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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제와 문안
골 4:10-18
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11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12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13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언하노라
14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5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16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17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18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내가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골 4:10-18 / 나와 함께 감옥에 갇혀 있는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친척 마가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전에도 내가 당부한 대로 마가가 그곳으로 가거든 뜨거운 마음으로 환영해주십시오. 11) 예수 유스도도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여기서 나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유대인 동역하는 이 사람들뿐입니다. 이들은 내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12) 여러분의 동향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의 종 에바브라도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강하고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고 또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도와주시도록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13) 나는 그가 여러분을 위해서, 또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증언합니다. 14) 사랑하는 의사 누가가 여러분에게 문안하고 데마도 문안합니다. 15) 모쪼록 라오디게아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과 또 눔바와 그의 집에 예배드리러 모이는 사람들에게 문안해 주십시오. 16) 여러분이 이 편지를 다 읽고 난 후에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도 돌려보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로 보내는 내 편지도 여러분에게 돌아가거든 읽어 주십시오. 17) 아킵보에게 주께서 명령하신 것을 충실히 이행하라고 전해 주십시오. 18) 여기에 내 자필로 여러분에 대한 나의 인사를 대신합니다. 내가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빕니다.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전하는 바울의 마지막 인사말입니다.
골로새 교회에 문안하는 바울 일행(10-14) 바울은 함께 감옥에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인 마가와 유스도, 곧 유대인 동역자들의 안부를 골로새 교회에 전합니다. 이들은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으면서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수고했습니다. 특히 유대인 동역자들의 수고가 바울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또한 골로새교회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확신을 가지고 굳게 서기를 기도하는 에바브라와 사랑받는 의사 누가와 데마의 안부도 전합니다. 여기서 바울의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수고하는 자들을 향한 마음과 태도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문안하는 바울(15-17) 바울은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녀 집에 모이는 교회 성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또한 바울이 보낸 편지를 다 읽고 난 후, 라오디게아 교회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도 읽으라고 권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바울의 서신들은 여러 교회에 회람되었을 것입니다. 교회는 함께 진리를 알아 가고 교제하면서 한 몸을 이룹니다. 교회의 기초는 진리, 즉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이고(엡 2:20),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자 터입니다(딤전 3:15). 교회는 말씀으로 온전해집니다. 성도가 날마다 배우고 확신하며 그 안에 거할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해가며 모든 선한 일, 즉 구원을 이루어 가는 일을 경험하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직분을 잘 감당할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자신의 매임을 생각하라는 바울(18)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친필로 문안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골로새서가 대필된 것이기는 하지만 바울 자신의 서신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날마다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것은 십자가 복음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기억할 때 교회의 존재 목적과 교회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빌면서 편지를 마무리합니다.
적용: 바쁜 일정 중에도 공동체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의 처지를 돌아보는 여유를 갖습니까? 신뢰하고 배려하는 공동체, 서로를 돌아보는 공동체가 되도록 기도합니까? 당신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지체는 누구입니까?
우리나라에는 밭을 갈 때 황소와 암소 두 마리가 같은 멍에를 끌고 갔다고 합니다. 멍에를 메고 쟁기를 끌어 일을 한 것입니다. 멍에를 함께 짊어졌으므로 보조가 잘 맞아야 합니다. 한 마리가 다른 소보다 빨리 가거나 늦게 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멍에를 함께 짊어진다’ 는 말은 서로 균형을 잡아 서로 짐을 나누어진다는 것입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 2:4)
사랑받는 그리스도인
골 4:10-14 / 이중표 목사
성경에 기록된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인물들 중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도 있고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도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인물 중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참으로 훌륭하고 존경할만한 인물이 누가입니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학자입니다. 우리는 누가를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의 삶을 보면 참으로 위대한 그리스도인인 것을 보게 됩니다.
누가복음은 사복음서 중에서도 예수님의 생애와 행적을 가장 아름답게 쓴 전기입니다. 완전한 작품으로 세계 역사상 그만한 전기를 남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어떻게 성령의 능력을 받아 활동했는지를 기록한 책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행적과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했기 때문에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분야를 우리에게 남겨준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우리 머리속에 잘 기억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누가에 대한 평가를 사도 바울이 한마디로 표현했습니다.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
사람이 자기를 평가할 때 간단한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면 최고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자기의 생을 간단하게 역사에 한 마디로 남길 수 있는 일, 그것은 세상에 태어난 가장 큰 보람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 '사랑을 받는다'는 말을 헬라어로 'ajgaphto;"'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냥 인간적인 우정이나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외모가 아름답다든지 매력이 있어서 사랑하는 에로스적인 사랑도 있고, 자기 자식이라든지 가족들을 사랑하는 필리아적인 사랑도 있고, 하나님의 희생적인 헌신으로 받는 아가페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사도 바울은 누가를 가리켜 아가페적인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골로새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인데 이 편지에서 많은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아리스다고는 바울과 함께 감옥에 있으면서 바울을 도운 사람이고, 마가는 마가복음을 쓴 바나바의 생질이고, 유스도는 할례당 당원인데 이 사람들의 문안을 전하고 있습니다. '할례당'은 당시에 유대교인으로서 할례를 받으면서 예수를 믿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14절)
누가는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고 데마는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딤후 4:10)라고 했습니다. 이때는 같이 있었는데 나중에 이 세상 향락에 취해서 사도 바울 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누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누가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지만 성경을 통하여 몇 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안디옥이라는 말을 많이 쓴 것을 보니까 안디옥에서 출생한 헬라인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직업은 의사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는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드로아에서 바울을 만난 후 계속 바울과 함께 선교여행에 동참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의사니까 병원을 경영해서 돈을 벌어야 될텐데 그것을 포기하고 사도 바울을 개인적으로 동행하면서 주치의로 돌봐주었습니다. 그는 또한 사도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어 갈 때도 그 배에 함께 탑승해서 지중해에서 배가 파손되어 사경을 헤맬 때 사도 바울을 돌봐 주었고 결국은 로마의 감옥까지 따라가서 그를 돕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어 갈 때 어떻게 누가가 그 배에 탑승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 동승한 것에 대해서 이렇게 해석합니다. "나는 사도 바울의 노예다. 그래서 나도 따라가야 한다."해서 따라갔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는 훌륭한 문학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생애를 의사의 입장에서 잘 기록했습니다. 누가복음을 읽어보면 다른 성경에서는 볼 수 없는 그리스도에 대한 생애를 생생하고 박진감 있게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을 읽으면 눈물이 나지 않는데 누가복음을 읽으면 눈물이 납니다. 그것은 누가가 눈물의 사람이었고,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전기를 탄생으로부터 비교적 생생하게 기록했는데 마리아를 직접 방문해서 마리아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를 기록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와 한 얘기는 마리아 외에는 아무도 모르거든요. 또 예수를 잉태할 때 가브리엘 천사가 찾아왔던 이야기, 엘리사벳의 집을 찾아갔을 때 있었던 이야기, 이런 이야기는 주인공을 직접 만나지 않고는 기록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누가에 대한 사도 바울의 평가 한마디가 그의 생애 전체를 담고 있는데 "사랑받는 의원 누가"라는 말은 누가는 사랑받는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물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사도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사랑하느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이것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고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사랑할 사람을 예정하셨습니다. 우리가 착해서 사랑하는 것 아닙니다. 행동이 좋아서 사랑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려고 예정하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지금도 사랑받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껏 받아줄 때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입니다.
누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자입니다. 그는 당대에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자요, 의사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이 세상에서 인간적으로 영화롭고 부요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포기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눅 1:2-3). 누가복음은 데오빌로 각하에게 복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썼다는 것입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행 1:2). '내가 먼저 쓴 글'은 누가복음을 가리킵니다.
여기 '데오빌로 각하'라는 말을 썼는데 '데오빌로 각하'가 누구일까? 이 사람의 신원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데오빌로 개인 한 사람을 위해서 이렇게 방대한 글을 쓰고 있을까요?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누가는 이 글을 많이 사람이 읽기를 원하고 있는데 어찌 한 사람에게만 보냈겠습니까 아마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있는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기독교인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심정으로 이 글을 썼을 것입니다.
그런데 데오빌로라는 말의 뜻이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다 각하입니다. 물론 그때 당시에 어느 감독이나 황제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비밀은 사회적인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데오빌로라는 이름을 가진 것 자체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이름이 어느 개인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 성도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다 '각하'입니다. 데오빌로 목사, 데오빌로 장로, 데오빌로 권사, 데오빌로 집사가 되시기 바랍니다.
데오빌로라는 이름 하나 가지면 만사가 형통합니다. 데오빌로라는 말을 누가복음, 사도행전 서두에 쓰고 있다는 것은 누가 자신이 자기가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임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받는 의원 누가' 이는 벌써 데오빌로 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사랑받고 있는 사람으로 인정해야 됩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받도록 하기 위해서 태어나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려고 나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받을 사람이 되어주는 것은 하나님을 한없이 영화롭게 해주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자녀로 태어난 것은 우리 부모님을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 자식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 부모가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님에게 그런 행복을 안겨주지 못한다면 나는 세상에 잘못 태어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면 하나님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이루는 것인데 하나님께 근심을 끼친다면 잘못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롯 유다에게 "너는 태어나지 않았더면 좋을뻔 했다"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십시오.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십시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 됨에 중요한 일입니다. 내가 행동이 나빠서, 충성하지 않아서 그것은 두번째입니다. 그것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조건적인 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붓 아버지나 아저씨의 관계입니다. 집에서 종살이 하는 사람은 열심히 일해야 주인이 사랑해 주지만 자식은 먹고 놀아도 사랑해 줍니다.
우리가 애인을 만날 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첫눈에 반해야 합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좋아하는 것은 창세 전에 예정된 사람이지만 돈 보고 사랑한다든지, 가문, 인물을 보고 사랑하는 것은 조건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할 때 우리가 충성한다고 사랑하고, 헌금 많이 한다고 사랑하고, 일 많이 한다고 사랑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를 창세 전부터 이미 자녀로 사랑했습니다.
누가는 그것을 알았습니다. 누가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깨달았기에 하나님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한 생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철저하게 바울 곁에서 겸손과, 희생과, 섬김의 일생을 삽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을 위해서 겸손하고, 그 사람을 섬기고, 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입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처럼 우리가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하여 그 밑에서 겸손하고, 섬기고, 희생할 때 사랑받는 사람이 됩니다.
누가가 바울과 함께 최후의 순간에 감옥에서 함께 있었던 비밀이 뭐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이므로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를 사랑해야 되겠다.' 이것이 누가의 마음이었습니다. 누가는 이 마음 때문에 자기 모든 생을 포기하고 그 고난의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는 결국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누가를 사랑했습니까 이제는 사람에게 잘하는 누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결국 우리는 사람과 살아야 합니다. 문제도 사람하고 사는데 있습니다. 사람과 안살면 간단한데 사람하고 살려고 하니까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부부간의 갈등입니다. 직장이 마음에 안들면 그만 두면 되고, 교회 목사가 안맞으면 떠나면 됩니다. 그런데 부부는 떠날 수가 없습니다. 떠나지 못하고 살아야 할 관계가 둘 있습니다. 하나는 부부이고 하나는 예수님과 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떠나면 지옥가야 되는데 어떻게 떠납니까 부부간에 이미 만났으면 잘 살아야 됩니다. 잘 못살면 지옥이니까요.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고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주님의 형상이 내 속에 들어와야 됩니다. 겸손, 섬김, 희생 이 세가지가 따라 붙어야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이것이 바로 누가 속에 흘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니까 그렇게 흘러간 것입니다.
누가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쓰면서도 자기 이름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을 따라 다니면서 섬기는 일을 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서 고통을 분담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포기한 상태로 함께 있습니다.
필리핀에 유명한 부자 사업가 아들 중에 카풍카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니까 화장실과 목욕탕이 얼마나 더럽고 냄새가 나는지 불결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학장한테 그랬습니다. "학장님, 이렇게 더러운 곳에서 어떻게 공부합니까? 좀 깨끗하게 해 주십시오." "알았네. 내가 알아서 조치할테니 가 있게"
조금 뒤에 이 학생이 화장실에 가 봤더니 누가 청소를 하는데 보니까 학장님이 직접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학장님이 기쁘게 청소하다가 이학생을 보고 "조금 있다가 들어오게 깨끗하게 한 후에 들어와야지." 하고 말했습니다. "학장님, 청소부를 데려다가 청소를 하도록 하지 왜 직접 하십니까" "천국은 바로 이런 것이라네. 더러운 곳이 있으면 내가 먼저 치우고, 쓰레기가 있으면 내가 먼저 치우고, 내가 먼저 섬기고 봉사하고 희생하고 일하는 것이라네. 자네는 부자집 아들로 여기에 왔기 때문에 불결해 보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느끼지 못한다네. 더러운 것을 보면 불평하지 말고 그것을 치우는 사람이 되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말로는 잘합니다. 그러나 몸이 함께 해 주어야 됩니다.
대만 정부 하면 장개석 총통을 생각합니다. 장개석이 일본 사관학교를 다닐 때의 일입니다. 이 일본 사관학교는 중국 사람들이 쓰는 화장실과 일본 사람들이 쓰는 화장실이 달랐는데 일본 사람들이 쓰는 화장실은 깨끗했는데 중국 사람들이 쓰는 화장실은 아주 더러웠습니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을 야만인이라고 놀려댔습니다. 그때 많은 중국 생도들이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교장이 중국 화장실을 보니까 일본 화장실 보다도 더 깨끗해졌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렇게 깨끗해졌을까' 하고는 교장이 밤중에 잠을 자지 아니하고 지켜봤습니다. 새벽 2시가 되니까 한 사람이 간소한 복장을 하고 와서 청소를 하는데 보니까 장개석이라는 생도에요. 그때 교장이 속으로 '저 사람은 장차 중국 대륙을 지도할 큰 인물이 되겠구나!' 했는데 그대로 되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주치의가 필요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다섯번이나 39대 맞는 태형을 맞았습니다. 그는 갖은 고난과, 굶주림과 역경 속에서 때때로 괴롭히는 안질과 매맞는 상처로부터 오는 고통으로 인하여 신음해야 했습니다. 그때 이런 것들이 짓누를 때 의사인 누가가 곁에서 치료해 주었습니다. 바울에게는 곁에 잠시도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사랑받는 의사였습니다. 누가는 의사로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로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교수는 가르치는 일로, 농사짓는 사람은 농사 일로,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 일로, 뭐든지 자기 분야에서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목사가 아무리 인간적으로 마음씨가 착하다 하더라도 교인들 은혜도 못받게 하면 사랑받지 못합니다. 의사가 온유하고 기도는 많이 하는데 병을 잘 못고친다면 사랑받지 못합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 말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충성스럽게 쓰임받는 자가 착한 종입니다.
누가는 하늘나라에 갈 때 사랑받는 사람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그것을 스데반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스데반이 죽는 것을 옆에서 보고 그것을 누가에게 얘기 해 주어서 그것을 기록했다고 하지만 들은 것만 가지고는 그렇게 못씁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천국에 있는 스데반을 머리속에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받는 의원 누가" 이것은 다른 사람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 다 사랑받는 데오빌로 성도가 되어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 사랑받는 스데반처럼 면류관을 받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남은 사람 떠난 사람
골 4:10-18 / 박조준 목사
지난 일 년 동안을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수요기도회로서는 금년 마지막 기도 회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를 읽어 가면서 생각하고 기도했는데 오늘은 골로새서의 마지막 부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새해부터는 데살로니가 서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계속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열심히 모이시고 간절히 기도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우신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만 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사귀는 데도 훌륭했습 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인간관계가 중요합니다. 태초에 관계가 있었습니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사람을 단순히 사람(人)이라고만 하지 아니하고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인간은 간(間)속에서 살아갑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자지간, 부부지간, 사제지간, 고부지간, 동향지간, 동포지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나는 나를 둘러싼 관계의 그물 속에서 살아갑 니다. 이러한 간을 떠나서 사람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 큰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물건과의 관계입니 다. 그 중의 중요한 것이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올바라야 하나님과의 관계도 옳 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인간관계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인간관계가 원만해야 행복할 수가 있습니 다.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면 사람은 불행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 불행은 인간관계가 원 만하냐, 원만치 못하냐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하여도 과장된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바람직한 인간관계, 행복한 인간관계, 창조적인 인간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원만하고 화목한 인간관계를 이루는 일은 정말 중요합니다. 너와 나와의 관계가 단절될 때, 우리는 고독과 소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고독은 가장 견디기 어 려운 인생의 시련이요, 십자가입니다. 소외감은 인생을 괴로운 지옥으로 만듭니다. 고독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입니다. 절망에 빠지는 병입니다. 인간이 부모와 처자와 친구와 완전히 관계가 단 절될 때, 말하자면 절대고독 에서 오래 지낼 때는 반드시 미쳐서 죽는다고 합니다. 고독처럼 무서 운 게 없습니다. 그래서 형벌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감옥의 독방이요, 무인고도로 정배 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한 인간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바울이 어떻게 어려운 시련 속에서도 새 힘을 얻어 가며 살아 남을 수 있었습니까? 첫째는 하나님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었었고, 둘째는 그의 주변에 서로 좋은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행복한 인간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바람직한 인간관계는 무엇이고, 바람직하지 못한 인간관계는 무엇입니까?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불행한 인간관계는 열등감과 좌절감과 불신과 증오의 네 가지 부정원리 에 지배되는 관계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저주스러운 것이요, 암흑의 밤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가 장 바람직하고 행복한 인간관계는 조화와 긍지, 신의와 사랑의 네 가지 긍정원리에 감싸인 관계입 니다. 이러한 인간관계는 인간낙원입니다.너와 내가 흐뭇한 조화의 멜로디를 자아내고, 서로 만나 는 것이 기쁘고, 서로의 인격과 양심을 믿고, 서로 아끼고 존중하면서 대하는 인간관계는 가장 행 복한 경지요, 가장 이상적인 인간 질서입니다. 여기 생의 기쁨이 있고 삶의 행복이 있습니다. 그 런데 이런 관계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의 극기가 필요하고,인내심이 필요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성의와 관용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슬기로운 지혜도 필요합니다. 인간의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창조적인 인간관계에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는 그 구성원의 배경이나 언어, 인종이나 사회계급, 혹은 기질이 너무 달라 서, 조화를 이루고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어려운 것입니다. 여 기 골로새서에 나타난 사람들만 보더라도 성도들의 상황이 너무 달랐습니다. 우선 인종적으로 유 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아리스다고는 아마 데살로니가 사람이었을 것이고,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였 으며, 유스도라고 불리우는 예수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전혀 없습니다. 또한 헬라인도 있었습니 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사람이었고 누가는 아마 드로아 출신 의사였던 것 같습니다. 데마는 데살 로니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가와 같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에바브라와 같은 자유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네시모와 같은 노예 출신도 끼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민족, 직업, 배경, 삶의 경험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형제로 연합하여 여행이나 편지 그리고 기도로써 서로의 따뜻한 인간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자세히는 알 수 없습니다만 사도행전과 바울의 편지에서 바울과 교제하며 인간관계를 맺어온 사람들, 그러 니까 이름이 밝혀진 경우도 있지만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사람들을 계산하면 적어도 100명 이상은 될 것 같습니다. 로마서 16장에만 보아도 26명의 친구들의 이름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골로 새에 보내는 편지를 마감하면서 바울은 주님의 사역에 함께 하던 여섯 명의 동역자들의 개인적인 문안을 골로새에 보내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아리스다고, 요한 마가, 예수 유스도 는 모두 유대인이었고 에바브라, 누가, 데마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그 이름을 대할 때 별다른 의미를 느끼지 못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배경을 알고 바울과 함께 일하 던 이 사람들의 인생 드라마를 알게 되면 그 이름들은 우리에게 흥미를 줄 뿐 아니라 배울 것이 많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4장 10절 이하에는 바울과 함께 머물러 있던 사람들이 나옵니다. 아리스다고, 요한 마가, 예수 유스도 등 그들 모두는 어려웠던 시기에 사도 바울에게 충성한 사람들입니다. 4 장 10절에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함께 일꾼 된 자 라 고 밝혀져 있습니다. 아리스다고는 마게도냐 출신이고 바울의 전도 여행에 동행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원래 데살로니가 사람이었고, 에베소에서 있었던 소동 가운데 기꺼이 목숨을 걸고 나섰던 사 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아리스다고는 사도 바울과 함께 폭풍과 파선을 경험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아리스다고는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바울과 함께하는 생활을 한 신실한 동 역자였습니다. 에베소에서 소동이 일어났을 때도, 항해할 때 폭풍을 만나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도, 심지어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도 함께 머물러 있었습니다. 함께 갇힌 자 란 아리스다고가 바울 사도를 돕고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해 함께 갇힌 것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수감되었습니다.사실 바울이 놀라운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혼자가 아니고 신실하게 그를 돕는 동역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 는 것이 많습니다. 아리스다고는 바울을 도왔던 많은 훌륭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서 있습 니다. 아리스다고는 결코 쉬운 일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상황이 악화될 때 도망하지 않았습 니다. 그는 끝까지 바울과 함께 고생하며 바울과 함께 수고했습니다. 신실할 사람은 어떤 환경에 서도 신실해야 합니다. 환경의 시금석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좋은 환경, 좋은 조건 속에서는 신실한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환경과 조건이 어려워질 때도 신실하기는 사실 어렵습니다. 사 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아리스다고처럼 어떤 환경과 조건하에서도 끝까지 신실하게 일하는 종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요한 마가 입니다. 마가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마가복음을 기록한 복음서 기자 중 한 사람이고, 초기 교회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마가는 유대인이었고 예루살렘 토박이였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는 성도들이 모이는 일을 위해서 자 기의 집을 개방할 정도로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이었습니다.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로 1차 전도여행 에 바울과 동행했던 사람입니다. 마가는 베드로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말이 수긍이 갑니 다. 바울과 바나바가 첫번째 전도여행을 떠날 때 그들은 수행원으로 마가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 때 마가는 여행장비나 보급품 등을 관리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도여행이 점점 어려워지게 되자 요한 마가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바울과 그 밖의 전도자 일행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 이 사건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는 요한이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할 뿐 자세한 사연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그 일행이 위험한 국경지 역으로 막 들어섰기 때문에 그는 몹시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도권을 가지고 있 었으므로,바울이 아저씨인 바나바를 대신하게 된 것을 그는 못마땅하게 여겼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유나 변명이 어찌되었든지 간에 요한 마가는 바울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사실대로 하 면 어떤 일이 있어도 고락을 같이하겠다고 나섰던 사람이 먼저 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바울 편에서 볼 때 요한 마가는 배신한 것입니다. 나중에 바울과 바나바가 두 번째 전도여행을 떠나고자 할 때 바나바는 그의 조카 요한 마가도 같이 데리고 가자고 했지만,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갈 필요가 없다고 완강하게 거절하는 바람에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게 되고 결국 마가 로 인해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실라와,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서로 다른 길로 전도여행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의 내용으로 보아 바울이 꼭 잘했다고 말 하기는 어려워도 요한 마가가 과거에 바울의 기대를 저버린 것 때문에 바울의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고, 그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것 때문에 바울이 마가와 함께 전도여행을 하자고 하는 바나바의 제의를 잘 받아들이지 못한 것에 대해 우리는 바울을 나무랄 수만은 없습니다. 바울의 일행은 요새처럼 선교여행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말할 수 없이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 리스도를 알지 못 하는 심령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일에 진력하고 있었습니다. 어떠한 위험 과 불편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일을 가로막지 못했습니다. 물론 요한 마가가 바나바와 바울 사이를 결별하게 한 것은 큰 잘못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요한 마가를 용서하고 나중에는 그를 다시 전도사업을 하는 일에 추천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고 말했습니 다. 사실 마가,디도 그리고 디모데는 사도 바울을 대신해서 특사로 사역했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문제가 있는 교회에 그들을 보내어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곤 했습니 다. 하나님의 은혜로 요한 마가는 그의 첫 실패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유익한 종이 되었습니다. 그 래서 나중에 마가복음을 기록한 복음서의 저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요한 마가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 실패했던 모든 사람에게 위로가 됩니다. 그는 실패한 채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지 않 았습니다. 그는 다시 그 사역으로 돌아가 자신이 주님에게나 사도 바울에게 신실한 자임을 증명했 습니다. 한 번 잘못하고 실수했다고 해서 하나님은 완전히 버리시지는 않습니다. 다음 번의 기회를 주신 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의 명령을 어기고 도망하던 요나를 불러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부끄러운 일을 자행한 다윗이 회개할 때 그를 높이 들어 이스라엘의 성군으로 삼으셨 습니다.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제자 베드로를 다시 불러 양무리를 치라고 귀한 사명을 맡기 셨습니다. 바나바는 어리고 약한 그리스도인을 격려하는 사람의 좋은 예가 되었습니다. 아마 바나 바의 도움이 없었다면 요한 마가에게 다시 봉사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나바를 쓰셔서 요한 마가를 위로하고 다시 봉사하도록 회복시키셨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사람은 예수 유스도 입니다. 유스도는 바울과 함께 섬겼던 유대인 신자였습니 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관해서 별로 아는 바가 없습니다. 이처럼 유스도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사람으로 하나님을 섬겼던 신실한 성도를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를 섬긴 사람이었습니다. 유스도는 바울과 함께 수고했던 사람이요, 바울을 위로한 사람이 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에 대해서 아는 전부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사람의 생애와 사 역에 대한 믿을 만한 기록을 남기셨고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 주실 줄 믿습니다. 4장 14절에는 누가 가 나옵니다. 그는 초대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는 이방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그는 의사였고 바울이 깊이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신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사와 함께 전도여행을 했습니다. 바울은 누가의 의술을 통해서 어려운 시기에 큰 위로를 받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힘을 주시고 치유를 베푸시기도 하시고, 의 학의 기술을 사용하기도 하십니다. 누가는 끝까지 바울과 함께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누가를 통해서 사도행전을 쓰게 하셨고, 우리에게 영감 어린 초대교회의 역사와 바울의 사역에 대한 기록 을 주신 것입니다. 누가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자신의 기술을 사용했고,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 이라면 어디든지 가서 성실하게 순종하는 전문 직업인의 빛나는 표본이 되었습니다. 누가는 사랑 받는 그리스도인이요, 실력 있는 의사요, 헌신한 친구요, 주도면밀한 역사가였습니다. 이제 4장 12-13은 기도했던 사람 에바브라 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골로새서 첫부분에도 에바 브라에 대해서 말한 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회의 설립자 중의 한 사람이었 기 때문입니다. 그는 에베소에서 바울의 전도를 통해 주님에게 인도되었고, 고향에 돌아와 그 구 원의 복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에바브라는 또한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도 교회를 세운 것 같습니다. 그는 말하자면 고향선교사(home missionary)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에바브라로 하여금 그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한 것이 무엇이었습니 까? 오늘 주신 말씀 12절에 그는 그리스도의 종 이었다고 했습니다.
바울도 그를 함께 종된 그리 스도의 신실한 일꾼 이라고 했습니다. 에바브라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을 섬기고 싶어 했습니다. 그분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혼자서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에바브라는 한 지역교회의 사역은 다른 성도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종 이었던 것만 아니라 함께 된 종 이었습니다. 에바브라가 어떻게 이처럼 좋은 대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일할 수 있었습니까? 그 비결은 기도의 삶이었습니다. 12절에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했다 고 말씀했습니 다. 4장 2절에도 기도를 항상 힘쓰고 라고 했습니다. 에바브라는 생각나면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항 상 기도에 힘썼고 하나님의 축복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애써 기도했다 고 말했습니다. 여기 서 사용된 말은 괴로워한다 는 의미를 갖고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에바브라는 하나님께 그처럼 진지하게 기도드렸습니다. 이 헬라어 단어는 운동선수가 자신의 종목의 최고기록을 내기 위해서 전적으로 몰두하는 것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야구 경기, 골프나 볼링에 쏟는 관심과 열정을 기도하는 데 기울인다면 놀라운 변 화가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했다 고 말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는 특별한 대상 없이 막연하게 기도한 것이 아니라 골로새와 라오 디게아 히에라볼리에 있는 성도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틀림없이 그는 그들 중 몇은 이름을 들어가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는 이 사람들을 마음에 담고 그들을 위해서 개인적으로 기 도했습니다. 무엇을 기도했어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기를 바랬습니다. 하나 님의 뜻의 일부분만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모든 이란 말이 골로새의 중심되는 단어로 30번 이상이나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의 완전한 확신 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그리스도인 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안에서 즐거워하는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배 워가며 그것을 실천해갈 때 그는 믿음 안에서 성숙해가며 하나님의 충만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 다. 그는 희생적으로 기도했습니다. 13절에 보세요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 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거하노라 고 했습니다. 진정한 기도는 힘이 드는 것입니다.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을 때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바울도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큰 고통 을 경험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기도 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 반드시 하나님과 씨름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절 한 기도로 뜨겁게 기도에 전념해야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함께 했던 모든 사람들 이 이런저런 식으로 그 이름이 언급되었는데 에바브라만 그의 기도사역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것은 다른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기도가 그의 주된 관 심사요, 사역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에바브라는 바울과 함께 갇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러나 그의 양심과 형제 자매를 위한 기도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끝으로, 4장 14절 이하에서 바울을 떠난 사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데마는 바울이 쓴 편지에 세 번 언급되었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나의 동역자 데마 라고 불렀고, 두번째는 그저 데마 라 불렀고 세번째는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갔다 고 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마가 요한도 한 때는 바울을 버리고 떠난 적이 있었으나 그는 개심하고 돌아왔습니 다. 그러나 데마는 바울을 버리고 떠나 버린 후 다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데마는 두 주인을 섬 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고 불행히도 그는 잘못 된 선택을 해서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을 살다 보면 사람과 관계하게 되는데 나중까지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정말 귀한 일입 니다. 금년을 보내는 이 시간, 나와 주님과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관계를 한번 살펴보게 되시기 를 바랍니다. 주님은 나를 한결같이 대하시는데 내가 배신하지는 않았습니까? 이웃과의 관계는 바 람직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까? 아리스다고처럼 어떤 환경과 조건하에서도 끝까지 신실하게 일 하는 사람이 되십시다. 요한 마가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패한 채로 주저 앉아 있지 않고 다시 돌아와 바울과 주님에게 신실한 일꾼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누가는 하나님을 섬 기는 데 자신의 기술을 사용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서 성실하게 순종하는 전문 직업인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에바브라는 주된 관심사가 기도의 사역이었습니다. 항상 애써 성도들을 위하여 힘써 기도했습니 다.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 바울에게 큰 힘이 되었던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바울의 마음에 아픔 을 주고 실망케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불행 한 일이요, 비극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주님을 따르십시다. 그래서 신실한 일꾼으로 주님께로부터 인정받게 되시기를 바 랍니다. 어거스틴은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세 가지를 한다 고 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죄를 회개한다고 했습니다. 둘째 이웃과 화목한다고 했습니다. 셋째 내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해 이행한다고 했습니다. 오늘을 나의 마지막날로 생각하고 사는 사람 이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서로 문안하십시오
출 4:11-18 / 문기태 목사
성경에는 유난히 문안한다는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초기 기독교안에서 서로 문안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신자의 행동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골로새서 4장에도 문안이라는 낱말이 매우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안하다는 말에는 따뜻한 환대와 관심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당시에 문안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손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환영하고 싶을 때 환영한다는 말로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전달하기를 원할때 키스와 함께 문안하였습니다. 또 윗 사람을 대할 때 절을 하면서 특별히 경의를 표하며 접대하고자 할 것입니다. 이처럼 경의를 표한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또한 친구나 동료에게 보내는 편지의 서두에 안부 인사를 쓸 것입니다. 그 경우 '친애하는 --에게'라고 쓰게 되는데 그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알게 되어서 기쁩니다.' '당신이 친구라는 사실이 기쁨니다.' 같은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문안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서로 문안하는 것은 먼저 다가가 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다가 만난 사람은 누구든지 즉시 환영하고 격려하며 인정하셨습니다. 동시에 제자들에게도 친구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사람까지도 포용할 것을 말슴하셨습니다.
(마 5:43-47)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이방인들도 자기들끼리는 우호적이지 않느냐? 일반 세상 사람들도 누구나 자기와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는 친절히 대한다. 그것은 이기심 때문에 계산적으로 친절로 되돌아 올만한 사람만 골라서 친절을 베푼것이다. 너희는 이방인들보다 더 나아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신 것입니다. 제자가 포용할 사람에는 외국인, 새로운 신자, 괴짜, 심지어 원수까지도 포함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은 중요한 존재로 여기고 대해야 합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적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모두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피부색, 성격, 관심, 배경, 지위, 경제 수준, 믿음의 종류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가를 바라고 보답할 수 잇는 사람들만을 가려서 편애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 문둥병자, 이방 여인, 어린이, 창기들, 죄짓고 비난 받는 자 등을 가리지 않고 친구처럼 대하셨습니다. 친절하셨습니다.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셨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아랫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기다리는 윗사람들처럼 '나 여기 있다'하고 신호를 보내 다른 사람들의 인사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연령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인사하는데 솔선 수범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먼저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본 사람이 더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해야 합니다.
교회안에서 피차 문안하는 것은 서로 인정하고 서로 포용하며 서로 어떤 편견의 장벽을 갖지 않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울사도는 로마교회에 권면하기를 '(롬 15:7)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하였습니다. 서로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라는 말슴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단점이 많은 것을 알면서도 받아 주신것처럼 우리도 서로 허물을 알면서도 받아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할례자든 무할례자든, 자유인이든, 노예이든, 남자든지 여자든지, 강한 자이든지 연약한 자이든지,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슴을 열고 받아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차이를 찾아 내고 그 차이를 가지고 사람들을 갈라 놓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차이를 사랑으로 메꾸십니다. 그래서 하나되게 하십니다. 연합하게 하십니다.
교회에서도 보통 잘 알고 지내는 사람이나 알고 싶은 사람에게만 관심을 쏟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 오랫동안 잘 지낸 사람, 교회 봉사에 적극적인 사람 등은 여러 사람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나 처음 온 사람이나 내성적인 사람, 교회일에 소극적인 사람, 나이 많은 사람 등은 홀로 방치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지난 주일 말씀에서도 보는 것처럼 쫓겨나 집도 없이 유리하는 문둥병자, 꺼림칙한 사람에게도 사랑의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교회가 포용하고 품어야 할 사람의 폭이 얼마나 넓어야 함을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 문안하고 포용하는 사람인지 확인하려면 최근에 등록한 새가족의 이름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기억해 보십시오. 그리고 매 주일마다 여러분의 눈에 얼굴이 익숙치 않은 사람들 중 몇 명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하고 말을 건네고 있는지 헤아려 보십시오. 또한 여러분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미소를 보내는 일에 얼마나 능동적인가 돌아 보십시오. 여러분은 사람들과의 사이에 만들어진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을 허무는 일에 열심이십니까?
여러분 모두 먼저 교회안에서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먼저 다가가 인사하는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서로 문안하는 것은 칭찬하는 것입니다.
피차 문안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려면 사람들을 인정할 뿐 아니라 그들의 업적을 칭찬하고 그들의 수고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에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골로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여러 사람의 문안을 소개할 뿐 아니라 그들을 칭찬하는 일에 적극적입니다. 유스도를 거명하며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라고 덧붙입니다. 에바브라의 문안을 전하면서는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고 많이 수고하고 있다고 덧붙입니다. 또 누가의 문안을 전하며 사랑을 받는 의원이라고 별칭을 소개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칭찬을 통하여 골로새교회에 영적인 감동을 전합니다. 그리고 신앙의 좋은 모본을 보여줍니다. 아울러 서로 칭찬하는 은혜롭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골로새교회안에도 확산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은 칭찬을 받을 만큼 경건한 인품을 지녔고 열매를 많이 맺었으며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칭찬은 문안이 담고 있는 고귀한 성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골로새교회 성도들과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일군들간에 서로 높은 기대와 존경심,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을 품게하고자 하는 시도가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점만 있는 사람이 없고 단점만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장점도 보는 각도에 따라 단점으로 비추어 질 수 있습니다. 단점도 보는 각도에 따라 장점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영적인 열심과 광적인 헌신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자기 주장이 강한 것과 확신이 넘치는 것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유연성이 있는 것과 우유부단함의 경계가 어디입니까? 보는 각도에 따라 좋게 보면 장점으로 비추어지고 나쁘게 보면 단점으로 비추어집니다. 따라서 우리가 칭찬에 적극적인 사람이 되려면 먼저 피차 좋은 면만을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좋게 해석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교인들간에 대화할때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좋은 면만을 부각시키려고 힘써야 합니다.
저는 교회 홈페이지에 인터넷사역팀에 부탁하여 '칭찬해주세요'라는 코너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인들이 칭찬에 인색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거기 올린 칭찬의 7-80%는 저 혼자 올린 글입니다. 그러니까 저도 이제 지쳤습니다. 우리 교회를 좋은 교회로 만들려면 서로 칭찬에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서로 칭찬하다보면 감동을 많이 받습니다. 행복해집니다. 비난받으면 방어적이 되지만 칭찬받으면 최선을 다해 더 잘하려고 합니다. 앞으로 인터넷 하는 사람은 일주일에 한 번은 반드시 홈페이지에 칭찬의 글을 올립시다. 하루에 한 사람씩 본인이나 다른 사람에게 칭찬하는 말을 합시다.
감자탕교회 이야기를 읽어 보셨습니까? 저는 그 책을 읽으면서 그 교회가 참 아름다운 교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울러 그 교회의 성도들이 그렇게 교회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행복하게 신앙생활하게된 가장 큰 요인이 만나면 서로를 향한 칭찬에서 오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감자탕 교회는 상가에 있는 교회입니다. 교회 간판은 작고 잘 안보이는데 1층의 감자탕집 간판이 훨씬 커서 감자탕교회라는 별명이 붙었답니다. 그런데 그 교회 교인들은 예배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삼삼 오오 길에 서서 두 시간 이상씩 자기 교회 칭찬, 교인들 칭찬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하다가 아쉬워하며 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더 사랑스럽고 교인들과 목사님이 자랑스럽고 저절로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교회는 그 교회만큼은 칭찬거리와 자랑거리가 안되겠지만 우리에게도 맘만 먹고 칭찬하고 자랑하면 한 시간 정도는 칭찬할 재료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모두 결심하고 서로 흉보는 것, 비난하는 것, 불만을 터트리는 것 대신 시각과 생각을 바꾸어 지체들을 칭찬하고 교회의 좋은 면을 칭찬하며 문안한다면 우리안에서도 굉장한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3. 서로 문안하는 것은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런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어느 노처녀가 젊은 목사를 찾아가 따졌습니다. "목사님은 왜 성경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지 않으세요?" 당황한 목사,"제가 어떤 면에서 성경말씀을 행하지 않았지요? 지적해주시는게 옳으면 지금부터라도 행하지요" 그러자 노처녀는 베드로전서 5장14절을 펴 읽었습니다.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이렇게 돼 있는데 한번도 행하지 않으셨잖아요"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살전 5:26)'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로마교회에도 같은 권면을 하였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말로 인사를 나눌 뿐 아니라 몸으로 형제의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거룩한 입맞춤은 사도 시대에 교회에서 정규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2세기에는 성찬의식에 정식으로 포함되기도 하였습니다. 미국의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서로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공식적인 예배 중간에까지 따로 시간을 내어 포옹하며 사랑을 표현합니다.
물론 우리의 문화에는 입맞춤이나 포옹은 어색하고 오해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입맞춤을 하며 문안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사에 애정이 실려 잇어야 함을 발견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몸이 욕정이 아닌 거룩한 사랑을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야 함을 상기시켜줍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과는 다른 문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 거룩한 입맞춤은 우리 시대에 적합한 표현으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악수를 합니다. 처음에는 남녀가 손을 맞잡는 것도 상당히 어색하고 이상했지만 밀레니엄시대에 남녀유별을 부르짖으며 외면하는 것을 깨뜨려 과감히 악수를 시도했습니다.
아무튼 표현방식은 약간 다르지만 거룩한 입맞춤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정신이 무엇입니까? 성도간에 거룩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딤전 5:2)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포옹을 해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과장된 몸짓이 될 수 있습니다. 입맞춤을 해도 마음을 열지 않은채 위선으로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악수만해도 친절과 감사와 진심어린 사랑을 담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사랑을 서로에게 표현하는 몸짓에 움추러들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진실한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채팅을 통해 거짓된 사랑한다는 말에 넘어가 인생을 망치는 불행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예수님에게 받은 진실한 사랑이 있지 않습니까? 거룩한 사랑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성도간에 적극적인 문안을 통해 순수하고 거룩한 사랑을 더욱 풍성하게 표현해야 하겠습니다. 움추러들지말고 예수안에서 사랑한다고 표현하세요. 순수한 마음으로 당신의 신앙이 아름답다고 말하세요. 진실된 자세로 그리스도안에서 한 주간동안 보고 싶었다고 말해 보세요.
4. 서로 문안하는 것은 축복하는 것입니다.
말과 몸짓과 거룩한 사랑으로 문안할 뿐 아니라 거룩한 축복을 포함한 인사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축복할 수 있는 특권을 하나님께 부여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앞에 가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열심히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중에서도 기회있는대로 믿음의 가정들에게 축복을 더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축복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음으로 축복하는 사람으로 첫인상이 각인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골로새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문안인사를 빠뜨리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고는 축복하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아버지가 아들을 축복하였고 지도자가 백성들을 축복하였습니다. 그중에 에서와 야곱이 서로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으려고 모략을 동원하기 까지 합니다. 그로인해 형제간에 원수처럼 되었으나 결국 축복의 기도가 그대로 성취되지 않습니까? 신약 성경에 이르면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을 안고 축복하셨습니다. 아울러 축복의 메시지를 말씀을 들으러 모인 군중들에게 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교회와 성도들을 축복하였습니다. 특히 바울 사도는 매 번 편지에서 축복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고후13장 13절을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축도시 사용하며 축복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저에게 자주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목사의 가정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다른 집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 있겠어요. 축복기도받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러면서 아이들 기도해 주라고 제 등을 떠다 밉니다. 여러분도 믿음으로 자녀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하는 기도를 해 주세요.
뿐만아니라 성도간에 가슴에서 우러나온 기쁨에 찬 인사를 서로 나누며 서로 축복을 빌어주세요. "당신에게 더 큰 은혜가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단순히 '안녕하세요' '안녕히 계세요.'하는 것보다 얼마나 세련되었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은혜롭습니까?
여러분에게 섭섭하게 대하는 이를 향해서도 축복이 담긴 인사를 하세요. 그 사람의 마음이 부드러워질 것입니다. 그러면 예전의 나쁜 관계는 청산되고 새로운 관계가 형성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축복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으면 여러분이 큰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축복을 받은 상대가 만약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 복이 다시금 여러분에게 되돌아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받기를 원하는 복을 다른 사람에게 아낌없이 빌어주세요. 혹시라도 그가 그 복을 받기에 적합하지 않으면 반드시 여러분에게 되돌아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좋은 소식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영접하셨다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그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잘못을 저지르고 떠나간 아들을 아버지는 얼마나 간절히 기다립니까? 그리고 마침내 돌아오는 아들을 발견하고는 맞기 위해서 달려 나가 포옹하며 맞아 들이지 않습니까? 좋은 옷을 입히며 반지를 끼워주며 새 신을 신겨줍니다. 살찐 송아지를 잡아 그 아들을 위해 큰 잔치를 벌여줍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아버지는 하나님을 묘사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방탕해도, 하나님을 멀리 떠나도, 큰 죄를 하나님께 저질렀어도 그분께 돌아오면 하나님이 사랑이 풍성하셔서 우리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 주십니다. 반갑게 맞아 주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서로 그처럼 문안하라고 하십니다. 서로 먼저 다가가 포용하고 서로 칭찬하기를 앞 다투어 하며 서로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서로 간절히 축복하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새롭게 더 아름답게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서로 문안하기를 힘씀으로 교회를 더 은혜스럽게 하는 일에 앞장서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동역자들
골 4:10-18
사실 골로새서는 4:6절로 끝났습니다. 나머지는 문안인사와 같은 내용들입니다. 특히 10절부터는 바울과 함께 했던 동역자들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 셋, 헬라인이 셋입니다. 그 외의 인물들이 있습니다. 함께 이들의 면면의 살펴보면서 2016년 12월 31일 묵상을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1. 마가와 데마
제가 가장 먼저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은 마가와 데마의 비교입니다. 마가는 1차 전도여행 때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했다가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지만 버가에서 갑자기 돌아갔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뒷날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갈라서게 됩니다. 그래서 두 개의 전도 팀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가가 달라진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본문에서도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 마가가 마가복음을 기록하는 귀한 일꾼이 되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귀한 변화입니다.
그러나 데마는 반대로 변한 사람입니다. 14절에 데마가 함께 문안한다고 했는데 딤후 4:10-12절입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그럽니다.
일반적으로 바울 서신 가운데 가장 늦게 기록된 것이 디모데 후서로 봅니다. 따라서 옥중 서신이 기록된 후 몇 년 후에 디모데 후서가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몇 년의 시간에 마가는 더 필요한 사람으로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떠나간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골로새서를 기록할 때는 데마가 문안했지만 디모데 후서를 쓸때는 세상을 사랑하여 갔던 사람이라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우리는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점점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필요한 사람이 되고 ㅅㅇ숙하고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을 사랑하여 떠나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있습니까? 마가와 데마 사이에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변하고 있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2. 에바브라
아마도 골로새 교회와 히에라볼리, 라오디게아 교회를 개척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에바브라는 자나깨나 골로새 교회를 염려하며 기도하는 사람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12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그럽니다. 에바브라는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수고한 사람으로 사도 바울이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씁니다. 자나깨나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누군가로부터 진실환 신뢰를 받았던 에바브라. 이 분도 참으로 귀한 일꾼입니다.
3. 아리스다고와 누가
아리스다고는 나와 함께 갇힌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리스다고는 본문을 제외하고 성경에 네 번 나옵니다. 행 19:29, 행 20:4, 행 27:2, 몬 1:24절 등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기록을 통해 볼 때 아리스다고는 바울이 고난 받을 때 항상 옆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에베소에서 바울이 폭도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하고 목숨을 잃어버릴 뻔했던 고통의 현장에도 아리스다고는 옆에 있었습니다. 유라굴로라는 광풍에 배가 부딪쳐 죽을 고생을 하는 한복판에도 아리스다고는 바울 옆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문 10절,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도 아리스다고는 바울 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아리스다고를 함께 갇힌 자로 소개합니다.
누가 역시 사도 바울과 수많은 세월을 함께 했던 귀한 동역자입니다. 누가는 의사로서 바울의 전3차에 걸친 전도 여행에 동행하면서 바울의 건강을 돌보아주었으며, 숨은 봉사로서 많은 하나님의 일을 했던 귀한 동역자입니다. 행 16:10-17; 20:6-16절에는 누가와 함께한 시간들의 기록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 행전이 바로 의사 누가가 기록한 귀한 말씀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누가가 사도 바울과 함께 했던 시간들은 희생의 시간 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고난의 순간에 함께 하는 성도야 말로 가장 귀한 동역자입니다. 아리스다고와 누가는 그런 면에서 귀감이 될 만한 귀한 사람들입니다. 특히 누가는 육체적으로 연약했던 바울에게 얼마나 귀한 동역자입니까? 뒷날 누가복음을 기록하고 사도행전을 기록했던 누가는 교회 역사에 또 얼마나 중요한 인물입니까? 귀한 헌신의 시간들이 귀한 열매가 되어 교회 역사에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리스다고는 이름도 없고 빛도 없습니다. 무슨 업적을 남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고난의 현장에 늘 함께 했던 귀한 동역자입니다.
조금만 교회가 힘들면 철새처럼 떠나가는 성도들이 많은 시대에 아리스다고는 귀감이 되고 그 이름으로 교훈이 되는 귀한 성도입니다.
그리고 골로새 교회의 목회자로 추정되는 아킵보는 빌레몬의 아들입니다. 눔바는 가정 교회를 이루어 헌신했던 귀한 여종입니다. 두 개의 교회가 있는 것처럼 표현되었지만 그런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눔바가 제공한 집에 모인 가정 교회를 지칭하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헌신하는 귀한 종들도 있었습니다. 유스도는 가장 정보가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이런 귀한 동역 자들을 보면서 내 귀한 동역 자들을 생각해 봅니다. 어울림 교회의 귀한 동역자들... 함께 교회를 이루고 산과 골짜기를 지나 여기까지 와 있는 귀한 동역자들입니다. 가끔은 데마와 같은 사람도 있었고, 누가와 같은, 아리스다고와 같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그리고 새 해 일꾼을 세워야 하는 시간이 다가옵니다. 당신은 어떤 동역자입니까? 저는 시작보다 끝이 더 아름다운 동역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점점 성장하고 점점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과 삶으로 지어져 가는 귀한 동역자들이 우리 가운데 늘어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꾼들
골로새서 4:10-18 / 최건수 목사
1
환경을 이기는 사람들
성경 외의 인물로서 제가 좋아하는 차오추우(Chao-chou, 778-897)라고 하는 선교(禪敎, Zen)의 대가가 있습니다. 그가 선교에 처음 입문한 것은 그 당시 다른 사람들은 이제 인생의 거의 끝 부분이라고 생각하던 60세이었습니다. 그가 추구하던 것은 선교의 마스터(Master)가 되는 것인데 100명이 선교에 입문하면 20-30년의 수련기간 뒤에 한 명이 마스터가 될까말까 한 하늘의 별 따기와도 같이 힘들 일인데, 청년이 아닌 60세 고령의 차오추우는 이에 감히 도전한 것입니다.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20년 뒤인 80세에 선(禪)의 이치를 깨달아 마스터가 되었습니다. 80세까지 산다는 것은 지금도 장수의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여기는데 그 당시에는 참으로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의 삶이 마스터에 도달한 것으로 끝난다 해도 별로 후회스럽지 않을 것 같은데 그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80세에서 40년을 더 살면서 선교의 체계를 완성하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냅니다. 그가 미리 120세까지 살 수 있음을 알고 60세에 선교에 입문하였겠습니까? 그가 120세까지 장수하면서 선교의 대가(大家)가 된 것은 자기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이라고 할 것입니다. 선교에 많은 마스터들이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있었지만 그의 선의 깊이는 참으로 대단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들은 자기 앞에 놓인 환경을 이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환경을 탓하고, 자기의 부족한 신체 조건을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자신감은 자신을 의지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함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신앙고백한 대로 믿는 사람은 그에게 능력을 주시는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람입니다. 믿는 사람의 환경극복과 열심은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자신의 이름은 유명하여지지 않아도 좋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서를 마치는 문안인사에서 두기고와 오네시모 (7-9절) 이외에 8명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 에바브라, 누가와 데마, 눔바, 그리고 아킵보)의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꾼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0절: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는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아리스다고(Aristarchus)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 출신(행전 20:4, 27:2)의 유대인으로서 에베소 지방에 바울의 3차 전도여행 기간 중 에베소에서 소요가 있었을 때 바울과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행전 19:29). 그가 그 후에 바울을 따라 아시아까지 동행하고, 바울이 재판을 받기 위하여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향할 때 함께 배에 올랐습니다(행전 27:2). 아리스다고가 바울과 함께 하나님의 일 감당하기를 좋아하기에 그를 따라 감옥(가택연금)에까지 동행하였습니다. 아리스다고는 갇히지 않아도 되는데, 바울의 고통을 분담하기 위하여 함께 갇히는 자가 되었습니다.
마가(Mark)
요한이라고도 하는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로서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에 동행하였습니다. 그들이 소아시아의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렀을 때, 마가는 육신의 피곤 또는 다른 이유를 들어 전도여행을 포기하고 먼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행전 13:13). 1차 전도여행 후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2차 전도여행을 떠나자고 말합니다. 이때 바나바는 자신의 조카인 마가를 다시 데려가자고 하나, 바울은 그의 사람 됨됨이가 탐탁치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홀히 여겨 밤빌리아에서 먼저 돌아간 것을 들어 데려갈 수 없다고 완강하게 말합니다. 결국 마가의 일로 바울과 바나바는 심히 다투고 갈라서게 되고 각각 다른 전도의 길을 가게 됩니다. 마가가 아직 그리스도인으로서 철이 덜 들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마가는 깊은 회개를 하고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새사람으로 거듭 납니다. 그는 그의 실패를 바탕으로 참으로 겸손한 삶을 살게 되고, 베드로는 그를 (믿음 안에서) “내 아들 마가”(벧전 5:13)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마가가 베드로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기록한 마가복음이 우리에게 전하여지고 있습니다.
이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한 곳에 커다란 집을 소유한 부유하고 경건한 여인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초석이 된 120명이 모여 기도한 마가의 다락방이 바로 그의 집이었습니다(행전 1:13-15, 2:1). 또한 그의 집은 그 이후에도 사도들과 제자들의 모임의 장소로 제공되어졌습니다(행전 12:12).
이와 같은 경건하고 주님과 그의 사역을 위하여 자신과 자신의 소유를 드리기를 즐겨하는 어머니가 있었기에 마가는 신앙에서 실패한 때도 있었으나 아주 넘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에 바울도 마가의 변모된 모습을 보고 그를 기쁨으로 다시 영접하고 그를 동역자로 삼게 되었습니다 (몬 1:24). 한번 실패의 경험이 있기에 두 번째의 동역은 마가에게 참으로 의미가 있었으며 다시는 넘어지거나 거치는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쓸 때,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1)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가가 전에는 하나님의 일에 무익한 자였는데, 이제는 참으로 유익한 자가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1절: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희는 할례당이라.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유스도(Justus)
유스도라고 하는 이름이 사도행전 1장 23절과 18장 7절, 두 번 나오는데 동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유스도가 어떤 일로 바울을 도왔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그도 바울의 여러 동역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은 이름을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맡은 일이 사소한 것이요, 남이 알아주지 않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심정으로 감당하면 그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유스도 역시 그렇게 하나님의 사역을 잘 감당한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역사하는 자들
아리스다고, 마가와 유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할례당--즉, 유대인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기를 거부하고, 또한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유대인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믿음보다는 율법을 고집하며 바울의 이방인 사역을 못마땅히 여기고 반대하였는데, 이들은 바울의 사역을 귀히 여기고 그 사역에 기꺼이, 희생적으로 동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러한 사람들만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라고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남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상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부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닌 까닭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29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많은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여전히 자신들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바울의 이방인 사역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비판하기에 이것이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 심령을 무겁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리스다고, 마가와 유스도와 같이 바울의 사역에 동참하는 소수의 유대인들이 있기에 바울은 이들로 인하여 위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에 바라기는 더욱 더 많은 유대인들이 바울의 이방인 전도의 의미와 목적을 이해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길임을 깨닫고 동참하기를 원하는 마음이었습니다.
12-13절: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간에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거하노라.
에바브라(Epaphras)
에바브라는 본래 골로새 교회의 개척자요 사역자인데, 그 교회 안에 거짓 선생이 다른 교리와 주장을 갖고 들어와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으매 로마에 있던 바울에게 와서 그의 자문을 구하였습니다. 해서, 바울이 골로새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에바브라는 “항상 너희(=골로새 성도들)를 위하여 애써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에바브라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골로새 교회를 사역해왔기에 성도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항상 애써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들은 함께 있으나 떨어져 있으나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 줌이 필요합니다. 이리할 때, 하나님의 보호하시고 함께 하시는 은총이 나타납니다.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한다”고 했습니다. 골로새 교회와 율법주의와 천사숭배와 세상의 철학을 좇는 이단이 들어온 관계로 에바브라의 골로새 성도들을 위한 기도는 뜨겁습니다. 그가 지금 몸으로는 골로새 성도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영으로는 그들과 함께 하고 그들을 권면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모든 뜻 안에서 더욱 완전하고 믿음에 확신 있게 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14절: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누가(Luke)
누가는 의사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의사라는 직업은 안정적인 삶이 보장된 직업입니다. 그러나 누가가 바울을 만나매 그의 3차 전도여행부터 자청하여 바울을 따라다녔습니다. 죄수로서 로마로 이송되는 바울을 굳이 따라갈 필요가 없었지만 그는 자원함으로 바울의 고생 길에 동행하였습니다. 옥에 갇혀 있는 현재에도 바울 곁에서 그의 건강을 돌보며 바울과 함께 더욱 넓은 전도의 문이 열리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누가는 또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라고 하는 귀한 책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옥에서 놓임을 받았다가 그의 왕성한 전도활동으로 다시 체포되고 지하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때에도 누가는 바울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서 바울은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적고 있습니다.
데마(Demas)
데마는 이 당시만 하더라도 바울의 동역자로서 신실한 일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가운데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바울을 떠나 세상을 향하여 갑니다. 디도데후서 4장 10절에서 바울은 이 데마에 대하여 안타까운 심정으로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For Demas, in love with this present world, has deserted me and gone to Thessalonica)”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육신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의 육신--겉사람은 사단의 유혹에 매우 약합니다(롬 7:18-24).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죽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die every day). 우리는 죽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를 원하시는 성령님은 활동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갈 2:20). 해서, 데마와 같이 곁길로 빠지는 인생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5절: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라오디게아의 형제들과 눔바(Nympha)
바울이 지금 쓰는 편지는 골로새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이지만, 이 편지가 후에 라오디게아인에게도 읽힐 것이기에 바울은 골로새서를 통하여 아울러 라오디게아 성도들과 라오디게아 교회의 집 주인 눔바와 그 가정교회에 문안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 당시에는 교회가 공적으로 승인 받지 못하고 때로는 당국의 눈을 피해 모여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변변한 건물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성도들 중에 자신의 집을 모임의 장소로 제공하는 가정교회의 형태였습니다(행전 12:12, 16:40; 롬 16:5; 고전 16:19; 몬 1:2). 눔바도 자신의 집을 모임의 장소로 제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지역의 크기와 성도들의 수에 따라서, 한 도시에 가정교회가 하나 있을 수도 있고, 그 이상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가정교회의 예배는 요즘 교회들의 구역예배와 비슷한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이 가정교회를 중심으로 복음이 확장되고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16절: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바울 서신의 회람(回覽)
바울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없었습니다. 복음서의 기록은 바울 사후에 이루어졌고, 신약성경이란 말의 사용은 바울의 시대로부터 한 세기를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에게 위대한 사도의 서신은 참으로 귀하고 아직 신약성경이 편집되기 전부터 하나님 말씀에 버금 가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유대인 크리스천들에게는 바울의 사도권이 논란의 대상이 되는 그 때에도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는 바울은 가장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보내는 편지는 한 교회에만 머물지 않고 전 성도가 다 읽은 다음에는 그 편지를 인접한 지방의 교회에 보내어 그 교회에서도 회람하였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편지의 원본은 보관하고 복사본을 만들어 이웃교회에 보내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골로새 서쪽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해서, 골로새 성도들과 라오디게아 성도들간에 왕래가 있었기에, 바울은 그가 지금 쓰고 있는 골로새서를 그들과 함께 나눠 읽고, 또한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그의 서신을 골로새 성도들이 나눠 읽기를 바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7절: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아킵보(Archippus)
아킵보(몬 1:2)는 골로새 교회의 지도자였던 빌레몬의 아들로서 에바브라와 함께 골로새 교회를 사역하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빌레몬서 1장 2절에서는 아킵보에 대하여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군사 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재, 에바브라가 바울과 함께 로마에 머물고 있는 형편에서 바울은 더욱 그의 믿음을 공고히 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역을 잘 감당할 것을 당부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See that you fulfill the ministry which you have received in the Lord)”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성도들, 또 직분을 맡은 것은 없지만 하나님의 일꾼으로 여기는 모든 사람들은 나를 부르시고 직분을 맡기시고 일꾼을 삼으신 분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믿고 더욱 충성으로 맡기신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직분을 맡은 사람이 기분이 내키면 열심히 감당하고 수틀리면 직분을 팽개쳐 버린다면 이는 그가 맡은 직분이 “주 안에서 받은 직분”으로 여기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18절: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 자신의 문안과 축도
바울의 서신들은 대부분 사람들에 의하여 대신 쓰여졌습니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빛 가운데 임하셨던 그리스도를 만났던 이래 그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고 그가 다메섹에서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다시 볼 수 있게 되긴 하였지만 그 이후에 계속 안질로 고생하게 되었던 같습니다. 이 심한 안질이 그의 선교사역에 방해가 되는 것 같아 하나님께 치료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라고 하시며 바울의 눈병이 그대로 있게 하십니다. 즉, 이 눈병도 바울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이요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임하신 증거이기에 바울은 하나님께 그에게 눈병(=육체의 가시)을 머물게 하심에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장해요인 가운데 여러 교회들에게 대필로 편지를 보냈고 현재 13 서신이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심한 안질로 긴 편지들의 본문은 쓸 수 없었지만, 성도들을 권면하고 그들에게 소망과 위로를 더하여 주기 위하여 편지 끝마침의 문안인사는 친필로 합니다. 그 편지가 분명히 그들의 친구요, 동역자요, 위대한 사도인 바울로부터 온 것임을 그들로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골로새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당부하는 바울이 형편이 얼마나 힘들고 제한적인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악한 형편 가운데 바울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그를 방문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그리스도에게 관한 것을 가르쳤습니다(행전 28:31). 그를 지키는 시위대 병사에게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빌 1:13). 이러한 바울의 행적에 관한 소식이 바울을 아는 성도들에게 위로가 되고 소망을 주었습니다. ‘바울이 우리보다도 못한 처지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여전히 잘 감당하고 있는데 그보다는 나은 환경에 있는 우리가 더욱 힘을 내야지’라는 생각이 그들 가운데 들었습니다. 빌립보서 1장 14절에서 바울은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을 축도로서 마칩니다.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성도로 이 세상에서 만사형통하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사형통하는 삶을 살지만 하나님을 찾지 않고 감사하지 않는 교인이 있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닙니다. 바울에게 임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는 그가 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복음을 전파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며, 어려운 환경에서도 낙담치 않고 소망 중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골로새 성도들과 현재를 살아가는 성도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되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을 부르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것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형편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전파하는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태양과도 같은 하나님의 본체에서 나온 빛입니다. 빛을 받은 우리가 그 은혜의 빛을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고 전달하는 것이 은혜를 은혜로 여기고 나누는 삶입니다.
성도의 결단
두기고와 오네시모, 그리고 오늘 바울이 소개한 아리스다고와 마가, 유스도, 그리고 에바브라, 누가, 데마, 눔바와 아킵보 등은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그들에게 맡겨진 사역을 잘 감당하기를 원하던 일꾼들이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 동역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의 일을 자기 일로 여기고 자기 자신을 희생하기까지 열심히 잘 감당하였습니다. (마가와 같이) 과거에 실패한 자도 있고, (데마와 같이) 장차 세상으로 떠나가는 자도 있습니다. 과거에는 실패한 인생이지만 능력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현재는 신실한 듯 하지만 믿음의 교만에 빠지거나 자고하여지는 사람은 나약해지고 허물 가운데 빠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 그 자체는 연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사람은 그 바라봄과 의지함으로 인하여 완전하여지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겸손한 가운데 ‘주님으로 인하여 내가 환경을 이기고 모든 일을 할 수 있노라’고 담대한 믿음의 고백을 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당신은 복음의 일꾼입니까?
골 4:7-18 / 조정의 목사
“엔딩 크레딧”(만든 사람 소개 화면)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비디오 게임 등의 영상이 끝나고 제작 참여자들의 명단이 나열되며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얼마 전 온갖 미신이 등장하는 영화, 겨울왕국 후속편의 엔딩 크레딧을 끝까지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기다리는 것이 지겨울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이름이 소개되었습니다. ‘한 편의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함께 참여하는구나…’ 하고 감탄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한 편의 영화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비밀”이라는 영화를 제작하셨고 태초부터 지금까지 온 우주가 볼 수 있도록 상영하고 계십니다. “비밀”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로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십니다(골 1:15-17). 그런데 그만 피조물이 죄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게 하심으로 만물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제작하신 놀라운 영화의 줄거리, 복음입니다(골 1:18-20).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계획하고 제작하신 ‘그리스도의 비밀’에 참여한 일꾼들을 만날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 의사와 종, 유대인과 이방인 등 다양한 인물이 나옵니다. 모두가 엔딩 크레딧에 그 이름이 나열될 사람들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도 복음의 일꾼으로서 단지 복음을 듣고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참여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엔딩 크레딧에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어떻게 기록되기 원하십니까?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총 11명의 이름과 몇몇 교회가 언급됩니다. 편의상 이렇게 구분하겠습니다. 1) 편지 전달자(7-9절), 2) 복음 동역자(10-14절), 3) 연합 교회들(15-18절). 중요한 것은 이 세 그룹에 속한 모든 구성원들이 그리스도의 비밀, 복음에 함께 참여한 일꾼이었다는 것입니다.
1. 편지 전달자(7-9절) – 두기고, 오네시모
①두기고, 사랑받는 형제, 신실한 일꾼, 주 안에서 함께 종 된 자(7-8)
7절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8절 내가 그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9절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7-8절에 먼저 언급된 두기고와 9절에 나오는 오네시모의 공통점은 둘 다 바울의 사정을 골로새 성도들에게 직접 알려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쓴 편지를(골로새서) 전달하면서 동시에 바울의 안부를 전해주는 역할입니다(7, 9).
바울은 곁에 있던 많은 사람 중에 특별히 두기고를 택하여 골로새 교회에 보냈는데, 그 이유는 8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골로새 교회가 바울의 사정을 알게 되어 그 마음에 위로를 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일에 두기고가 적격이었던 것입니다.
9절에 언급된 오네시모 역시 같은 임무를 맡았습니다. 두기고와 함께(“그들이”) 바울이 있는 곳의 일을(“여기 일”) 다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알려 줄 것이었습니다.
두기고가 바울과 처음 동역한 것은 골로새서 편지를 전달하기 4-5년 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마무리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 했을 때였습니다(행 20:4). 당시 바울은 자신을 해치려는 유대인들을 피해 마게도냐에서 예루살렘으로 직행하는 노선을 취소하고, 아시아로 우회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는데, 이때 아시아 출신인 두기고가 함께 했습니다.
유대인을 피해 그 지역을 조심스럽게 빠져나가면서 바울은 두기고가 가지고 있는 능력, 여행에 최적화된 능력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에 가택 연금 됐을 때, 두기고는 여러 번 바울의 편지를 대신 전달해주는 편지 전달자 역할을 합니다. 에베소에 보낸 편지(엡 6:21) 그리고 골로새에 보낸 편지(골 4:7)를 두기고가 전달했습니다. 참고로 로마에서 골로새까지는 약 2100킬로미터가 됩니다.
두기고는 노중의 강도나 길, 강 바다의 위험, 날씨나 건강의 어려움 등 많은 장애물을 넘고 넘어 신실하게 사도의 편지를 전달하는 믿음직한 일꾼이었습니다.
또한 바울이 두 번째로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두기고는 바울 대신 디모데가 있던 에베소와(딤후 4:12) 디도가 있던 그레데로 보내졌습니다(딛 3:12). 디모데와 디도가 바울을 만나러 로마 감옥으로 올 때, 그들 대신 교회를 대신 맡아줄 합당한 인물이 두기고였던 것입니다. 그만큼 두기고는 신실하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를 가리켜 “사랑받는 형제, 신실한 일꾼,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은 두기고를 자기의 부하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같은 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기고는 예수 그리스도께 참으로 신실한 일꾼이었습니다(‘착하고 충성된 종’, 마 25:21). 그리고 그런 두기고를 주님께서 사랑하신다고 바울은 기록했습니다(“사랑받는 형제”).
여러분 우리 모두가 주님의 종입니다. 목사, 집사, 성도의 신분으로 구별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복음의 일꾼으로서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신실하냐는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은 주인의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②오네시모, 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9)
두기고와 함께 골로새로 여행한 형제의 이름은 오네시모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유익한”인데, 그는 자기 주인이었던 빌레몬에게 유익한 종이 아니었습니다(몬 1:11). 주인의 물건을 훔쳐 로마로 도주했다가 옥중에 있던 바울을 만나 회심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 불렀습니다(몬 1:10).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장로이자 오네시모의 주인인 빌레몬에게 편지하여 오네시모를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여기라고 요청했습니다(몬 1:15). 오네시모의 회심이 너무나 분명하여 바울과 빌레몬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심지어 오네시모를 “내 심복”, “내 심장”이라고 부릅니다(몬 1:12). 왜냐하면 오네시모가 바울의 사명인 복음을 위하여 일하는 신실한 일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9절에 오네시모를 가리켜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라 불렀습니다.
더 이상 무익한 노예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복음을 위해 일하는 신실한 형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복음의 일꾼입니다. 아마도 두기고가 골로새 교회까지 오네시모와 함께 동행하여 오네시모가 얼마나 변화되었는지 확증했을 것입니다. 배신자에 도둑이었던 그가 예수님께 사랑받는 신실한 복음의 일꾼이 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과거의 죄가 현재 주님을 섬기는 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가 얼마나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고 있냐는 것입니다. 신실한 종은 주님의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2. 복음 동역자(10-14절)
③아리스다고, ④마가, ⑤유스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 바울의 위로(10-11)
10절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11절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10-14절에는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한 동역자의 이름이 나옵니다. 총 6명의 이름이 언급되는데, 10-11절에 나오는 세 사람은 유대인, 12-13절에 나오는 세 사람은 이방인(헬라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이들은 단지 유대인이거나 이방인이었던 것이 아니라 둘 다였습니다.
이는 만유 안에 계시며 만유이신 그리스도께 참으로 합당한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형상을 따라 헬라인이나 유대인, 할례파나 무할례파 등 아무런 차별이 없이 자기를 위하여 새롭게 만드십니다(골 3:10-11). 인종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세 명의 유대인 일꾼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라고 칭했습니다.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대표 중 하나로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때 복음 사역에 참여했던 자입니다. 그는 에베소에서 아데미 숭배자들이 소동을 일으켰을 때 군중에 붙들려 체포되었습니다(행 19:29). 그 이후에는 두기고처럼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여행길에 함께 했고(행 20:4),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잡혀 로마로 압송될 때 바울과 함께 그 길에 동참했습니다(행 27:2).
로마로 가는 길에 배가 난파되고 겨우 살아남아 무인도에서 목숨을 보전하는 등 바울이 로마로 끌려가며 겪은 많은 고난에 아리스다고도 함께 동참한 것뿐만 아니라 10절을 보면 현재 바울과 “함께 갇힌”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로마에까지 전달되는 하나님 나라 사역에 함께 힘쓴 일꾼이었습니다.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생질, 바나바의 조카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부조하는 데, 바울과 바나바가 그 일을 위해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였고, 안디옥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가를 데리고 왔습니다(행 12:25). 참고로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가 내준 다락방에서 초기 예루살렘 교회가 모였습니다(행 12:12, 최후의 만찬 장소).
안디옥 교회가 성령의 지시로 바울과 바나바를 하나님 나라 사역을 위해 파송할 때 마가는 그들과 함께 했던 초창기 멤버입니다(행 13:1-3; ). 하지만 사역자로서 그는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사역지에 도착하자마자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며 도중하차했습니다(행 12:25). 이 일로 바울과 바나바는 두 번째 전도 여행을 시작할 때 크게 싸우고 각자 찢어져 사역을 하였습니다(행 15:36-41).
약 10년 후 바울은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비판했던 마가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께 역사하는 자로 소개합니다. 마가는 한 번의 실패로 사역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회복되어 신실한 일꾼으로 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게 마가를 영접하라, 잘 대해주고 받으라고 요청했습니다. 빌레몬서를 보면 마가를 “나의 동역자”라 부릅니다(몬 1:24). 또한 후에 감옥에서 순교를 앞두고 있었을 때, 디모데에게 부탁하여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요청했습니다.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다고 평가했습니다(딤후 4:11). 한때 마가는 바울의 근심이요 실망 거리였지만, 지금 마가는 그의 위로가 되었습니다(11).
사도 요한의 제자 파피아스의 기록에 의하면, 마가는 바울이 죽고 나서 베드로의 통역을 맡아 일했고(“내 아들 마가”, 벧전 5:13), 베드로를 통해 마가복음을 기록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마가는 애굽의 지중해 연안 항구도시인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개척했고, 마가복음을 기록한 직후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일하다 미끄러졌지만, 그는 다시 일어나 끝까지 그 일에 함께 역사했던 것입니다.
유스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올바른”, “의로운”이며 히브리 이름은 “예수”였습니다. 이름이 부담스럽지요? 하지만 “예수”라는 이름은 1세기 유대인 가운데 널리 쓰인 이름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유스도 역시 바울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한 일꾼이었다는 것입니다.
⑥ 에바브라, 교회를 위해 많이 기도하고 수고하는 자(12-13)
12절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13절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언하노라
이제 바울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역사한 이방인 일꾼 세 사람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에바브라입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성도들에게 아주 중요하고 특별한 일꾼입니다. 바울은 편지 인사말에서 에바브라를 가리켜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라고 소개했습니다(골 1:7).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울과 함께 “갇힌” 상태였습니다(몬 1:23). 아마도 로마에 가택 연금된 바울을 수종 하면서 그 안에 자발적으로 함께 갇혔던 것 같습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회의 개척자이자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 지역에 복음을 전한 전도자였습니다. 그가 그 지역에 불던 거짓 가르침의 위협을 로마에 있는 바울에게 전달했고 그래서 바울이 그에 대한 주의 가르침을 편지로 적어 두기고를 통해 전달했던 것입니다. 그 편지가 바로 골로새서입니다.
바울은 에바브라가 얼마나 “애써”, 헌신적으로 그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는지 알려주기 원했습니다. 에바브라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애써 기도하신 그 마음으로 골로새 성도를 위해 항상 애써 기도했습니다. 어떻게든지 골로새 성도들이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원했습니다. 거짓 가르침에 속아 예사람과 그 행위대로 살지 아니하고, 새사람을 입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 자로 세워지기를 원했습니다. 영적 자녀가 잘 자라기를 바라는 영적 아비의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에바브라가 골로새 성도뿐만 아니라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에 있는 성도를 위해 많이 수고하고 있음을 그들로 알게 하기 원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복음의 씨를 뿌려 하나님이 자라나게 하신 이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수고하는 일꾼이었습니다. 그 먼 거리를 수많은 위험을 무릎쓰고 강행하여 바울을 만나 자신이 돌보는 영혼들에게 닥친 위험을 알리고 그에 대한 주님의 뜻을 구하고 영혼을 위해 항상 애써 기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3장에 나오는 것처럼 자기에게 맡겨진 영혼을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는 인도자였습니다(히 13:7). 성도를 이처럼 사랑하고 성도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고 수고하는 일꾼이 진실로 많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에바브라와 같은 일꾼이 많이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⑦ 누가, 사랑을 받는 의사 그리고 ⑧데마(14)
14절 사랑을 받는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다음은 누가입니다. 누가는 바울이 마가 때문에 바나바와 갈라져 선교 여행을 떠났던 제 2차 전도 여행 때 바울과 동행하기 시작했습니다(행 16:6-17). 3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복귀할 때 바울과 함께 했고(행 20:5-15; 21:1-18), 로마로 끌려갈 때 함께 했습니다(행 27:1-28:16). 2년 정도 로마에 가택 연금된 기간 내내 바울과 함께 있으면서 도왔던 사람이 바로 누가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며 매 맞고 돌로 맞고 옥에 갇히는 등 건강을 해치는 많은 어려움을 당할 때 그들 돌봐줄 주치의가 옆에 붙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의사인 누가입니다. 바울은 순교를 앞두고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다”고 말했는데 오직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딤후 4:11). 누가는 또한 꼼꼼하고 세심한 성격으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아주 체계적이고 상세하게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누가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의사라고 소개했습니다. 우리는 여러 직업으로 주님을 섬기면서도 복음의 일꾼으로 동역하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종이 될 수 있습니다. 글을 쓰거나 곡을 쓰는 것으로도 말입니다.
데마는 별다른 설명이 없지만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 중 하나였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2차 투옥된 시점에서 그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겼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 4:10). 세속적인 이유로 복음 사역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가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데마의 구원 여부를 논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복음 사역보다 세상적인 것을 더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책망한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차지도 뜨겁지도 아니한, 미지근한 사람이었습니다(계 3:15).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데마처럼 미지근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 사역에서 떠나 세속적인 것을 좇아 삽니다. 마치 자기는 하나님이 구원만 하시고 복음의 일꾼으로는 세우지 않은 것처럼 삽니다. 하나님 나라 역사에 동참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걸 지켜보는 구경꾼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 누구도 데마처럼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엔딩 크레딧에 “세상을 사랑한 하나님의 종”이라고 나열되지 않기 원합니다. 마가처럼 한 번 뒤처지고 떨어진 적이 있더라도 끝까지 신실한 주님의 일꾼으로 다시 일어나 힘써 일하시기를 바랍니다.
3. 연합 교회들(15-18절)
라오디게아 형제들, ⑨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 골로새 교회(15-16)
15절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16절 이 편지를 너희에게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이제 하나님의 복음 사역에 연합한 교회들을 살펴보겠습니다. 7절부터 시작된 바울의 마지막 인사말은 이례적으로 긴 편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자기와 함께 복음의 일꾼 된 사람을 소개하고 그들의 인사를 전합니다(“문안하느니라”). 그리고 15-16절에서는 교회가 서로서로 교류할 것을 요구합니다.
15절에 나오는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자매들)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가리킵니다.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는 라오디게아에 있는 가정 교회를 가리키는 데, 눔바라는 자매가 아마도 루디아처럼 교회의 건물을 제공하고 필요를 공급하는 부유한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라오디게아에 있는 교회 그리고 그 교회에 속한 작은 공동체에 인사하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이렇게 물질로도 복음 사역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특히 골로새에 보낸 이 편지, 골로새서를 라오디게아에 보내 그들도 읽게 하라고 명합니다. 또한 라오디게아에서 오는 편지가 있으니 그것을 골로새 교회도 읽으라고 명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라오디아를 거쳐 골로새로 오는 이 편지를 에베소서로 봅니다. 에베소서의 가장 오래된 사본에는 “에베소”라는 말이 없는데, 그래서 에베소서는 단지 에베소 교회를 위해 쓴 편지이기 보다 바울이 세운 교회들에서 돌아가며 읽히기 위해 쓴 회람 편지였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교회가 서로서로 교류하기를 그리고 사도의 같은 가르침 아래 연합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처럼 복음으로 연합하고 건건한 교리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⑩ 아킵보(17)
17절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자, 이제 17절에 나오는 아킵보입니다. 아킵보는 에바브라가 없는 동안 골로새 교회를 맡아 사역하던 일꾼이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서에서 그를 가리켜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라고 불렀습니다(몬 1:2). 그러므로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는 권면은 거짓 가르침으로부터 골로새교회를 보호하고 끝까지 일꾼으로서 자기 사명을 다하는 권면입니다.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를 위해 항상 애써 기도한 것처럼 아킵보는 성도가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도록 수고하고 애써야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세워진 일꾼은 반드시 이 일을 삼가 이루어야 합니다.
⑪ 바울(18)
18절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내가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마지막으로 저자 바울이 등장합니다. 18절은 오늘날 편지의 서명과도 같습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편지지(파피루스)가 귀하여 아끼기 위해 짧고 간결하게 편지를 작성하도록 훈련된 필사자를 통해 편지를 받아 적어 보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편지의 마지막엔 저자가 자필로 서명을 하여 편지의 진정성을 확증했는데, 18절에서 바울이 바로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고전, 갈, 살후).
바울의 마지막 격려의 말은 이것입니다. “내가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 말은 ‘내가 매인 것을 생각하여 나를 불쌍히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을 위해 내가 매이기까지 수고한 것을 생각하여 너희도 더욱 정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이 복음 사역에 동참하는 일에 함께 하기를 바울은 간절히 구하는 것으로 편지를 마무리했습니다.
이렇게 바울의 권면은 끝이 납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바울의 권면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울 그리고 그와 복음 사역에 동참한 모든 이들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들의 삶으로 소리칩니다.
‘우리가 매인 것을 기억하라, 우리가 많이 수고한 것을 기억하라. 우리가 복음을 위해 위험을 무릎쓰고 걸어갔던 길, 끝까지 신실하게 완주했던 삶을 기억하라. 서로 복음을 위해 협력하고 같은 믿음 안에 든든하게 서려고 항상 기도하고 노력했던 것을 생각하라.’ 바울이 디모데에게 죽기 전에 남긴 말처럼 그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2:3).
여러분은 어떤 이름으로 기억되기 원하십니까? 하나님 나라 복음 사역에 어떤 역할을 담당하기 원하십니까? 바울처럼 크고 위대한 이름은 아니어도 좋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사람으로 남으면 됩니다. 유스도처럼 유명하지 않아도 신실한 일꾼으로 남기 원합니다. 마가처럼 넘어진 적이 있더라도 데마처럼 완전히 세상으로 떠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그리스도 예수의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남게 되기를 항상 애써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