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3월 2일 대한민국 보물 제1760호로 지정된 수정전의 우아한 자태.
태종이 승하하면서 비로소 실권을 장악하게 된 세종은 경회루 남쪽 명당에 집현전 청사를 짓고
학문이 뛰어난 신하들을 모아 본격적으로 훈민정음을 연구하도록 했다.
왕위를 찬탈한 수양은 사육신 등 단종 복위운동을 주도한 신료 가운데 집현전 출신이 많은 데
앙심을 품고 왕위찬탈 2년(1456) 집현전을 폐지하고 전각의 이름도 수정전으로 바꾼 뒤 왕의
편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저만 살겠다고 야반도주하자 성난 백성들이 경복궁에 불을 질러 수정전도
홀라당 타버렸는데,고종 2년(1865) 대원군의 명으로 경복궁을 중수하면서 수정전도 옛 집현전
자리에 함께 복원되었다. -
조선은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하는 노골적인 사대주의의 나라였다.
성리학을 정치이념으로 건국한 나라인 만큼 지배계급인 양반들에게 한자‧한문은 한층 절대적인
생명줄이 되었다.어릴 때부터 한자‧한문을 들입다 파서 과거에 급제해야만 유일한 생계수단이자
‘가문의 영광’인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다.
정음을 창제한 세종은 그런 부동의 생명줄을 건드린 희대의 저항군주요 언어에 관한 한 철저한 자립군주였다.
‘나랏말이 중국어와 달라 백성들이 한자로는 뜻을 펼칠 수 없으므로 이를 쉽게 하기 위해 정음을 만들었다’고
밝혔지만,오늘날의 대한민국 국害의원들만큼이나 독선적이고 절대甲인 양반들은 요지부동이었다.선선히
세종의 명을 받든 집현전 학자들 이외의 양반들은 모두가 최만리였다.
양반들에게 있어 백성은 더불어 살아갈 가치도 없는 우수마발에 불과한 존재였던 것이다.
이런 거대한 시대적 장벽을 향해 세종은 혼신을 다해 애민의 계란을 던졌다.
집현전 구성에부터 정음 창제를 향한 세종의 강력한 의지가 드러나 있다.
집현전의 수장은 영전사라는 직함을 가진 정1품 관리로서 영의정과 맞장을 뜰 수 있는 품계였으니,
자신을 대리하여 정음 창제를 방해하는 모든 외풍을 막으라는 성심(聖心)이었다.
그 밑에 판서급인 정2품 대제학과 종2품 제학을 두어 대내외적으로 집현전을 통할하도록 했다.
집현전의 실무총책은 정3품 부제학이 맡았다.정음 창제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최만리도 그와 같이 막중한
소임을 지닌 집현전 부제학 출신이었다.부제학 아래 정4품 직전부터 정9품 정자 벼슬까지 엄정한 계급체계
아래 직무를 수행했다.
세종의 강력한 의지는 스스로 붙인 훈민정음이란 명칭에 가장 명확하게 내재되어 있다.
백성을 가르치기 위한[訓民] 바른 소리[正音], 정음이란 곧 이 문자가 다른 어떤 문자보다 우위에
있다는 불멸의 긍지였다. 반포 당시 49세의 노년이던 세종은 「훈민정음 해례본」에 정음 창제에
이바지한 핵심 신하들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올려놓았다.
정인지 ; 정2품 대제학. 47세
최 항 ; 종4품 응교. 34세
박팽년 ; 종5품 부교리. 26세
신숙주 ; 종5품 부교리. 26세
성삼문 ; 정6품 수찬. 25세
강희안 ; 정6품 돈령부 주부. 26세
이 개 ; 종6품 부수찬. 26세
이선로 ; 종6품 부수찬
생년은 미상이지만 경력으로 보아 정인지와 비슷한 연배일 것으로 추정되는 최만리는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우수한 학자였다.1438년 집현전 부제학에 제수된 최만리는 이듬해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1440년 집현전
부제학으로 유턴했다.그렇다면 응당 후배 학자들과 함께 정음 창제에도 상당한 기여를 했을 터이다.
세종 사후에 편찬된 「세종실록」에 전문이 실려 있는 최만리의 정음 반대 상소는 치열하다.그의 상소문을 한 자
빠뜨리지 않고 실었다는 것은 세종 사후 정음에 대한 사관들의 반대의지가 한층 강경해졌다는 뜻이리라.
최만리는 정음 창제에 끝까지 반대한데다가 반포 1년 전에 타계하여 명단에 이름도 올리지 못한 비운의 관료
이기도 하다.최만리는 오늘날의 잣대로 너무 혹평되는 경향이 있는 만큼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여 좀 너그럽게
이해할 필요도 있다.
<소신들이 엎드려 추측하건데 언문의 제작이 지극히 신묘의 경지에 다다르고 있으며,새롭게 창조하여 지(知)를
움직이게 하는 바는 실로 천고의 역사에서 태어난 것이라 하겠습니다.하오나 신들의 부족한 식견으로는 심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중략)
우리 왕조는 지금까지 성의를 다해 위대한 존재인 대중국을 섬기며 그 제도를 따라 왔습니다. (중략)
예로부터 중국에는 여러 지방이 있었지만 그 중 다른 문자를 가진 곳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몽고 서번 서하 여진 왜국 등 각자의 문자를 가진 족속은 모두가 이적(夷狄=오랑캐)으로서 논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중략) 만약 이것이 중국에 알려져 비난하는 자가 있다면 큰 것을 섬기고 중화를 받드는 마음에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략)>최만리의 정음 반포 반대상소 전문 가운데서 중요 논지를 추린 것이다.
‘큰 것을 섬기고 중화를 받드는 마음에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장황한 상소의 결론은 결국 뼛속 깊이
아로새겨져 있는 사대주의의 극치였다.이것이 최만리의 충심이었고 조선의 양반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기준이었다.
치레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러한 최만리도 정음을 ‘지극히 신묘한 경지’라고 추켜세웠다.
‘실로 천고의 역사에서 태어난 것’이라는 표현도 정음 창제에 참여했던 학자로서 우리말의 오랜 연원을 인정한
발언이리라.정음 창제에 극렬하게 반대했던 모든 신하들도 그 필요성과 우수성은 인정하면서도 사대주의를 극복
하지 못했다는 얘기다.또한 반상(班常)을 막론하고 온 백성이 같은 반열에서 쉬운 문자로 의견을 주고받는다면
여직 배워온 한자‧한문은 어쩌란 말인가.이미 익힌 지적 자산이 아깝고 특권이 사라지니, 양반이라는 절대甲의
신분으로서 목숨 걸고 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이다.
최만리의 상소를 읽은 세종은 설총의 이두를 예로 들며 준열하게 우리말의 역사를 지적하고 음운론을 펼친다.
여기서 최만리는 무조건 반대를 외치는 다른 양반들과 마찬가지로 음운학적 지식의 한계를 드러낸다.고개를
꼿꼿이 들고 반대를 외치는 최만리에게 진노한 세종이 ‘네가 음운을 아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못한다.
세종은 중국 몽골 서하 여진 거란 왜국 등 주변국의 음운은 물론 멀리 아라비아에서 발생한 알파벳 음운에까지
정통해 있었다.반면 최만리는 모양과 소리와 뜻이 합쳐져 글자 하나하나가 완전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
한자를 최고의 문자로 인식하고 있었다.자음과 모음을 규칙적으로 조합하여 소리를 만드는 정음의 음운학적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세종은 끝내 뜻을 굽히지 않는 최만리를 파직함으로써 다른 신하들의 입을
막아버렸다.
세종 이후 조선이 망할 때까지 정음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보급하기 위해 애쓴 임금은 한 분도 없었다.신하들도
매한가지여서, 실록을 비롯한 왕실과 관청의 모든 공식문서에 정음이 사용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잠시 정음에 관심을 가진 임금이 한 사람 있기는 있었다.바로 연산군이다.연산군은 자신의 폭정을 비난하는
언문투서가 나돈다는 장계가 올라오자 어명을 내려 방방곡곡에서 언문서적과 언문으로 구결을 단 책들을 모조리
찾아내어 불태우게 하고 소지자를 엄벌에 처했다.언문 사용자는 물론 서적이나 문서 소지자도 치죄하겠다는
포고에 정음은 한동안 숨을 죽이고 목을 움츠려야 했다.
그러나 정조가 외숙모 여흥 민 씨에게 손수 써서 보낸 언문편지(국립한글박물관 소장)가 전해 내려오는 것을 보면
임금을 비롯하여 왕실과 사대부가의 남성들도 대부분 쉬운 정음을 익혀
은밀하게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계속)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