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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란 “떠남”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집과 직장, 번뇌와 갈등을 다 놓아두고 떠나는 것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것도 하느님께 맡기고 떠나는 여행입니다.
이 떠남 속에는 생명의 기운을 얻어 활력 있게 살아가고 싶은
우리의 소박한 바람이 숨어 있습니다.
순례의 여정에는 언제나 하느님의 숨결을 나눠주는 자연이 함께할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은 만남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지 순례란 “만남”입니다.
성지 순례 속에서 이뤄질 만남이란 시간에 갇히지 않고
지속되는 사람과 생명의 흐름과의 만남입니다.
순례를 통해 우리는 100년, 또는 200년 전에 돌아가신 순교 성인들이
오늘의 교회와 우리 안에 살아계심을 체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그분들이 그렇게도 잃을 수 없었던, 누구도 빼앗지 못했던 하느님과의 관계,
‘하느님의 사랑스런 아들-딸’
떠남을 시작한 우리가 얻게 될 가장 큰 선물은 만남입니다.
성지 순례란 “돌아옴”입니다.
순례란 본래 출발했던 자리로 되돌아온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새로운 만남과 체험 안에서 새로워진 우리는 출발 전의 우리가 아닙니다.
순례에서 돌아온 우리는, 우리가 뿌리 내리고 살아가는 삶속에서,
하느님의 계획을 따라 믿음과 사랑과 생명의 열매를 맺어갈 것입니다.
그 씨앗 한 알 품게 될 순례에, 하느님과 성인들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 천주교 대전교구 안내도에서 -
* 치명자산성지 내 성당 내부.
사도회(회장 정상덕 마리노) 회원 30명(총회장 부부 포함)은
10월 26(일)일 미리 수립해 놓은 년 간 계획에 의거 부부 동반하여
전주시의 치명자산성지 외 몇 곳 성지순례를 하고 왔습니다.
장소가 결정되고부터 치명자산의 유래가 너무나 궁금하였는데
치명자는 순교를 뜻함을 알고는 마음이 숙연해지기도 하네요.
이번 순례의 원 계획은 11/9일이었지만 본당 사목연수 일정과 겹쳐
부득이 일정을 앞당겨 10월이 저물어 가는 주일날 순례를 하게 되었으며
조금씩 깊어가는 가을 아침이라 제법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노익장을 과시하며, 순교자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그곳은 어떤 곳일까
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궁금함과 설렘을 안고 출발하였습니다.
07시 상쾌한 아침공기를 가르며 성당입구 육교를 출발하여 동대구 IC를 거쳐
고속도로를 가는 시간 내내 성모송과 묵주기도를 바치고 성가를 부르며
순교성인을 맞이하기 위한 경건한 마음의 준비를 하였습니다.
10시 10분경 전주시 들머리에 들어서니 오늘의 해설을 해 주실 형제님
두 분이 미리 기다리고 있기에 우린 그 두 분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길 안내와 설명을 들으며 20분 정도를 달려 오늘 계획의 첫 번째 성지인
초남이 성당에 도착하여 잠시 주위를 둘러본 뒤 11:00 미사를 드리고
약 800m 정도 떨어진 교리당의 구내식당으로 이동하니 조촐하지만
뷔페식 유기농식단이 차려져 있었으며 조금은 시장 끼가 돌던 터라
모두들 맛있게 점심식사를 하고 13시까지 휴식시간을 가졌습니다.
13시 초남이를 출발하여 두 번째로 숲정이 성지로 이동하여 숲정이와
서천교, 초록바위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박해 속에 순교하신
고난의 발자취에 우리의 발길을 맞춰보면서 14시경 숲정이에서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치명자산 성지로 이동하였습니다.
가는 내내 설명은 이어졌으며 14시 20분경 치명자산에 도착하여
마음 같아서는 전체를 꼼꼼히 둘러보고 싶었지만 제한된 시간이라
십자가의 길을 거쳐 순교자의 묘를 참배하고 신기한 형상의
예수마리아바위와 한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전주 시내를 조망하고
인근의 전동성당을 둘러본 뒤 성지순례 일정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 우리와 함께할 버스입니다.
* 거창휴게소에서 요강도 비우고 휴식 시간도 가져봅니다.
* 창밖으로 마이산이 스쳐 지나가네요.
다음에 찾아 갈께요~~
* 전주 톨게이트.
톨게이트도 현대식 건물이 아니라 고풍스러운 모습입니다.
* 초남이 마을 입구.
* 초남이 성지(동정부부 생가).
초남이 성지는 유항검(1754~1801)이 살았던 생가터이다.
1784년 이승훈에게 아우구스티노란 세레명으로 세레를 받고 내려와
가족과 가속들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김제 ⦁ 금구 ⦁ 고창 ⦁ 영광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하였다. 가성직제도 아래서 신부로도 활동하였다.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이곳에 내려와 미사를 집전하고 유항검과
교회의 여러 현안들을 논의하였다.
선교사 영입과 신앙의 자유를 위해 ‘대박청래운동’을 주도하였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대역부도죄로 사형 선고를 받아
9월 17일 풍남문 밖에서 능지처참형으로 순교하였다.
또 유항검의 아들 유중철과 며느리 이순이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었던 동정부부의 삶을 이곳 초남이에서 4년 동안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유항검의 일가 중 7명이 순교하였는데 이들의 유해는 바우배기에
모셔져 있다가 1914년 지금의 치명자산으로 이장하였다.
유항검 ⦁ 유중철 ⦁ 이순이 ⦁ 유문석 ⦁ 유중성 5명은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어 시복시성 절차 중에 있다.
도착하니 입구의 전례석엔 발 디딜 틈이 없이 많은 사람들이
신부님의 강론을 경청하고 있습니다.
경당 모습.
이곳에서 11시에 미사를 드렸습니다.
성체조배실.
사무실.
파가저택.
국사범에게 내려지는 죄목으로 집은 불사르고 집터는 웅덩이로 만들어
3대를 멸하는 조선왕조 500년사에 가장 큰 형벌로서
이조실록에서 근거를 찾아 이곳이 유항검의 생가터임을
확인하다. (처형 1801년, 현지 확인 1985년).
* 조선 천주교 최초 교리당.
최초 교리당임을 알리는 큰 표지석.
앞의 장독이 운치를 더합니다.
교리당 입구에서 우리를 맞아주시는 예수님과 마리아상.
교리당의 모습.
사도 유항검과 주진모 신부님의 미사 봉헌과 사도 유항검의 최초 교리 기념비.
주진모 신부님의 최초 미사봉헌과
사도 유항검의 세례, 고백, 견진 미사봉헌 한 곳.
밥 무꼬 쪼메 쉬다가 시간이 되서 차 타로 갑니다.
* 숲정이.
이곳은 이조시대에 군사훈련의 지휘본부인 장대가 있던 곳이며
신앙을 끝까지 증언하는 천주교도들에게 참수형을 집행한 현장이었다.
그리고 당시 이곳은 숲이 칙칙하게 우거져 “숲머리” 혹은 “숲정이”라고도 했다.
순교자의 피가 이 땅을 처음 적신 것은 1801년(신유박해)이었다.
그해 12월 28일 전라도의 첫 사도인 유항검의 가족 중 그의 처 신희⦁
제수 이육희 ⦁ 맏며느리 이순이(루갈다, 20세 )⦁ 조카 유중성(마테오)⦁ 등이
순교했다. 1839년(기해박해) 5월 29일에는 13년 동안 옥고를 치른
신태보(베드로, 70세) ⦁ 이대권(베드로, 58세) ⦁ 이일언(욥, 73세)
정태봉(바오로, 44세) ⦁ 김대궈(베드로) 등 5명이 하느님께 열렬한 감사를
드리며 순교했다. 1866년(병인박해) 12월 13일에는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에
살던 정문호(바르톨로메오, 66세) ⦁ 손선지(베드로, 47세) ⦁ 한재권(요셉, 38세)
그리고 소양면 싱지동에 조화서(베드로, 52세) ⦁ 이명서(베드로 46세) ⦁
정원지(베드로, 21세) 등 6명이 순교했다.
이들 6명은 1968년 10월 6일 복자품에, 그리고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올랐다.
1867년에는 김사집(필립보) 외 수명이 순교했다.
1960년 전주교구는 이 순교성지에 해성 중 ⦁ 고등학교를 설립했으며 1992년 8월
해성 중 ⦁ 고등학교가 삼천동으로 이전된 후 순교자 성 조윤호(요셉)를
기리는 “윤호관”과 함께 이곳 성지가 보존되고 있다.
하나라도 빠트릴까봐 열심입니다.
밑줄 쫘악~~
여러 박해의 표지석.
지금은 아파트와 주택에 둘러 쌓인 숲정이 잔디 광장의 주변 모습.
* 치명자산 성지.
이 산은 예부터 승암산(중바위산)이라 불렸는데 산정에 천주교 순교자들이
묻힌 이후로는 치명자산 혹은 루갈다산으로 더 많이 불려지고 있다.
이 산에는 1784(정조 8년)년 호남에 처음 복음을 전하고 선교사 영입과
서양 선진 문화 수용을 하다가 국사범으로 처형된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그의 처 신희, 동정부부로 순교한 큰 아들 유중철(요한)과
며느리 이순이(루갈다) ⦁ 둘째아들 유문철(요한) ⦁ 제수 이육희 ⦁
조카 유중성(마태오)일곱분이 하나의 유택에 모셔져 있다.
이분들은 1801년(순조1년) 신유박해 때, 9월부터 4개월 여에 걸쳐
전주 남문밖(현 전동선당), 전주옥, 숲정이에서 처형되어 멸족되었다.
살아남은 노복과 친지들이 은밀하게 시체를 거두었으나
고향인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땅에 묻히지 못하고 들 건너
재남리 바위백이에 가매장 되었다.
그후 1914년 4월 19일 전동성당 보두네 신부와 신도들이 이 산정에 모셨다.
선인들이 해발 300미터의 산정에 순교자들을 모신 뜻은 세계교회가
‘진주 중의 진주’라고 찬탄하는 동정부부순교자의 순결한 신심과 고매한 덕행,
그리고 숭고한 순교정신을 높이 기리고
그 님들이 전주를 수호해 주기를 기원함이었다.
지방 기념물 제 68호로 지정된 순교자 묘 바로 밑에는 순교자들의
순교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4년 5월 9일 건립된 기념 성당이 있고,
그 아래 왼편에는 가파른 산길을 걸으며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십자가의 길이있다.
오른편에는 전주교구 성직자 묘지가 조성되어있다.
순교신앙을 가슴에 품고 있는 이산은 진리의 뜻을 세운 사람과
순교자들을 흠모하는 순례자들에게는 믿음의 고향이며,
기도공원으로 사랑받는 한국의 몽마르뜨(순교자산)이다.
몽마르뜨는 불란서 파리 북동쪽에 있는 표고 130m의 작은 언덕으로
순교의 언덕(mons martyrum)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파리의 초대 주교였던 성인 디오니시오가 이산에서 순교하여
순교자의 산」이란 뜻으로 「몽 데 마르뜨르」라고 불려 오다가
후에 몽마르뜨」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곳에는 1870년 독일과 교전으로 시련을 겪게 된 프랑스 국민들이
거국적으로 성금을 모아 건립(1910년)한 거대한 백악(白惡)의
아름다운 예수성심 대성당이 정상에 세워져 파리의 명소가 되었지만,
실은 유서깊은 천주교 순교성지요 파리를 지켜주는 축복인 언덕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치명자산」또한 「전주의 몽마르뜨」라 부르는 것이다.
- 치명자산성지에서 -
* 십자가의 길.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기도를 올립니다.
경사가 좀 가파르기는 하지만 각 처 간의 거리가 짧아
힘 들지 않게 14처 기도를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길 위쪽에서 친절히 안내하고 있는 이정표.
* 성당.
비교적 규모가 작은 아담하고 소박한 모습의 성당이지만
1994년 벼랑 바위를 깍아 만든 기념 성당이다.
내부의 벽화는 순교성인 가족의 모습을 그려 놓은 것이라 함.
교황님과 함께 한 총회장 부부의 다정한 모습.
순교자의 묘와 예수 마리아상 바위로 올라가는 계단.
곱게 물들어 가는 단풍과 함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 순교자의 묘.
유항검과 그의 가족 7인의 순교자 무덤(지방 기념물 제 68호).
이곳은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그 일가 7분의 순교자들이 함께
묻혀 계신 합장묘이다. 이분들은 모두 1801년(신유박해)에 순교하였다.
전북 완주군 이서면 초남리 출신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학식과
덕망이 높은 전주지방의 대부호였으며, 1784년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천주교회에 입교한 후 호남지방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는 1786년에 조직된 가성직자단의 일원으로서 신부로 임명되어 1년 정도
활약하다가 가성직제도의 부당성을 깨닫고 이를 시정하는데 공헌했다.
이후 신자들이 성사생활을 하기 위하여 하루 빨리 선교사를
모셔오는 것이 시급하다는 판단 아래, 이를 위해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도록 자신의 재산을 기쁜 마음으로 내놓았다.
그 결과 1795년 한국의 첫 선교사로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모시게 되었다.
유항검은 1801년 9월 17일 현재 전동성당 자리에서 순교하였으며,
당국에서는 그의 목을 전주 풍남문에 메어달아 놓고 성문을 출입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천주교를 믿지 않도록 경각심을 주었다.
그리고 유항검의 장남 유중철(요한, 22세)과 차남 유문철(요한, 18세)은
1801년 10월 9일 전주 옥에서 순교하였고,
같은 해 12월 28일 전주 숲정이에서는 유항검의 처 신 희 ⦁ 제수 이육희 ⦁
맏며느리 이순이(루갈다 19세) 그리고 조카 유중성(마테오)이 순교하였다.
특히 이순이(루갈다)와 유중철(요한)은 세계교회사에서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동정부부 순교자로서
“한국 순교사에서 가장 빛나는 진주”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이들은 각각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기 위하여
평생 동정생활을 결심했고 이 사실을 주문모 신부에게 알려드렸다.
주문모 신부는 당시 성년이 된 남녀가 일생을 동정으로 사는 것을
죄악시했던 유교사회의 지탄을 피하면서 동정생활을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결혼이라는 형식을 빌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들의 결혼을 주선했다. 1797년 당시 15세였던 이순이는
18세인 유중철과 결혼식을 올리고 전주 초남이에서
남매처럼 4년 동안 함께 살면서 효성을 다하여 분모를 섬겼으며
형제들과 우애하면서 모범적인 생활을 했다.
일곱 순교자들이 처형되자 교우들이 유항검의 고향 초남리와 인접한
제남리에 이들을 가매장 하였고 1914년 4월 19일 전주 정동성당
보두네 신부와 신자들이 이곳에 안장했다.
전주시가 내려다보이는 이 산위에 이분들을 모신 것은
이분들의 높은 정신을 기리고 이곳을 참배하는 이들이 산을 오르면서
느끼는 어려움을 통해서나마 순교자들께서 가신 길을
체험하게 하려는데 그 취지가 있다.
바위로 이루어진 산 정상에 오르면 전주 시내가
마치 한폭의 그림처럼 한 눈에 들어옵니다.
* 십자가와 예수마리아상 바위.
순교자의 묘 위에 십자가와 있는 천연 기암은
전면은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후면은 성모님의 모습.
사진의 위가 성모님 모습이고 아래가 예수님의 모습이라는데
현재는 많이 훼손이 되어 선뜻 알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 전동성당.
전동성당은 사적 제28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889년 봄, 전동성당
초대 신부로 파리외방전교회 보두네 신부가 임명되고 본당이 설립되었으나
전주는 당시 개항지가 아니었고 전주 감영이 위치하고 있어
보두네신부는 전주에 곧바로 들어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전주 근교인 대성리에 머물면서 전교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후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치명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한지 100주년이 되던 1891년 봄에야 현재의 자리에
본당의 터전을 마련하고 전교를 시작하여 호남의 모태 본당이 되었다.
- 전동성당 소개에서 -
* 뒷풀이 겸 저녁식사.
맛 있는 오리고기에 곡차를 곁들여 오늘 하루의 피로를 날려보냅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순례를 통해
순교성인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체험한 시간들이
더 깊고 두터운 신앙을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큰 영적 은혜를 주시고
또 무탈하게 일정을 소화할 수 있도록
돌보아주신 주님께 찬미와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치명자산 성지순례의. 장문의 기행문을 상세히 설명하셨습니다~ 스쳐 지나간 내용까지 올려주시어. 고마움을 전하며 함께한 시간들이 행복하였습니다!
준비하시고 마련해 주심에 감사드리며
수분 흡수가 잘 되는 부드러운 타월...고맙습니다^^
권기창(즈카리아)형제님! 너무나 상세한 설명과 사진촬영에 감사드립니다.
순교 성인들은 희생을 택했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증거했고 모든것을 다 버리고
오직 신앙만을 택한 장소 그곳이였습니다. 우리는 순교자의 삶을 살기위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이웃과 늘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바로 순교의 삶이
라고 생각합니다.
신부님께서 주신 말씀 하나 담아 왔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주님께 봉헌할 것을 구체적으로 정하고 실천하라~!
마련해 주신 일정에 감사드리며
김밥...굿이었습니다^^
일상을 툴툴 털어버리고 떠나 새로운 만남을 주시고 제자리로 돌아오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시작부터 마침까지 멋진 그림곁들여 술술 풀어 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다시 한번 더 순례를 다녀와 새기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신부님 말씀에 귀기울이고 밑줄까지 쫘~악 그으며 질문하시는 모습들...감동이었습니다.
밥묵꼬 쪼매 쉬다가...호호~ 동영상 하나 만들어보겠습니다. (밥값을 해야겠기에~ㅎ)
그리고...
사전준비에 맛깔스런 간식까지 풍성하게 마련해 주신 분들...감사드립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고 바람이 차가워지는 가을의 끝자락에서
건강챙기시고 더욱 기쁨과 행복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순례의 길을 동영상으로 보면 더욱 실감이 날듯 합니다 ! 기대해보렵니다 ! 늘 고움으로 챙겨주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
@웰빙 권즈가리아 형제님께서는...
글재주는 예전에 4대신부님 계실 적에 "나눔"지에서 익히 알았구요.
스마트폰이 어느 나라산인지 궁금합니다.
동영상은 저작권을 가지신 형제님께서 허락하셔야 될 것 같구요.
사진이 두세개씩 묶여져 있어서 조금은 힘이 듭니다.
늘 고움...ㅎ
요렇게 살아낼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늘고움 백수가 과로사 한다고 그사이 쓸데없이 바빴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컴이 고장이나 이제 답글을 답니다.
함께한 행사인데 저작권이 어디 있겠습니다.
동영상을 만드신다니 고마울뿐이지요 기대가 됩니다.
사진이 여러 개가 묶여 있어 힘드시지요?
많은 사진을 올리려다 보니 그렇게 하였습니다.
스마트폰은 구형인 겔럭시 SⅡ입니다.
@영숙 한집에 사는 백수도 눈코 뜰새없이 바빠 주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게 해 주십시요~"
저도 남편에게 물려받은 구형 갤럭시인데요
확실히 재주없는 이가 연장 나무라는가 봅니다.
알고보니 기술의 차이였군요. ㅎ~
묶여진 사진으로는 동영상 만들기가 어렵사옵니다.
혹 보내주시면 여유있는 날에
사도회 회장님의 뜻을 받들어 만들어 볼까 합니다.
차가워지는 날씨에 건강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늘고움 백수가 과로사하는 일은 없어야겠지요.ㅋㅋㅋ
소중한 사진 그리고 자상한 설명
생생하고 직접 갔다온 느낌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