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임시정부최초청사는 보창로 329호이다.
상해임시정부 제1회 의정원회의록의 장소는 김신부로이다. 즉, 문헌상의 임시정부최초청사가 김신부인 것이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김신부로가
과연 어디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부족하다.
학계는 이현희 교수(성신여대)가 연구한 자료를 인용하고 있었다. 현순목사의 숙소가 김신부로22호였다는 일본경찰청 자료를 인용하여
김신부로22호, 또는 지명 변천의 과정에서 서금2로, 서금2로22호 등으로 사용된 것으로 표기하고 있다. 잘못 연구된 내용이며,일부서적이나 인터넷 자료에서 지금까지 인용하고 있다.
필자는 “상해임시정부최초청사의 위치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나의 주장을 앞세우기 보다 다양한 학자의 의견을 찾아 확인하고자
했다.
독립운동가 장이욱(1895~1983, 외교관, 서울대총장)의 “위대한 한국인 도산 안창호” 저서에 보창로 329호에서 의정원
조직과 국호, 관제 및 임시헌장을 제정하였다고 한다.
학계에서 조선민족운동연감과
한`일관계사료집4권의 속의 기록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 1919년 7월 8일
국무회의 결의로 사료편찬위원회를 조직하여 한일관계사료집(1~4권)을
집필하게 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조선민족운동연감, 한`일사료집4권 속의
내용이 저술되는 과정을 여과없이 인용하고 있다. 일본경찰의 문헌, 사료편찬위원회가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앞뒤의 경위를 살피지 못하고 있어 상해임시정부수립기념일이 4월 13일자로 알고 자문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상해임시정부 임시헌장, 임시헌법, 건국강령등에 원년 4월 11일에 발포(선포)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권 임시의정원 해제는 임시의정원은 1919년 4월 10일 저녁 10시에 처음 소집되었다. 회의 장소는 中華民國 上海 法租界 金神父路에 위치한 2층 양옥이었다
라 고 설명되고 있다. 김신부로에 위치한 집을 설명하고 있다. 즉, 김신부로에 있는 다른 집을 설명하고 있다.
학계에서 많이 인용하는 자료는
국제연맹제출 한`일관계사료집 4권, 일본외무성 육해군성문서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 김정명 명치백년사업서 조선독립운동2.민족주의운동편,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3. 박은식 저 한국독립운동지혈사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4권, 김형식 저 일제 김병조의 민족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문서 등이
참고 문헌이고 기타는 현순목사의 자사, 이광수의 도산 안창호, 기미년과
나 등 저술서이다.
공통적인 장소에 대한 표현으로서, 3월 하순에 보창로 329호에 독립입시사무소를 설치하여 임시정부를
설립을 협의하였고, 4월 10일 의정원을 조직하여 11일 국호와 관제, 정부 관원 및 임시헌장을 제정하여 선포했다는
내용이다.
제1회 임시정부(의정원) 회의록의
장소 김신부로가 보창로 329호인가의 의문점을 갖게 된다.
1) 현순목사의 자사는 사료편찬위원회에 참여했던 사람이며, 3월 26일 밤, 불령 보창로 모처에 각방 인사들이(연해주, 북경, 상해등) 모여 상해기관설치안을 통과시키고, 기타 안건은 분분했다.
두번째는 보창로 모처에서
이상의 인사외 다수 청년들과 협동하여 우선 의정원을 조직하고 원장으로 이동령이 당선되었으며, 임시정부는
통령제를 피하고 총리제를 채용 하기로 했다.
3차 회의를 불령 김신부로 부근 큰 양옥 한 채를 새로 얻어 임시의정원을 개최했다. 필자) 3차 회의는 4월 17일 조계 하비로460에
임시정부가 직무를 시작 하던 장소를 말하며, 불란서 총영사관 공식발표와 임시정부간판은 불허 했다는 기록이
있다.
2) 이광수의 “기미년과 나” 저서 “나는 신한청년 사람들과 의논하고 불조계 하비로(보창로)에 중국 집 한 채를 얻어서 사무실을 차려 놓았다. 타이프라이터도
하나 장만하고 등사판을 하나 구하였다. (생략). 재외 동포에게
기별을 하고 평화회의와 중국`영`미 각 신문에 선전을 하자는
것이다. 필자) 임정수립이후 4월 17일 임시정부(하비로460)에서 인쇄 편찬 사업을 한 것 같다.
3) 신한민보(1942년 4월 16일) “임시의정원
성립 23주년 기념전예” 은 “거금 23년전 1919년 3월 28일 한국 각도 선출 의원은 상해 법조계 보강리에서 한국임시의정원을 설립을 협의 하였고, 4월 10일 보강리에서 임시의정원을 정식 성립하였다.
4) 해외사료총서 5권, 일본외무성외교사료
상해방면 정보(4.29) 대한민국임시정부성립 과정에 불조계 보창로
329호는 3월 하순 장안로267 민단사무소
곽윤수 명의로 임차되어 있다. 대한민국임시위원의장 이동령, 임시정부활동
기록이다.
5) 중국보도기사(1920년) 도산
안창호가 필리핀을 방문하며 활동기록에 한국 중요 지도자 30여명은 상해에 모여 프랑스 조계 보창로에
한국임시정부를 설립하고, 아울러 각 지방의 대표들로 임시의정원을 조직하였다고 하였다.
6) 한민족독립운동사 7권 “대한민국임시정부” 에서는 상해 프랑스 보창로 329호에서
1919년 4월 11일 각도 대의원 30명이 회합하여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반포한 임시헌장 10개조는
다음과 같다 (이하 생략)
앞의 설명과 같이 임시정부
관련 자료는 상해임시정부의정원문서 외의 자료는 일본 경찰의 연보 기록인 조선민족운동연감, 한`일관계사료집 또는 사료편찬위원회에 참여한 분의 저서와 편찬물이다. 저서의
대부분 내용이 한`일관계사료집을 인용하거나 참여 과정에서 보고 느낀 점을 기술하다 보니 내용과 일자가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을 앞뒤의 정황을 생각하고 해석이 필요한 부분이다.
간혹 저자의 글을 단편적인
판단으로 자기 주장을 하고 있는데 문제가 발생한다. 임시정부 참여 요인의 글이라고 해서 모든 내용이
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날짜와 내용이 다르게 기록되거나 착각으로 사실관계가 다르게 되어 있다.
그러나 앞의 1)현순목사의 자사의 3월 26일
하순에 보창로 모처에 모여 협의를 하였으며, 2차 모임은 보창로 모처에서 의정원 조직하고 원장으로 이동령이
당선되었으며 임시정부는 통령제를 피하고 총리제를 채용하기로 했다. 또한 학계에서는 보창로 모처는 보창로329호를 말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앞의 3) 신한민보의 3월 하순 보경리와
4월 10일 보경리는 동일 장소이다. 현순목사의 1차와 2차의 보창로 모처는 보강리와 동일 장소이다. 손병희 선생의 쉬시모집운(신한민보 1921.4,7)이라는 공고문에 통신연락처가 상해 법조계 보창로보강리. 또는
김병덕의 주소는 상해 불조계 보창로보강리라 표기하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경찰의 자료, 임시정부요인의 저서 및 자사 등에서 3월 하순의 독립운동사무소는
보창로 329호임을 확인하였다. 신한민보의 보강리 기사와
한민족운동사의 기록 보창로는 동일 장소임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제1회
임시정부의정원 회의록의 장소는 보창로 329호이다.
대한민국상해임시정부 최초청사의
장소는 상해 불조계 보창로 329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