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19. 큐티
마태복음 5:1 ~ 6
팔복 (1) - 첫째 복 ~ 넷째 복
관찰 :
1) 무리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다
- 1절 ~2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 예수님께 나아온 무리들은 예수님이 병을 치유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약한 자를 치유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사방에서 모여든 자들입니다. 이들의 요구는 육신적이었습니다.
-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시고자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무리들이 모여들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습니다.
2)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 마음이 가난하지 않고 부요한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천국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움 받겠다는 마음이 없으면 심령은 가난해지지 않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가난인지 아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3) 애통하는 자의 복
-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여기서의 “애통”은 심령이 가난해 짐으로 천국을 소유한 자가 자신의 죄에 대하여 민감해 짐으로 깨닫는 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악이 얼마나 큰지를 앎으로 슬퍼하고 고통하는 자가 그의 죄 씻음의 기쁨으로 위로를 받을 것이 약속되고 있습니다.
-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이 인봉된 책을 뗄 자가 없을 때 심히 통곡했을 때 그를 위로한 것이 어린 양의 존재요, 그 일곱 인봉을 떼어주심이었습니다. 그런 애통함이 위로를 받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4) 온유한 자의 복
- 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온유는 헬라어로 “야생마를 길들이다”라는 의미가 들어있는 단어입니다. 힘이 있지만 그것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정지하고 온전히 순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심령이 가난한 자가 죄에 대해서 애통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함으로 자신을 쳐서 복종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5)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 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 의를 추구하되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이기에 이 세상에 그 의가 없음으로 인해 주리고 목마른 갈망이 있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세운 기준, 혹은 나 자신이 생각하는 질서와 의에 대한 목마름이 아닙니다. 오직 심령이 가난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자신의 죄악으로 애통하며,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가운데, 자신과 타인의 삶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나지 아니하는 안타까움으로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누리게 될 복은 그가 갈망하는 의로 배가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시겠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넘치게 될 것임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이기에 의미가 있고 반드시 이루어질 약속입니다.
가르침 :
1) 예수님의 이 산상수훈은 너무나 깊고 놀라운 말씀입니다. 아무리 묵상하고 묵상해도 그 깊이를 알 수 없고, 그 실천은 더더욱 요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복입니다. 예수님의 분명하고 정확한 인생에 대한 진단이고 실제입니다. 오직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 복이야말로 참된 복이고, 이것보다 더 좋은 복이 없습니다.
2) 심령이 가난해야 천국을 얻게 됩니다.
3) 애통해야 위로를 얻습니다. 역설입니다. 누가 이런 말씀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오직 예수님 뿐이십니다.
4) 온유한 자가 이 땅에서 흥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순종하는 자가 아니고서는 저 세상에서가 아니라 이 땅에서의 유업도 없는 것입니다.
5) 의에 주릴 수 있다는 자체가 이미 복입니다. 의를 갈망하여 목마른 지경에 다다른 자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로 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크고 큰 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적용 :
1) 나는 심령이 가난한 자인가?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게 물어봅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다른 것을 바라보지 않는가? 아직 그렇지 못한 영역들이 존재합니다. 주님의 은혜.... 더더욱 필요합니다. 더욱 주님의 은혜만을 사모하길 소원합니다.
2) 애통. 나의 죄악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애통. 그리고 주님의 위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전에 주님이 나의 죄와 이 세상에 대한 죄악, 특별히 이북의 문제로 속울음을 울게 하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합니다. 나의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순간입니다. 내 온 몸이 부서지는 아픔이었지만, 그것이 기쁨이고 그 소망이 주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누리게 된 주님의 은혜가 크고 컸던 것을 다시 기억합니다. 실제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역설이지만 사실입니다.
3) 온유한 자. 하나님의 뜻이 모든 삶의 우선이 되는 자. 모세를 닮아가는 자. 그가 복이 있습니다. 나의 삶 속에 하나님의 뜻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내 생각을 내려 놓고 주님을 의지합니다. 그것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요 다짐입니다. 나도 그렇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독 신앙에 있어서 나를 죽이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금 절감하게 됩니다.
4) 의에 주리고 목마름. 나는 이 부분이 부족합니다. 여전히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갈망합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그런 자리에 나가가길 원하고, 나라는 존재가 가지는 위치와 상황에 걸맞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기 인식 속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존재가 되길 위해 기도합니다.
5) 극심한 통증 가운데 있는 아내가 하나님의 복으로 채움을 받고, 통증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기를 간구드립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