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안국 이야기
김안국의 아버지는 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한 김숙이며, 대제학은 당대 최고의 학자가 앉을 수 있는 명예로운 직책이었다.
또한 김숙 위대로 3대가 대제학을 지냈으니,가문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이런 명문가에 아들이 태어났다. 자연히 한 몸에 큰 기대를 받았다.
그런데 외모만 총명하게 생겼을 뿐 속은 맹탕이었다.
아무리 가르쳐도 김안국의 나이가 열네살이 되도록 하늘천 따지에서 한걸음도 나가지 못하니 아버지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가문의 명예에 먹칠하여 조상을 뵐 면목이 없었다.
김숙은 냉혹한 결정을 내렸다.
사촌 동생 김청이 안동 지방의 하급관리로 가게 되었다며 인사를 왔다. 김숙은 그에게 아들 안국을 딸려 보내며 당부했다.
“아들을 영영 안동 사람으로 만들어 살도록 하게.”
김숙은 이어 아들에게 차갑게 덧붙였다. “이제부터 난 너를 아들로 여기지 않겠다.
너도 나를 아비로 여기지 마라. 그리고 다시는 서울에 오지 마라. 만약 오면 죽여 버리겠다.”
김청은 결국 김안국을 데리고 안동에 부임해서 평범한 양반 규수를 물색했다.
마침 좌수(座首) 이유신에게 딸이 있단 소리를 듣고 혼담을 넣었다.
이유신은 김안국이 공부만 못할 뿐 집안 좋고 꽃미남이어서 사윗감으로 만족했다.
김안국은 처가에 얹혀 데릴사위로 살면서 밥만 축냈다.
장인 이유신은 들은 바가 있어 그를 가르칠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부인은
“대장부께서 어찌 방 안에서 꼼짝을 안 하십니까? 글 공부를 하셔야지요.”
안국이 얼굴을 찌푸리며 속사정을 말했다. “글 소리만 들어도 머리가 터질 듯 지끈거려 도저히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부인이 묘수를 생각해 냈다.
“우리 옛날 이야기 하며 놀아요.”
부인은 자신이 읽은 책의 내용을 이야기하듯 풀어서 들려주었다. 본래 안국은 머리가 비상한 데다 이야기를 좋아했다.
부인이 “들은 바를 말해보라”고 하자, 안국은 한 대목도 틀리지 않고 줄줄 말하지 않는가?
부인은 뛸 듯이 기뻤다.
부인은 그날부터 매일 책을 읽고 그 내용을 들려주었다.
물론 안국은 몽땅 다 외웠다. 어느 날 안국이 물었다.
“부인이 매일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다 어디서 난 거요?”
“책에서 읽은 거지요.”
“허어! 정말 글이란게 그토록 재미있는 건가요?
그렇다면 내 오늘부터 글을 읽어보겠소.”
본래 영특한 안국이 공부를 시작하며 재미를 느끼자, 밥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잊은 채 열심히 글을 읽었다.
그렇게 10년이 지나 안국은 과거를 보러 서울로 향했다.
안국은 집으로 가지 못하고 자신을 길러주었던 유모 집에 숨어 지내며 과거를 치렀다.
결과는 장원급제였다. 그런데 시험지에 ‘김숙의 아들 김안국’ 이라 썼기에 저녁에 시험관들은 축하인사 차 김숙의 집에 갔다.
김숙은 분노가 폭발했다.
죽은 듯이 지내라 했는데 아들놈이 올라와 시험 부정을 저지른 것이라 생각했다.
한참 동안 시험관들의 설명을 들고 겨우 정신을 차린 김숙은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안국은 관직에 나가 훗날 대제학에 이른다.
김안국전의 편찬자 백두용은 이를 평하면서 이렇게 비유했다.
'대문은 잠겨 있고 쪽문은 열려 있다. 사람들은 대문만 두드릴 뿐이다.그런데 어떤 사람(부인)이 대문이 잠겨 있자, 쪽문으로 들어가 대문을 열었다.'
김안국의 아버지, 작은아버지, 장인 모두 대문만 열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부인은 김안국을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문을 열기 위해 여러 고민을 했다.
그것이 모든 것의 차이를 갈랐다.
서울 안국동(安國洞)의 지명은 그에게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는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었으며
임금으로부터 많은 땅을 하사 받았고, 생활이 어려운 일반 백성들에게 땅을 나누어주었다.
그중의 한 곳이 북촌 일대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칭송하며 그곳을 안국방(安國坊)이라 불렀고, 후에 안국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