪽 교회의 재판을 거쳐 19세 때 산 채로 화형당합니다.
그녀 덕분으로 1429년 오를레앙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어 전쟁의 판도를 바꾸었습니다.
잔의 도움으로 대관식을 한 샤를 7세는 그녀의 석방을 위해 협상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1920년에 이르러서야 잔 다르크는 재평가되었고 시성됩니다.
그런데 재판 과정에서 글을 배우지도 못한 시골 처녀인 그녀의 변론들은 신학자들을 무색게 할 정도로 오류가 없고 강력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자신이 믿는 ‘진리’에 대해 죽음도 그녀를 변하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죽음으로 위협하는 그들에게 그녀는 말합니다.
“모든 전투의 승패는 마음에서 먼저 결정됩니다.”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나는 이것을 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내가 아는 죄나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칩니다. 우리가 가진 전부는 단 한 번의 삶이며,
우리가 믿는 대로 살아가고 나면 사라집니다.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포기하고 믿음 없이 사는 것은 죽는 것보다 끔찍하고, 젊어서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합니다.”
하느님이 세상 사람들의 위협에 영향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내 안에서 은총과 진리를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목숨에 대한 위협으로부터 내가 믿고 주장하는 것이 흔들린다면 이는 자신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지 못했음을 증명합니다.
자신 안에 생명을 바칠 무언가를 찾지 못했다면 아직 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참 진리가 있고 그것을 위해서는 목숨도 두렵지 않아야 영원한 생명을 품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남에게 영향받지 않습니다.
그 영향을 멈추는 방법은 죽음뿐입니다.
그러나 죽음조차도 그 영향력을 멈추지 못합니다.
이것이 내 안에 성령께서 계시다는 증거이고 내가 영원한 생명을 지녔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는 지옥을 거부하는 분위기, 성체를 왜 영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심지어 삼위일체를 잘못 이해하여 하느님을 한 분으로 고백하기도 합니다.
거의 진리가 교회 내에서도 사라져가고 이것을 거부하는 이들은 박해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살아있는 자가 되기 위해 잔 다르크처럼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신앙인이 됩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29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루카 21장 12-19절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
<시련과 관련한 핵심 요점정리>
우리네 인생이란 저마다의 등에 시련이란 짐을 하나씩 지고 걸어가는 여행길과도 같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고통 체험에서 제외될 수가 없지요.
고통은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결국 시련과 관련한 핵심 요점 정리는 이렇습니다.
"신앙 여정에 있어서 시련은 필수입니다.
살아 숨쉬고 있는 한, 끝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는 일상의 시련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의 과제입니다."
오늘 복음은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시련 앞에, 신앙인이기 때문에 받게 되는 손해와 박해 앞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명쾌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1. 걱정하지 말 것
2. 참고 견딜 것
그러나 간단한 위 두 가지 가르침을 실천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요?
난데없이 다가온 시련과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보통 어떻게 처신합니까?
우선 드는 생각이 "왜?"입니다.
그리고 지난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반문합니다.
"왜 하필 나인가?",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도대체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저는 한평생 바르게 살려고 노력해왔습니다.
저 악한 사람들 저렇게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사는데, 왜 하필 나입니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이런 생각을 가지신 분들은 빨리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시련을 겪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런 일이기 때문입니다.
시련은 삶의 일부입니다.
이 세상에 시련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시련이 없기를 바란다는 것은 숨을 쉬지 않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시련 없는 인생을 기대한다는 것은 너무도 이기적이고 비현실적인 기대일 뿐입니다.
시련의 강도가 너무나 지나쳐 힘겨울 때마다 시련, 그 배후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얼굴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관점에서 시련에 대한 해결책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 안에서 시련을 받아들이는 일이지요.
그리스도와의 일치 안에서 우리의 시련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일이야말로 복음의 근본 메시지입니다.
삶의 모든 순간은 의미가 있습니다.
가파른 시련의 오르막길을 걸어가는 순간은 불굴의 인내심을 청하는 기도의 순간입니다.
기분 좋은 내리막길을 걷는 순간은 찬미의 노래를 부르며 하느님께 감사하는 순간입니다.
향기 그윽한 오솔길을 걷는 순간은 주님의 향기에 취해 사랑을 노래하는 순간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강론>
(2023. 11. 29. 수)(루카 21,12-19)
<박해>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2-19).”
여기서 “내 이름 때문에” 라는 말씀은, “나를 믿기 때문에”, 즉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는 이유로”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분이고, 구세주로 오신 분”으로 믿는 것이 박해의 이유이고, 원인입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의 다음 증언에 연결됩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여기서 ‘이름’은 그 이름의 소유자의 인격과 신원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의 ‘내 이름 때문에’는 ‘나 때문에’이고, 베드로 사도가 행한 증언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는 ‘사람들에게 계시된 분 가운데에서’이고,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고,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는 ‘그분밖에 없습니다.’입니다.>
예수님이 틀림없이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바로 그 믿음이 있기 때문에 신앙인들은 권력이 박해하든지, 가족이 박해하든지 간에 박해를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박해자들은 육신을 박해할 뿐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18절-19절).
“박해할 것이다.”는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박해를 받을 수도 있다.”입니다.
이 말씀은, “반드시 박해를 받는다.”도 아니고,
“박해를 받아야 한다.”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마태 10,23).
다른 고을로 피하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옮겨가라는 뜻입니다.
믿음을 지키고,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것이, 박해를 참고 견디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필요한 일입니다.
<피할 수 없다면 박해를 참고 견뎌야 하고, 그러다가 순교를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즉 피할 수 있는데도 피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는 ‘박해’와 ‘십자가’를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각자의 삶에 주어지는 십자가를
거부하거나 피하면 안 됩니다.
박해를 피해서 다른 고을로 가는 것은, 신앙생활을 계속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사실 살던 곳을 떠나서 낯선 곳으로 옮겨가는 것도
고난과 시련이고,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성가정은 주님의 천사가 말한 대로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서 이집트로 피신했습니다(마태 2,13-15).>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박해를 받는다면, 그것을 ‘신앙을 증언하는 기회’로 삼아라.”, 또는 “박해를 받더라도, 신앙을 증언하는 일을 멈추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신앙의 증언’은 박해가 없는 평온한 때보다 박해와 시련과 고난을 겪을 때에 더 빛을 발하는 법입니다.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인간적인(세속적인) 말재주로 신앙을 증언하려고 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말을 잘한다고 해서 신앙의 증언을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올바르게 믿고, 믿는 대로 사는 사람이 신앙을 증언하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증언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해야 합니다.>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라는 말씀은, 신앙인이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할 때 그 일을 도와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말씀은, 박해 자체를 막아주겠다는 약속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주신다고 자동적으로 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받는 쪽에서 잘 받아야 합니다.
자신의 신앙에 대한 ‘강한 확신’과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베드로 사도의 증언’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의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병이 나은 사람이 사도들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였다(사도 4,13-14).”
사도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그들의 증언이 인간적인(세속적인) 말재주나 지식으로 한 일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한 일이라는 것을, 즉 주님께서 도와주셔서 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이야기의 앞부분에 “그때에 베드로가 성령으로 가득 차 그들에게 말하였다(사도 4,8).” 라는 말이 있습니다.>
박해자들이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한 것은, 베드로 사도가 일으킨 기적 때문만은 아니고, 사도들의 확신과 용기에 압도되어서, 인간적인 말재주나 지식으로는 사도들을 상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