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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느낀다
Quae sunt in luce tuemur
E tenebris
어둠 속에서
빛 가운데 있는 것들을 본다.
-루크레티우스,『자연에 관하여』Ⅵ권.
사진 김동원
하늘과 땅이 감응하여 만물이 생겨나고, 성인이 사람의 마음을 감화시켜 천하가 화평하다. 그 감응하는 바를 관찰하면 천지만물의 실상을 알 수 있다. 天地感而 萬物化生, 聖人感而 天下和平, 觀其所感而 天地萬物之情, 可見矣. (『周易』, 澤山咸卦
).
호랑이가 포효하면 동풍이 불고, 용이 하늘에 오르면 상서로운 구름이 모인다. 고래가 죽을 때는 혜성이 나타나며, 누에가 실을 토해내면 현악기의 상음을 내는 줄이 끊어지고, 유성이 떨어지면 발해에 해일이 일어난다. (『淮南子』, 제3권「天文訓」, 김성환 역) 相動感通.
한편, 미국 신경과학자인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에 의하면, 인간은 느끼고 아는 존재이다. 즉 인간은‘자기를 아는’동물이며, 그것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다마지오는 인간의 의식을 존재(being) - 느낌(feeling) - 앎(knowing)의 세 단계로 구분한다. 존재는 모든 생명체의 등장 그 자체이며, 느낌은 존재하게 하는 것으로서 외부와 내부의 변화를 감지하는 능력이다. 앎-깨달음은 그 느낌들을 통할하는 의식 체계를 말한다. 인간 의식을 만들어 내는 몸과 정서는 언어 이전의 생명이다. 생명은 몸과 뇌, 마음과 느낌, 의식을 낳고 우주 전체보다 크다. 물질과 과정으로서 생명, 생각과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생명은 시와 삶의 근간이다. 원시적 생물에게도 정서(emotion)가 있다. 정서란 유기체의 변화, 즉 생리적 변화나 행동 변화를 유발하는 자극에 대한 복합적 반응에 해당한다. 이러한 변화를 일으키는 자극은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데, 내적 자극과 외적 자극이 그것이다. 이러한 자극의 변화를 인식하는 순간을 두고 우리는 유기체가‘느낀다’고 말한다. 유기체는'느끼는 체계'이자,'느낌의 통일체'1) 이다. 그리고 정서라는 이름의 신경학적 패턴은'핵심의식'으로서 스스로 활성화되며,‘느낌을 안다는 느낌’으로 기능한다. 시간과 공간에 관계하는 실존적 방식으로서 신체(프랑수아 누델만,『건반 위의 철학자』)와 영혼의 느낌은 생명 활동의 핵심인 항상성 유지에 필수적이며, 의식의 시작점이자 자아 감각의 근원이다. 이 느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우리는‘앎’이라는 것을 의식한다.
기분이나 감정의 문제는 철학에서 이성과 진리의 문제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서 취급되어 왔다. 이는 이미 칸트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고 실존철학 및 인간학에 이르러 감정은 이성보다 깊은 삶의 차원으로서 본격적으로 자리매김되었다. 이런 배경 하에서 하이데거는 존재 해명을 위한 현존재의 차원으로서‘기분’을 상정하고 존재의 의미를 말한다. 현존재의 기분은 불안과 권태로 드러난다. 전자가 현존재의 존재 지평에서 무를 개시하고 존재를 지시함으로써“존재 지향적 기분”에 해당한다면, 후자는 인간과 세계를 매개하여 존재로 나아간다는 점에서“인간 지향적 기분”이다. 하이데거는 존재 자체의 생기로서 근본기분(Grundstimmung)을 말하며, 현존재의 기분은 존재와 인간 양자를 매개한다.“니체의 즉흥 연주는 기분Stimmung을 창조하는 것, 즉 청중을 완전하게 내적인 우주, 소리와 가치, 이미지와 감정의 세계로 몰아넣는 것”(프랑수아 누델만, 앞의 책)이 된다. 그런 기분의 현상(학)으로서 시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것은 이상한 것으로부터 중요한 것을 떠올리게 하고, 중요한 것으로부터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게 한다. (인아영,「이상한 것, 중요한 것, 아름다운 것」, 경향신문, 2023.11.8.)
무릇 감상자는 호스 에데(ὅ ἤδῃ), 즉 “꿰뚫어 본” 자다. 시와 예술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하나의 입장(Standort), 즉 “진리의 시원적 일어남을 사유하고 경험하는 태도”(하이데거,「예술작품의 근원」)인 동시에, (조각가 미켈란젤로처럼) 돌 속에 갇혀 신음하며 자신을 해방시켜 달라는 신의 음성을 듣는 일이다.
시의 아름다움과 향수享受는 살아있음의 황홀경에 있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사의 이치와 흥취에서 비롯되며, 순간의 영원을 경험하는 것만큼이나 감동적이다. 시는 생명이다. 생명은 생生과 명命이 결합된 말로서, 명이 이미 주어진 것이라면 생은 명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의지나 역능이 된다. 생명은 두 항의 상호 대립과 충돌로 인해 새롭게 발현되는 하나의 흐름이자 리듬이며 주름이다. 이는 모든 시와 예술의 운명이자 선택이다. 특히 주름의 접힘과 펼침 속에서 생성되는 차이와 반복은 생명의 질서이며 도약이다. 생명의 마음과 눈으로 바라본“세상은 얼마나 황홀하고 감각적인가. 그것은 신비에서 시작되었고 신비로 끝날 테지만, 그 사이에는 얼마나 거칠고 아름다운 땅이 가로놓여 있는가”(다이앤 애커먼,『감각의 박물학』). 겨우내 언 땅에서 어둠을 뚫고 나오는 새싹을 보라. 존재의 비밀은 겨울과 봄 사이에 있다. 그 사이와 경계의 점이지대漸移地帶에서 피어나는“모든 사물 하나하나는 진지한 것이고 유일무이한 것이고 또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게오르크 루카치,『영혼과 형식』) 한 편의 시에서 요구되는 이미지와 사유도 그 자체로서 고고한 생명(성)을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시는 생명의 생명이며, 묘처妙處다. 상常의 발견이다. 생명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차원을 수반한다. 그렇지 않고,
오직 하나의 단일하고 유일한 참여자가 있다면 어떠한 미적인 사건도 있을 수 없다. 절대적인 의식은 자신을 경계 이월하는 그 어떤 것도, 바깥에 존재하면서 제한을 가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지니지 못하며, 이 때 이 의식은 미학적인 것이 될 수 없다. … 미적인 사건은 참여자가 둘일 때만 일어날 수 있으며, 서로 일치하지 않는 두 개의 의식을 전제한다.
-바흐친(김희숙․박종소 공역),『말의 미학』
생명은 너에게로 가는 길이며, 그와 그것에 이르는 길이다. 하나의 단일하고 유일한 참여자, 즉 종교적 차원의 신이나 절대자를 상정하고는 더이상 미학적 사건은 발생할 수 없다. 특히 서사적 장르의 경우에 있어 인물과 인물 간의 변화나 추이, 시간성을 배제하고 어떻게 소설미학이 성립 가능할 것인가. 문제는 절대 존재로서의 나가 아니라 너에게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나가 아닌 것이 된다. 마음과 의식의 차원이 중첩되는 공간은 실로 깊고 아름답고 먼 것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의 진리이자 둘의 사건이다. 그것은 너/그에게로 가는 도상에 있고, 생명의 느낌을 본위로 하며 미학적이고 윤리적이다. 도道와 미술을 하나로 보고, 그림 속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마음을 이해하고자 했던 R․솔소의 경우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 느낌은 과정과 실재이며 생의 기미機微다. 모든 것은 느낀다.
나이팅게일은 마치 흐르는 물 속에 숨듯 자신의 노래에 숨어 있었다. 초저녁이었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를 몇 분간 후드득 소리를 내며 반제 호수와 황량한 해수욕장 공원 내의 인동 덩굴 덤불 위로 쏟아지더니 일시에 뚝 그치면서 세상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이어 찰랑 찰랑 흐르는 물소리에 화답하듯 나이팅게일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구슬이 굴러가듯 맑고 투명한 소리였는데,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하다가도 금세 멀리서 울려 퍼졌다. 소리는 올라갔다가 다시 또르르 떨어지고 떨리다가 다시 매끄럽게 이어지고, 점점 빨라지다가 다시 제 호흡을 되찾았다. 나이팅게일의 노랫소리는 공중으로 매끄럽게 올라갔고, 소리 없이 불어나는 물살처럼 허공을 가득 채웠다. 나이팅게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곳곳에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새 소리가 풍경 속으로 고르게 퍼져 나갔다. 새가 대기와 하나로 합쳐진 듯 대기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울림통처럼 들렸다. … 나는 나이팅게일이 오로지 소리 그 자체로만 느껴졌다.
―안드레아스 베버(박종대 옮김),『모든 것은 느낀다-인간, 자연, 생명과학의 진화』
안드레아스 베버의 느낌의 미학이 갖는 특이점은 예술이 우리 속에 있는 자연의 목소리라는 사실에 있다. 자연이 느끼는 진리와 존재의 집, 그 집에는 생명 자체인 나이팅게일이 산다. 작은 새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처처에 있다. 작은 새는 자신의 노래에 숨어 있다. 그것은 세상의 정적이며 커다란 울림이다. 소리 그 자체다. 그것은 또한 세계가 목소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첼로의 성자 파블로 카잘스의‘새들의 노래’를 들으면 어딘지 모르게 애틋하고 가라앉은 물처럼 고요한 느낌이 든다. 이는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자만이 알아낼 수 있는 소리의 비밀이다. 카잘스의 음악에는‘말할 수 없는 소녀’가 산다. 새들의 노래에서, 새들은 이념과 비슷한 것이 아니라 이념 그 자체를 말한다. P․셰퍼드의 이러한 통찰에는 모든 인간의 내부에는 결코 훼손될 수 없는 비밀의 인격이 살고 있다는 말이 그 배면에 깔려 있다. 참나sarkra의 비의와 순수 이념은 시와 예술의 태반이자 생명이다. 한편, 저항시인이나 민족시인으로 지목되는 이상화의 경우에 있어서도 생명은 시의 핵심 요소로 자리한다. 곤강은 이러한 상화의 시를 두고“삶의 喜悅을 기리는 讚歌요, 存在로서의 人間의 哀切한 엘레이지”(윤곤강,「冬夜抄-古月과 尙火와 나」)로 평가하고 있지만, 상화의 시와 미의식의 저변에는“ᄭᅡ치가 ᄲᅧ만남은 나무가지에서 울음을운다”(이상화,「겨울마음」)에서 보듯이, 생명과 신령에 의한 어떤 울음과 울림이 내재해 있다. 까치와 뼈가 검은-흰 빛이라면, 나뭇가지는 비非라는 시가 거주하는 장소다. 그는 시의 언어를 단순한 소통의 도구나 질료가 아니라, (언어) 생명으로 파악한다. 다음 시를 보자.
파-란비가「초―ㄱ초―ㄱ」명주ᄶᅵᆺ는 소리를하고 오늘낫부터 아즉도
온다.
비를부르는 개고리소래 엇전지 얼사년스로워 구슬픈마음이 가슴에밴다.
나는 마음을다솓든 비누질에서 머리를한번 쳐들고는 아득한생각으로 비소리를듯는다.
「초―ㄱ초―ㄱ」내울음가티 훌적이는 비소리야 내눈에도 이슬비가 속
눈섭에 듯는고나.
날 맛도록 오기도하는 파―란비라고 설어움이아니다.
나는 이봄이되자 어머니와옵바말고 낫선다른이가 그리워젓다.
그러기에 나의설음은 파―란비가 오면부터 남붓그려 말은못하고 가슴
깁히 ᄲᅮ리가 박혓다.
매몰스론 파―란비는 내가지금 이와가티 구슬픈지는 ᄭᅮᆷ에도모르고
「초―ㄱ초―ㄱ」나를울린다
-이상화,「파-란 비」전문
파란 비는 발화자인 나의 마음과 상상 속에 존재한다. 노발리스의 소설「푸른 꽃」에서처럼 파란 비는 애당초 부재의 대상이다. 파란 비는 파란 잔디처럼 어떤 기쁨을 주기 보다는 슬픔이나 상처의 빛깔이나 색을 지니고 있다. 시인의 순수한 정서와 미감이 돋보이는 이 시에서 소리의 상상력과 음성 상징어는 주요 기제로 작용한다. 소리는 시간의 추이에 따라“비를부르는 개고리소래 → 훌적이는 비소리 → 매몰스론 파―란비”등의 변화를 시도한다. 이 경우 정서의 변화는 결코 단선적이지 않으며, 어떤 구슬픔이나 아득함, 서러움이나 그리움으로 다양하게 제시된다. 특히 봄비에 푸른 색을 부여하여 파토스적 감성을 자극하며 신비감을 더하고 있는 이 시에서 명주를 찢는 듯한 빗소리는 타자에 대한 정서의 깊이를 드러낸다(“봄이되자 어머니와 옵바말고 낫선다른이가 그리워젓다”). 서정시가 먼 것에 대한 그리움과 내면의 언어를 지향하고 있다면, 그것은 소리의 숨과 결에 의해 하나의 울림으로 드러난다는 사실. 파란 비가 오면서부터 나의 마음은 부끄러움에 말조차 건네지 못한다. 나는 구슬프고 아득하다.“초-ㄱ초-ㄱ”하고 내리는 봄비, 즉 빗소리에 대한 감과 촉은 생명의 느낌, 느낌의 생명이다. 더욱이 비가 개구리 소리를 부르는 게 아니라, 개구리 소리가 비를 부른다는 사실은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다. 다음 시의 경우는 어떤가?
아마 무너뜨릴 수 없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빈 듯하면서도 공터는
늘 무엇인가로 가득차 있다
공터에 자는 바람, 붐비는 바람,
때때로 바람은
솜털에 싸인 풀씨들을 던져
공터에 꽃을 피운다
그들의 늙고 시듦에
공터는 말이 없다
있는 흙을 베풀어주고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무심히 바라볼 뿐,
밝은 날
공터를 지나가는 도마뱀
스쳐가는 새가 발자국을 남긴다 해도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늘의 빗방울에 자리를 바꾸는 모래들,
공터는 흔적을 지우고 있다
아마 흔적을 남기지 않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최승호,「공터」전문
이 시의 생명은'고요'라는 말에 있다. 공터와 고요에 대한 시인의 심미적 탐색은 바람과 꽃, 도마뱀과 모래 등의 사물에서 더욱 생명력을 얻고 있다. 공空이 변화와 생성의 터전이라면 공터를 지배하는 것은 더이상 관리인도 시인도 그 무엇도 아닌, 고요 그 자체다. 고요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고요는 그 무엇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다. 고요는 모든 것을 무심히 바라보면서도 공터를 지배하는 왕으로 등극해 있다. 공터의 고요에서 붐비는 바람은 꽃을 피우고 비를 내리며, 종내는 모래알의 자리를 바꾸고 만다. 관조의 미학은 고요의 깊이와 상상에서 확보된다. M․피카르트에 의하면, 기술문명 사회를 사는“오늘날의 시는 더이상 침묵과 연관되어 있지 않다. 온갖 말들로 부터 와서 온갖 말들에게로 옮아가는”형국이다. 그랬을 때, 공터는 침묵의 형이상학 내지는 마음의 생태학을 나타내는 표지標識로 기능한다. 아래 시편에서는 그런 시인의 통점痛點과 자의식이 돋보인다.
끝없는, 끝도 없는 얼어붙은 호수를
절룩거리며 가는 흰, 흰 북극곰 새끼
그저, 녀석이 뜯어먹는 한두 잎
푸른 잎새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소리라도 질러서, 목쉰 소리라도 질러
나를, 나만이라도 깨우고 싶을 때가 있다
얼어붙은 호수의 빙판을 내리찍는
거뭇거뭇한 돌덩어리 하나 없고,
그저 저 웅크린 흰 북극곰 새끼라도 쫓을
마른 나무 작대기 하나 없고,
얼어붙은 발가락 마디마디가 툭, 툭 부러지는
가도가도 끝없는 빙판 위로
아까 지나쳤던 흰, 흰 북극곰 새끼가
또다시 저만치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볼 때가 있다
내 몸은, 발걸음은 점점 더 눈에 묻혀가고
무언가 안되고 있다
무언가, 무언가 안되고 있다.
-이성복,「極地에서」전문
지극한 마음의 현상이다. 책이 마음 속의 언 바다를 깨는 도끼와도 같다는 프란츠 카프카. 이성복에게 시는 도끼라는 언어의 날이자 빛이며 (북)극이다. 생명에 대한 연민이자 충동이며 깨침이다. 이 시는 물과 얼음, 푸른 잎새와 흰 북극곰 새끼, 거뭇거뭇한 돌덩이와 마른 나무 작대기 사이의 대비적 느낌, 그리고 유무의 양극에서 비롯되는 실존적 국면이 돋보인다. 닫힌 방 안에서 가위에 눌려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꿈, 나만이라도 깨우고 싶을 때, 시는 내게로 온다. 시는 마음의 빈터와 정신의 극지에서 외치는 말 없는 말이다. 고통이라는 생명의 잉태다(“아까 지나쳤던 흰, 흰 북극곰 새끼가/ 또다시 저만치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볼 때가 있다”). 미셸 슈나이더는 슈만의 음악에 대한 내면풍경을 말하면서“고통douleur의 빛깔은 희다. 그 위에 아무 것도 쓸 수 없는 절대 흰색이다”라고 적고 있지만, 인간의 삶은 정말이지, 될 때 보다 무언가 되지 않을 때가 더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런 불가능의 가능(성)을 추구하고 실현하는 장소가 시와 예술이 아니던가. 극지의 풍경과 상처를 미학적으로 드러낸 이성복은 모든 것이 하얗게 보이는 경지, 화이트 아웃white out의 시인이다.
서정시의 위의와 가치는 질문에 있다.“어떻게 하면 내 슬픈 기도가 하늘에까지 닿으랴?/ 당신도 욥처럼〈내가 태어난 날〉을 비통해 하며/ 엉엉 울어본 적이 있는가?/ 몇날이고 잠 못 이루며, 그 영원한 외로움을 이겨내 본 일이 있는가?”(에밀 시오랑,『내 생일날의 고독』). 고독과 구원, 아니 탄생의 비극은 욥의 언어에 있다. 하늘에 가 닿으려는 간절한 마음과 말, 그 통점-암점에 있다. 시오랑에게 실존적 서정은 주체의 분산을 말한다. 왜 인간은 고통과 사랑 속에서 서정적이 되는가? 또는 삶의 결정적 순간에만 서정적이 된다는 그의 말은 서정시가 하나의 형태나 체계 너머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시와 생명에 대한 미적 감수성과 윤리적 태도는 시인이 지녀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지금 우리는 그런 시인의 생명, 생명의 시인이 요청되는 시점이다.
자료1.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김훈,「바다의 기별」)
자료2.
琴詩 / 소동파
若言琴上有琴聲 (약언금상유금성) 만약 거문고 속에 거문고 소리가 있다면
放在匣中何不鳴 (방재갑중하불명) 갑 속에 있을 때는 왜 울리지 않는가.
若言聲在指頭上 (약언성재지두상) 만약 그 소리가 손가락 끝에서 난다면
何不於君指上聽 (하불어군지상청) 그대의 손끝에서는 왜 들리지 않는가.
차시예고
4회(05.08.) 이태호 (철학박사/통청인문학아카데미 원장) 현의 존재론(1) 5회(05.22.) 이태호 (철학박사/통청인문학아카데미 원장) 현의 존재론(2) |
1) 안드레아스 베버(박종대 옮김),『모든 것은 느낀다-인간, 자연, 생명과학의 진화』, 프로네시스, 2008.) 이 책의 서문에 의하면,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고'느끼는 존재의 집'으로서 자연도 인간의 일부다. 그리고 인간은 자연을 체험하면서 세계와 상징적으로 하나가 된다. 자연은 인간의 본디 모습을 구현해주며 우리의 감성과 정신적 구상들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거울이다. 사람이 자연을 찾는 이유는 자기 속의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인간의 몸도 자연이기 때문이다. 한편,“인간은 시적 동물animal poeticum이자 언어의 일부이며 세계의 내부다. 안과 밖으로 동시에 향하는 시각이다. 그런가하면, 비유는 육체적 체험을 실존의 가치로 바꾸”(pp.126~127.)는 미적 장치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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