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의 배반
<성주간 수요일>(2022. 4. 13. 수)
(마태 26,14-25)
유다는 왜 예수님을 배반했을까?
복음서에는 그가 배반한 사실만 기록되어 있고,
배반한 이유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선 유다의 ‘배반의 성격’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다가 배반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을까? 아닙니다.
그가 배반하기 전에, 또 그의 배반과 상관없이, 최고의회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했고(요한 11,53),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지명수배’를 했습니다(요한 11,57).
유다가 한 일은,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체포할 때 ‘길 안내’를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게 왜 그렇게 ‘큰 죄’인가?
예수님을 떠나서 박해자 편에 섰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모른다는 말을 세 번이나 했고,
다른 제자들은 달아나서 숨었는데,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한 것은
겁에 질려서 그랬던 것이고, 박해자 편에 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다가 한 일은,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병자가 한 일과 비슷합니다.
그 병자는 안식일 율법을 어긴 일로 처벌받는 것이 무서워서
예수님을 ‘밀고’했습니다(요한 5,15).
어쩌면 유다의 배반도 그런 일이었을 것입니다.
는 예수님에 대한 박해가 공동체 전체에 대한 박해로 확대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게 무서워서 박해자들 편에 섰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시는 것을 보고
자기 잘못을 뉘우쳤고, 자살해버렸습니다(마태 27,3-5).
그는 예수님이 사형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사형선고를 받으시는 것을 보고’ 라는 말의 원문은 ‘유죄판결을 받으시는 것을
보고’인데, ‘죄 없으신 분이 유죄판결을 받는 것을 보고’ 라는 뜻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죄 없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배반할 때에는 그런 생각을 안 하다가 나중에야 생각한 것일까?
알면서도 배반했을까?
아니면 자기의 행동을 배반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복음서에 아무런 설명이 없는 것은, 사도들도, 복음서 저자들도
유다의 속마음과 생각을 도저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마태 26,14-16).”
사제들이 유다에게 ‘은돈 서른 닢’을 준 일을 즈카르야서 11장 12절의 예언이
실현된 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인데,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유다가 배반의 대가로 받은 돈이 형편없이 적은 금액의 푼돈이라는 것입니다.
(그 돈은 아마도 예수님을 지명수배 할 때 내걸었던 현상금이었을 것입니다.)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라는 말은,
유다가 먼저 사제들에게 돈을 요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가 돈에 대한 탐욕이 많았던 사람이긴 해도(요한 12,6),
돈 때문에 배반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체포하기에 적당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 26,21-23)”
예수님께서 배반자의 이름을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배반자가 스스로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라는 제자들의 말은,
“나는 아니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혹시 내가?” 라는 불안감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유다를 제외하고, 다른 제자들은 자기가 예수님을 배반한 적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지만, 또 배반자가 될 생각이 전혀 없지만,
그래도 배반자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불안감 때문에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마태 26,35).” 라고 맹세했을 것입니다.>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라는 말은,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에게 제자들은 가족과 같은 사람들,
사실상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 가운데에서 배반자가 생겼다는 것은,
예수님에게는 큰 고통이었고, 큰 슬픔이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마태 26,24-25).”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당신의 길을 가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박해도, 배반자도 당신의 길을 막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이라는 말씀은,
배반자의 멸망을 예언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저주’가 아니라, 늦기 전에 회개하라는 호소입니다.
지금 유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배반이 그만큼 ‘큰 죄’ 라는 뜻이기도 하고, 나중에 배반자가 겪게 될
후회와 절망의 고통을 예고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라는 유다의 말은,
별 의미 없이 다른 제자들의 말을 흉내 낸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유다는 ‘스승님’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그가 이미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버렸음을 나타냅니다.
“네가 그렇게 말했다.” 라는 말씀은, “네가 배반자라는 것은
너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 송영진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