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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5일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요한 17,11ㄷ-19
가장 완전한 기쁨은 무엇인가?
우리는 기쁨을 언제 느낄까요? 제가 가장 큰 기쁨을 느꼈을 때는 아마도 대학에 합격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옆집 친구는 대학에 합격했는데, 저는 발표가 하루 이틀 늦었습니다.
이때 걱정되는 것은 내가 떨어졌을 때 어머니가 옆집 어머니의 기쁨 때문에 슬퍼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기쁨은 나 때문보다는 나를 사랑하시고 나에게 많은 희생을 한 이를 기쁘게 해 드릴 때 가장 기쁜 것 같습니다.
나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 기쁨이 자꾸 줄어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압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전기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전기가 들어와 TV를 제대로 보고 학교에서 아이들과 말이 통하는 게 소원이었지만, 이제 전기가 들어온 기쁨은 사라지고 컬러 TV를 보고 싶다는 소원이 생깁니다.
연봉 100억이 넘는 정승제 강사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수업 중에 “강남 아파트에 살면 행복할 거 같아?”라고 묻습니다.
한강 경치가 보이는 수십억짜리 아파트를 처음 볼 때 기뻤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시금으로 아파트값을 낼 때, 딱 그렇게 이틀 좋았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기쁨은 조금씩 사라지고 다른 걱정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나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은 그것 때문에 나를 노예로 만들 뿐입니다.
하지만 내가 그런 아파트에 사는 것을 보는 부모님의 기쁨 때문에 그 기쁨은 유지됩니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분에게 보답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인간 안에 양심이 넣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정의’입니다.
받았으면 갚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이 나를 사로잡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이 세상에 살며 죄를 용서받게 하시기 위해 아드님을 죽이신 바로 그 부담감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부담스러우셨습니다.
아버지께 성령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모든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셨으면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드님이 교회라는 자녀를 탄생시키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교회를 탄생시키고 아버지께 가시는 예수님은 기쁩니다.
아기를 낳아 남편에게 보여주려는 마음, 혹은 자녀를 낳아 부모님께 보여드리는 마음과 같습니다.
그 마음은 ‘당신이 저를 낳아 키우신 일이 헛되지 않았습니다!’라고 보답하는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앞에 나올 때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당신이 줄 축복을 양심상 감당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사우디에서 땀 흘려 몇 년 동안 번 돈을 제비에게 다 날려버렸다면 몇 년 만에 김포공항으로 오는 남편을 맞으러 나갈 용기가
있을까요? 그때 많은 아내들이 집을 나가거나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선교하여 자녀를 낳지 않으면 그렇게 지옥으로 스스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제로 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저냥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나를 사제로 세워주신 주님의 은총에 심판받아야 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한 영혼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편히 쉬는 것보다 이것이 더 큰 기쁨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기쁨이 우리 안에도 함께 하려면 예수님께서 기쁨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하셨는지 배워야 합니다.
우리도 언젠가 야곱에 에사우를 만나러 가는
상황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때면 정말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자녀를 낳고 기르는 삶을 살지 않았다면 우리 스스로 그분을 만날 용기를 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 기쁨인 하느님 자녀를 낳는 일을 게을리하지 맙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15일 [부활 제7주간 수요일]
복음: 요한 17,11-19
예수님께서 친히 죄인인 우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신다는 것,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승천하시기 전 예수님께서는 남겨지는 제자들과 오늘 우리를 향해 감동적인 고별사를 발표하셨습니다.
꽤 장문의 고별사입니다.
세상으로 치면 이임사(離任辭) 비슷합니다.
그간 수행했던 직무를 내려놓고 떠나며 하는 말입니다.
장관들이나 총장들의 이임사를 많이 들어봤습니다.
대체로 아쉬움이 가득합니다. 맡겨진 직무를 보다 멋지게 완수하지 못했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송구함도 표현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별사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맡겨주신 인류 구원 사업을 120퍼센트 훌륭하게 수행하셨기에
일말의 아쉬움도 없습니다.
당신이 떠나가면 그 자리를 대체할 보호자 성령을 생각하니 걱정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이룬 성취감과 만족감,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지상에 남게 될 제자들과 우리를 향한 위로와 격려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조만간 다시 하느님 아버지 안에 재회할 그 날을 기억하고 힘과 용기를 내라고 초대합니다.
장엄한 고별사에 이어 오늘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우리를 향해 고별 기도를 바치십니다.
우리 머리 위에 당신의 두 팔을 펼치신 후 하늘을 향해 눈을 드시고 기도하시는데, 한 구절 한 구절이 너무나 은혜롭습니다.
만물의 창조주요 인류의 구세주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보잘 것 없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신다는 것,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감사의 정이 흘러넘칩니다.
오늘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마음에 담고 감사와 기쁨 속에 남아있는 우리의 여정을
힘차게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들을 악에서 지켜주십시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7주간 수요일 강론>
(2024. 5. 15. 수)(요한 17,11ㄷ-19)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ㄷ).”
“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주십사고 빕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3-19).”
1) 13절의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이라는 말씀은, “제가 이런 식으로
기도를 하는 이유는”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기도를 바치면서 제자들이 들을 수 있도록 일부러 소리를 내서 기도를 하십니다.
<사실상 제자들 들으라고 하시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의 기도는, 아버지께 바치는 기도이면서 동시에 제자들에게 하시는 당부 말씀입니다.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기도를(말씀을) 듣고서 더욱 큰 용기와 힘을 얻고 영원한 기쁨을 향해 나아가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2) 11절의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라는 말씀을, “이들도 우리와 함께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의 일치는, 신앙인들끼리만 똘똘 뭉친 배타적인 단합이 아니라, 아버지와 예수님의 완전한 일치에 참여하는 일인데, 그 참여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선교활동은 그 일치에 함께 참여하자고 세상 사람들을 초대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이고,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는 하느님의 권능과 사랑으로 제자들을(신앙인들을) 보호해 달라고 청하는 기도입니다.
동시에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일치를 이루기를 바란다고 당부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13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여기서 ‘사랑’은 신앙인들끼리만 뭉치는 사랑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고, 바로 그 사랑이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그 사랑이 없는 일치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범죄조직도 자기들끼리는 단합을 잘하는데,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 없이 자기들끼리만 뭉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일치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일치도 중요하지만,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3) 17절의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라는 말씀은, “이들이 진리를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라는 뜻이기도 하고, “이들을 진리로 무장(武裝)시켜 주십시오.” 라는 뜻이기도 하고, 진리로 무장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날에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든 채비를 마치고서 그들에게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십시오.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늘 성령 안에서 온갖 기도와 간구를 올려 간청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내를 다하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며 깨어 있으십시오(에페 6,10-18).”
바오로 사도의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라는 말과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느님의 말씀, 아버지의 말씀’은 ‘구원의 진리’, 또는 ‘계시 진리’ 전체를 가리킵니다.
<성경 말씀뿐만 아니라, 신앙 교리도 포함되고,
인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과 의지’도 포함됩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 무장을 해야만 ‘악’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고,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킬 수 있고,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간단하게 줄여서 표현하면, “신앙인으로서, 신앙인답게 정신 무장을 단단히 해야 한다.”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는 않지만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고,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은, 대충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해야 하고, 온갖 정성과 온 힘을 다 쏟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세속 일에 전력을 다하는 것보다
더 열성적으로, 더 강하게, 더 뜨겁게 전력을 다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고, 선교활동을 해야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