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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30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마태오 4,18-22
사람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죽을 때 밝혀진다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성 안드레아는 서기 60년경 그리스 파트라스에서
엑스(X) 십자가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힐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통적인 십자가 대신에 X자 모양의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이 십자가는 ‘성 안드레아의 십자가’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순교 기록에 따르면 그는 못 박히지 않고 십자가에 묶여 며칠 동안 매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이 기간에 그는 주변에 모인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전파했습니다.
그러한 극한 상황에서도 그가 인내하고 계속해서 전파한 것은 그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헌신의 증거로 여겨집니다.
성 안드레아는 마치 다리와 같은 중간 역할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사도가 되어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하였습니다.
그리고 5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하실 때는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를 예수님께 인도하였습니다.
이를 한마디로 하면 ‘선교’라 할 수 있습니다.
선교는 자신 깊숙이 있는 하느님의 존재를 꺼내 보여 주어 그도 그분과 친교를 맺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꺼내주는 방식은 나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십자가의 죽음으로 아버지를 우리에게 소개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아버지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볼 수 있었습니다.
영화 ‘히치’(2005)에서 윌 스미스는 뉴욕시의 전문 데이트 컨설턴트인 알렉스 히치의 역을
맡았습니다.
히치는 남성이 관심 있는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올바른 행동을 하도록 돕는 전문가입니다.
그의 최근 고객은 앨버트로 유명인 알레그라에 반했습니다.
앨버트를 돕는 동안 히치는 가십 칼럼니스트 사라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알렉스는 전문가답게 사라를 꼬시고 사라는 쉽게 넘어옵니다.
그런데 사라는 자신의 칼럼에 쓰기 위해 신비한 데이트 컨설턴트를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앨버트는 히치의 조언으로 불가능할 것 같았던 알레그라와 데이트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자신이 사귀게 된 히치가 여자 꼬시는 법을 알려주는 사람인 것을 알고는 크게 분노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알레그라의 귀에도 들어가 알렉스가 그 사람의 코치를 받고 자기에게 접근한 것을 알게 됩니다.
졸지에 알렉스와 앨버트는 여자들에게 차입니다.
앨버트는 이제 다음 단계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렉스에게 묻습니다.
자신의 진심을 믿어주지 않는 사라에게 화가 잔뜩 난 알렉스는 이제 끝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에 진심이었던 앨버트는 알렉스에게 결국엔 기술만 가르쳤지 진짜 사랑을 모르는 겁쟁이라고 말하고 알레그라를 찾아갑니다.
앨버트의 진심에 감동한 알렉스도 사라를 찾아가 용서를 청하고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러자 두 여자는 두 남자의 진심을 받아주어 두 커플이 동시에 결혼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알렉스는 사랑을 이뤄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리가 되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어야 할 때 그에게서는 자존심이 나왔지, 사랑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든 죽어갈 때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마음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기술이 아닙니다.
자신 안에 간직한 보석입니다.
보석함이 썩거나 불에 타면 무엇이 나올까요? 보석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죽을 때에도 주님을 보여 주고 전할 수 있다면 그분이 나의 보석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가치를 아는 이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그러니 성 안드레아처럼 죽을 때에도 주님을 전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평생 무엇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고 살아왔는지가 증명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30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마태오 4,18-22
고기보다 사람을 낚읍시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저를 불러주셨는데, 바닷가에 산다는 핑계로 너무 사람보다 고기를 더 많이 낚아 송구한 마음이 드는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원래 안드레아는 형 시몬과 함께 갈릴래아 호수를 배경으로 고기잡이를 하며 생계를 꾸려가던
전문직 어부였습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여느 여부와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보통 어부들의 삶은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물때가 좋고 운이 좋아 고기가 많이 잡히면 그것을 팔아 한 며칠 신나게 놀기도 했겠지요.
안개라도 자욱이 끼여 조업이 불가능한 날은 삼삼오오 둘러앉아 술로 하루를 지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지도자들 안주삼아 독주도 많이 마셨습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내면은 영적생활을 향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의 피 안에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 모세와 다윗의 전통과 신앙이 힘차게 맴돌고 있었습니다.
그의 시선은 임박한 메시아의 도래에 초점이 맞춰져있었습니다.
안드레아는 자신의 신앙을 좀 더 성숙시켜나가려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영적생활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려는 의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런 안드레아 앞에 나타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입니다.
안드레아는 깊은 광야에서 자신의 내면을 열심히 갈고 닦던 세례자 요한의 모습에서 참 구도자로서의 모델을 찾았습니다.
안드레아는 세상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그릇된 권력 앞에 혈혈단신으로 당당히 맞서던 세례자 요한을 자신의 정신적 지주, 멘토로 삼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때가 지나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가 도래하자 세례자 요한은
안드레아를 예수님께로 안내합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본 세례자 요한은 지체 없이 안드레아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는 이제 나의 때가 지나가고 예수님의 때가 도래했으니 저분을 따라가라는 표현이었습니다.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고 지체 없이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지도에 힘입어 영적인 눈이 이미 많이 트여있었던 안드레아는 즉시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확신합니다.
한 걸음에 자기 형 시몬을 찾아간 안드레아는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이름 안드레아의 의미는 ‘사내다움’ 혹은 ‘용기’입니다.
용기 있게 세례자 요한을 스승으로 모셨던 안드레아, 사내답게 예수님을 따라나선 안드레아는 형 시몬과는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단순하고, 과격하고, 급하고, 다혈질적이었던 형 시몬에 비해 안드레아는 성실하고 온건하며
신중한 성격의 인물이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안드레아는 그리스 북부 지방의 에피루스에서 선교하였습니다.
안드레아는 70년경 로마 황제 네로의 대대적인 박해 때 아카이아에서 체포되어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안드레아는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로 X자형 십자가를 선택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어로 X는
그리스도의 첫 글자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안드레아에 관해 정말 놀라운 이야기가 한 가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안드레아는 십자가에 매달린 이후 꽤 오랫동안 죽지 않고 매달려있었습니다.
이틀간 매달려있었는데, 그 순간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겠습니까?
그러나 안드레아는 십자가 위에서도 복음 선포 활동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십자가 주변에 둘러서있는 군중들을 향해 설교를 계속했답니다.
이를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던 적대자들은 안드레아를 십자가에서 끌어내렸는데, 그 순간 하늘에서 한 줄기 강한 빛이 안드레아를 오랫동안 감쌌답니다.
그 강렬한 빛 한 가운데 안드레아는 숨을 거두었다는군요.
임종하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사람 낚는 어부로 살고자 노력했던 안드레아, 그리스도의 향기였던 안드레아 사도의 삶과 신앙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 신앙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강론>
(2023. 11. 30. 목)(마태 4,18-22)
<무엇을 찾느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마태 4,18-22).”
“나를 따라오너라.”는 “나의 제자가 되어라.”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를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사도’로 삼겠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사람을 낚는다.” 라는 말은, “물속에서 물 밖으로 사람을 꺼낸다.”, 즉 “죽음 속에 있는 사람들을 건져내서 그들에게 생명을 준다.” 라는 뜻입니다.
<제자로 부르신 사람들의 직업이 어부였기 때문에, 그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우선 먼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야 하는데, 사도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이미 그분을 믿는 신앙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이며 사도가 될 사람들을
신앙인들 가운데에서 특별히 따로 뽑으셨고, 부르셨습니다.>
사도들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자기 자신을 낚는 일’이었습니다.
사도들 자신들이 ‘구원받은 상태’가 되어 있어야,
또는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어야’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활동 초기에 사도들을 가르치는 일에 집중하신 것은 그들을 훈련시키고 준비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들이 본격적으로 사도로서 일하기 시작한 때는 ‘모든 것’을 배운 뒤에, 또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을 체험하고 나서, 그리고 성령을 받은 다음부터입니다.
그 전까지는 훈련 기간, 또는 준비 기간이었습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됩니다.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훈련 기간과 준비 기간을 충분히 거쳐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야기할 때, 나는 여러분을 영적이 아니라 육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젖만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은 먹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지금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1코린 3,1-2).”
신앙생활 기간이 길다고 자동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 본인이 성숙해지려고 스스로 꾸준히 노력해야 합니다.
준비가 덜 된 사람이, 또는 교리 지식이 아직 부족한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무엇인가를 하려다가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오로 사도 자신의 경우를 보면,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곧바로 사도가 되어서 활동한 것이 아니라, 아라비아 사막에서 삼 년 동안 지낸 뒤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갈라 1,17).
<그는 그 삼 년 동안, 기도하고 묵상하고 교리 공부를 하면서 지냈을 것입니다.
즉 사도로서 일할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첫 제자들이 부르심을 받은 이야기’는 요한복음 1장에 있는 이야기와 합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그곳에 다시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요한 1,35-40).”
여기서 “무엇을 찾느냐?” 라는 말씀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도들이 이 질문에 직접 대답했다면, 그 대답은 “저희를 구원하실 메시아를 찾습니다.”,
또는 “구원을 찾습니다.”였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에게로 보낸 것은, 자신은 제자들이 원하는 ‘구원’을 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표현하면, 세례자 요한에게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을 떠나서 예수님에게로 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와서 보아라.” 라는 말씀과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라는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서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 전체를 보고 믿었음을 나타냅니다.
<물론 그날 밤에 함께 묵으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대화를 통해서, 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예수님이 자기들이 찾던 메시아라고 믿었을 텐데, 그래도 역시 직접 체험한 ‘예수님의 삶’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희망’은 누구에게나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무엇을 찾는가?(원하는가?)에 따라서 인생의 방향이 바뀝니다.
지금 우리는(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주시는 그것을 얻기를 정말로 희망하고 있는가?
희망한다면, 그것을 얻으려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고 있는가?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