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 7일에 있었던 일본의 진주만(眞珠灣, Pearl Harbor)급습(急襲)은 그동안 개념 검토 단계(槪念檢討段階)에 불과(不過)했던 핵폭탄(核爆彈)의 탄생(誕生)을 이끈 직접적(直接的)인 도화선(導火線)이 되었습니다.
약 한달 후인 1942년 1월 19일, 루즈벨트가 과학기술청장(科學技術廳長)인 부시(Varnevar Bush)에게 서한(書翰)을 보내면서 연구(硏究)가 시작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였습니다.
무기 관련 분야(武器關聯分野)다 보니 곧바로 본부기능(本部技能)이 그로브스(Leslie Groves) 소장(小將)이 지휘(指揮)하는 육군 공병대(陸軍工兵隊)로 이전(移轉)되었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끈 레슬리 그로브스
민관군(民官軍) 모두가 참여(參與)하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효율적(效率的)으로 그리고 빨리 이끌기 위해 육군 공병대는 다양(多樣)한 방법(方法)을 동원(動員)했습니다.
아무래도 생소(生疏)한 분야여서 실패 가능성(失敗可能性)이 높았고 그만큼 시행착오(試行錯誤)는 필연적(必然的)이었으므로 이로 인해 발생(發生)하는 시간(時間)을 절약(節約)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동일(同一)한 연구를 여러 기관(技官)에 지시(指示)했습니다.
중복 투자(重複投資)로 인해 비용(費用)이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지만, 미국의 의지(意志)는 확고(確固)했습니다.
↑미국 각지에 산재한 맨해튼 프로젝트 시설
워낙 참여 인력(參與人力)이 많고 시설(施設)이 미국 전역(全域)은 물론 영국과 캐나다에도 산재(散材)하여 완벽(完璧)한 보안(保安)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육군 공병대는 연구기관들이 오로지 본부의 지시만 받게끔 하여 다른 기관의 존재나 연구를 알 수 없도록 조치(調治)했습니다.
이렇게 여러 곳에서 연구된 결과(決科)를 토대(土臺)로 핵폭탄 제조 시설(製造施設)이 1943년 3월 뉴멕시코의 로스알라모스(Los Alamos)에 세워졌고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 1904.4.22.~1967.2.18.)가 소장(所長)으로 임명(任命)되었습니다.
↑로스알라모스에서 핵폭탄 제조를 진두 지휘한 오펜하이머
그리고 1945년 7월에 우라늄-235로 만들어진 1개의 ‘꼬마(Little Boy)’와 플루토늄으로 제작한 2개의 ‘뚱보(Fat Man)’가 세상에 모습을 보였습니다.
미국과 영국 집권자(執權者)들의 별명(別名)으로 명명(命名)된 볼품없는 이들이 바로 인류 최초(人類最初)의 핵(核)폭탄이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핵실험(實驗)을 위해 7월 16일 알라모고도(Alamogordo) 공군기지(空軍基地) 부근에 미리 설치(設置)된 실험대(實驗臺)에 가젯(Gadget)으로 명명된 뚱보가 놓였습니다.
↑우라늄-235로 제작된 ‘꼬마(Little Boy)'
이 거대(巨大)한 프로젝트에 관여(關與)한 많은 이들이 역사적(歷史的)인 광경(光景)을 지켜보려고 폭탄 설치 장소(爆彈設置場所)로부터 8km 정도 떨어진 관측(觀測) 장소에 집결(集結)했습니다.
지금 기준(基準)으로 본다면 말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距離)였지만 이 또한 폭심(爆心)에서 불과 3km 떨어진 지하(地下) 벙커(bunker)에서 실험(實驗)을 진두 지휘(陣頭指揮)한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 1904.4.22.~1967.2.18.)에 비하면 양호(良好)한 편이었습니다.
이론상(異論上)으로는 예상(豫想)했지만 폭발(暴發)의 규모(規模)가 실제(實際)로 어느 정도가 될지 몰라 그들은 내기를 걸었습니다.
↑폭발 실험은 위해 가젯을 설치하는 모습
마침내 오전 5시 29분 35초에 운명(運命)의 카운트다운이 시작(始作)되었고 약 10초가 지나자 강렬(强烈)한 섬광(閃光)과 함께 뜨거운 열풍(熱風)이 몰아쳤습니다.
그들은 12km 상공(上空)까지 솟아오른 거대한 버섯구름을 목도(目睹)했습니다. 18,000톤에 달하는 TNT가 일시에 터진 것과 맞먹는 규모(規模)로, 그때까지 인공적(人工的)으로 만들어낸 최대(最大)의 폭발(爆發)이었습니다. 한 참석자(參席者)는 '땅 위에서 태양(太陽)을 목격(目擊)하는 순간(瞬間)이었다'고 기술(記述)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두려움에 몸서리쳤습니다.
↑최초의 핵폭탄 폭발 순간을 담은 사진
이제 이 무시무시한 핵(核)폭탄의 실전 투입(實戰投入)은 순전히 위정자(爲政者)의 의지(意志)에 달린 정치적(政治的)인 문제(問題)가 되었습니다.
실험 결과(實驗決科)는 종전(終戰) 이후 세계 질서 재편(世界秩序再編)을 위한 회담(會談)에 참석(參席)하기 위해 베를린(Berlin) 인근(隣近)의 포츠담(Potsdam)에 있던 트루먼(Harry S. Truman, 1884년 5월 8일~1972년 12월 26일)에게 보고(報告)되었고 처칠(Sir Winston Leonard Spencer-Churchill, 1874년 11월 30일~1965년 1월 24일)과 스탈린(Joseph Stalin, Ioseb Besarionis dze Jughashvili, 1879. 12. 18.~1953. 3. 5.)에게도 알려졌습니다.
이들은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無條件降伏)을 요구(要求)했고 만일 따르지 않으면 엄청난 보복(報復)이 있을 것임을 암시(暗示)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협박(脅迫)이 아니 최후(最後)의 의지(意志)였습니다.
↑미국의 경고를 무시한 일본은 비참한 결과를 마주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전 국민(國民)을 옥쇄(玉碎)시켜 싸우겠다고 반응(反應)했습니다.
지난 4월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의 극렬(極烈)한 저항(抵抗)으로 무려 6만여 명의 전사상자(戰死傷者)가 발생(發生)했던 미국은 일본 본토 침공(日本本土侵攻) 시 예상(豫想)되는 피해 규모(被害規模)에 고심(苦心)이 많던 상황(狀況)이었습니다.
트루먼은 일본의 대답(對答)을 듣고 이 무서운 무기의 사용을 결심(決心)했습니다.
마침내 8월 6일, 히로시마에, 8월 9일, 나가사키에 불기둥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렇게 전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