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581
■ 2부 장강의 영웅들 (237)
제9권 장강은 흐른다
제 31장 오자서(伍子胥)의 비밀 계책 (3)
전제(專諸)는 도성을 떠나 태호(太湖)로 갔다. 그 곳에서 그는 한 요리의 명인으로부터
생선 굽는 법을 배웠다.3개월이 지나 전제는 오자서가 은거해 있는 양산(陽山)에 나타났다.
생선을 구워 오자서에게 맛보게 했다.오자서(伍子胥)는 그 맛을 보고 크게 칭찬했다.
"참으로 맛있는 요리네."그러나 전제(專諸)는 아무 말 없이 다시 태호로 돌아갔다.
3개월 동안 더 생선 굽는 법을 익혔다. 석 달 후 또 오자서를 찾아와 구운 생선을 내밀었다.
맛이 전보다 한결 더했다.오자서(伍子胥)는 감탄했다.
"놀라운 솜씨네. 이보다 더 맛았는 생선 요리는 없을 것일세."전제(專諸)는 또 태호로 갔다.
3개월간 다시 요리를 익혔다. 세 번째로 오자서를 찾아와 요리를 내밀었다.
오자서(伍子胥)는 맛을 보았다. 지금까지 먹어본 요리 중 이보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기억이 없었다. 그는 뭐라 칭찬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냥 멍하니 전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제야 전제(專諸)는 도성으로 들어가 공자 광(光)에게로 돌아갔다.
공자 광은 전제를 자기 부중(府中)에 숨겨두었다.
며칠 후, 공자 광(光)은 오자서를 자기 집으로 불러 물었다.
"이제 전제가 생선 굽는 법을 다 배웠소. 어떻게 하면 전제를 왕과 만나게 할 수 있겠소?"
오자서(伍子胥)는 미리 생각해두었던 바를 말하기 시작했다."기러기가 구만 리 장천(長天)을
활기차게 날아다닐 수 있는 것은 기러기에게 튼튼한 날개가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러기를 잡으려면 반드시 그 날개부터 제거해야 합니다. 듣건데 오왕에게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세 용사가 있다고 합니다."
오왕 요(僚)의 아들 공자 경기(慶忌)는 몸이 쇠처럼 강했다.
손으로 나는 새를 잡을 정도로 몸이 민첩했으며, 한주먹에 맹수를 때려눕힐 정도로 힘이 세었다.
또 오왕 요의 숙부로 엄여(掩餘)와 촉용(燭庸)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사기> 에는 이들이 오왕 요의 동복동생으로 되어 있다.
그들 또한 경기와 마찬가지로 역사(力士)였을 뿐 아니라 오나라 병권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 세 사람은 늘 오왕 요(僚)의 곁에 머무름으로써 그 신변을 경호하였다.
그들이 곁에 있는 한 귀신이라도 오왕 요의 곁에 가까이 접근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요왕을 죽일 생각이시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공자 경기(慶忌)와 엄여(掩餘),
촉용(燭庸) 등 세 사람부터 제거하도록 하십시오. 만일 그렇지 않고 일을 일으키면
설사 성공한다 하더라도 공자께서는 왕위를 오래도록 유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자서의 말에 공자 광(光)은 새삼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한동안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옳으신 말씀이오.
그대의 충언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공연히 전제(專諸)만 헛된 죽음으로 몰아넣을 뻔했소.
그대 말대로 세 장사부터 제거할 터이니, 당분간 그대는 양산에 돌아가 계시오."
그 날부터 공자 광(光)은 바삐 움직였다.오자서는 다시 양산(陽山)으로 내려가 은거하니,
사람들은 그가 공자 광의 배후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리하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오자서(伍子胥)가 오나라로 망명해온지 1년이 지났다.
그해는 BC 519년(초평왕 10년, 오왕 요 8년)이었다.
그 무렵, 죽은 초나라 세자 건(建)의 생모인 채희(蔡姬)는 운(隕) 땅으로 쫓겨나 살고 있었다.
그런데 초나라 간신 비무극(費無極)은 채희가 원망을 품고 오나라로 달아난 오자서와 연락이라도
하지 않을까 늘 불안했다. 그래서 그는 초평왕에게 채희를 죽여 없애도록 권했다.
이 소문을 채희(蔡姬)가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움을 직감하고 비밀리에 오자서에게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 내 목숨이 경각에 달리었소. 그대는 오왕에게 청하여 나를 구출해주시오.
채희라면 오자서가 보호하고 있는 공자 승(勝)의 친할머니이기도 했다.
오자서(伍子胥)는 곧 공자 광에게 달려가 채희의 일을 부탁했고, 공자 광(光)은 오왕 요(僚)에게
초나라를 칠 것을 권했다.그렇지 않아도 오(吳)와 초나라 사이에 낀 회수(淮水) 강변의 주래(州來)라는
작은 나라가 초나라에 붙음으로써 화가 잔뜩 나 있던 오왕 요(僚)는 모든 장수를 불러놓고 명했다.
"이 기회에 주래를 쳐서 우리 속국으로 삼으리라."그러고는 자신은 친히 중군이 되고,
숙부인 공자 엄여(掩餘)를 좌군대장, 사촌형인 공자 광(光)을 우군 대장으로 삼아 주래를 향해
쳐들어갔다.물론 공자 광에게는 따로이 밀명을 내렸다.
"그대는 기회를 엿보아 운(隕) 땅으로 가 채희(蔡姬)를 구원하시오."
오군은 오성(吳城)을 출발하여 북서쪽을 바라보고 진격했다.
이 소식은 즉각 초평왕(楚平王)의 귀에 전해졌다.초평왕은 가소롭다는 듯 영윤 양개(陽匃)를
원수에 임명하고 장수 원월(薳越)을 선봉 대장으로 삼아 주래를 구원토록 했다.
아울러 초나라의 인근 속국인 진(陳), 채(蔡), 호(胡), 심(沈), 허(許), 돈(頓)나라 등 여섯 나라
제후에게도 동원령을 내려 군사를 보내게 하였다.
초나라 연합군과 오군(吳軍)은 종리라는 곳에서 마주쳤다.
종리(鍾離)는 초나라 영토로, 지금의 안휘성 봉양현 동북쪽에 있는 땅이다.
그 북편으로는 중국의 4대 강 중 하나인 회수(淮水)가 흐르고 있다.
그런데 때마침 초나라 영윤이자 총원수인 양개(陽匃)가 갑작스런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초나라 군사를 비롯한 연합군은 급격히 사기가 떨어졌다.장수 원월(薳越)이 임시로 원수직을 수행
했다. 원월(薳越)은 군사들의 떨어진 사기를 만회할 시간을 벌기 위해 계보 땅으로 후퇴했다.
계보(雞父)는 하북성 육안시 서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역시 초나라 영토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공자 광(光)이 오왕 요에게 말했다."적군을 기습할 좋은 기회입니다.
달이 없는 날 밤을 기해 일시에 들이치면 큰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초군이 어지러운 틈을 타
저는 운(隕) 땅으로 달려가 채희를 구출해 오겠습니다."
오왕 요(僚)는 공자 광의 계책을 따르기고 했다. 그는 3군을 재정비한 후 군사들을 배불리 먹였다.
이때 오왕은 특이한 계책을 썼다. 따로이 죄인 3천 명으로 편성된 죄인 부대를 선봉에 배치한 것이다.
582편에 계속
열국지 [列國誌] 582
■ 2부 장강의 영웅들 (238)
제9권 장강은 흐른다
제 31장 오자서(伍子胥)의 비밀 계책 (4)
그 해 가을인 7월 그믐날이었다.
원래 병가에서는 그믐날을 몹시 꺼렸었다. 그 날은 웬만해서는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그러나 오왕 요(僚)는 허를 찌르듯 그믐날을 기해 총공격령을 내렸다.
3천 명의 죄인 부대는 밀물처럼 초군 우영인 진(陳), 호(胡), 심(沈)나라 군대를 향해 쳐들어갔다.
예상했던 대로 초군 우영은 아무 방비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서둘러 전투 명령을 내리고 기습해오는 오군 병사를 맞이했다.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기습해온 오군(吳軍)은 전혀 규율이 서 있지 않았다. 싸우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 달아나기 바빴다.글자 그대로 천방지축으로 날뛰었다. 뒤늦게 기습해온 병사들이 정규군이 아닌
죄인 부대임을 안 연합군 병사들은 서로 공을 세우려고 달아나는 죄인 부대를 뒤쫓았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오왕 요(僚)가 노리고 있던 바일 줄이야.이리저리로 달아나는 오군의 죄인 부대를
쫓는 동안 어느새 연합군의 대오가 크게 흐트러졌다. 모두가 오합지졸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을 보고 있던 오왕 요(僚)는 기다렸다는 듯이 좌우군 대장에게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좌군 대장 엄여(掩餘)와 우군 대장 공자 광(光)은 창을 높이 치켜들고 초군 우영을 향해 덮쳐들었다.
진(陳)나라 장수 하설(夏齧)이 공자 광의 앞을 가로막았다가 단 한 합에 목이 끊어졌다.
호(胡)나라 군주와 심(沈)나라 군주 또한 좌군 대장 엄여에게 사로잡혔다.
공자 광(光)이 낸 기습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오군이 죽인 연합군의 수효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사로잡은 적군만도 8백 명이 넘었다.
오왕 요(僚)는 사로잡힌 호, 심나라 군주를 참형에 처하는 한편, 나머지 포로들은 도로 다 놓아주었다.
석방된 군사들은 목을 감싸쥐고 초군 좌영으로 돌아가 마구 떠들어댔다.
- 우영은 이미 전멸되었다. 뿐만 아니라 호(胡), 심(沈)나라 임금은 참형되었고,
진나라 장수 하설(夏齧)은 피살되었다.이 말을 들은 초군 좌영은 삽시간에 혼란에 빠졌다.
잔뜩 겁을 먹고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이 또한 오왕 요(僚)가 기다리던 바였다.
그는 3군을 통합하여 초나라 중군을 엄습했다. 죽은 양개를 대신해 원수직을 수행하던
초나라 장수 원월(薳越)은 대열을 정돈하기도 전에 다시 군사의 반을 잃었다. 싸울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장수와 병졸 할 것 없이 창을 둘러메고 달아나기 바빴다.
오군은 그런 초군을 추격하여 마구 치고, 베고 찔렀다.
시체는 쌓여 언덕을 이루었고, 피는 흘러 내를 이루었다. 원월(薳越)은 대패하여 50리를 달아나서야
겨우 오군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때의 싸움 장소가 계보라 하여 훗날 사람들은
이 싸움을 '계보(雞父)전투' 라 부르고 있다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공자 광(光)은 그 길로 운 땅을 향해 달렸다.
운(隕)은 계보에서 5백 리가 넘는 길이었다. 그러나 오군에게 대패한 초군은 공자 광의
그러한 질주를 막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공자 광은 무인지경이나 다름없이
운 땅으로 달려가 채희(蔡姬)를 구출하여 오나라로 돌아왔다.뒤늦게 공자 광(光)의 움직임을 눈치챈
초나라 장수 원월(薳越)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운(隕) 땅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가 당도했을 때는
이미 공자 광(光)이 채희를 데리고 떠난 지 사흘이나 지난 뒤였다.
이제 쫓아가봐야 잡지 못할 것을 안 원월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지난날 내가 왕명을 받들고 소관(昭關)을 지켰으나 오자서를 잡는 데 실패하였고,
이번엔 여섯 나라 군대를 모아 싸웠으나 크게 패하였다. 여기에 왕의 부인까지 빼앗겼으니,
나는 한 가지도 공을 세우지 못하고 여러가지 죄만 지었구나. 내 무슨 면목으로 왕의 얼굴을 대하리오!"
결국 원월(薳越)은 목을 매어 자살했다.오나라에게 뜻하지 않은 패배를 당한 초평왕(楚平王)은
크게 당황했다. 분노와 두려움이 동시에 일었다. 보복을 결심했다.
죽은 원월 대신 낭와(囊瓦)를 영윤으로 삼아 군사를 재정돈하였다. 낭와는 도성이 좁고
낮다하여 동쪽 넓은 곳에 다시 큰 성을 쌓았다. 옛 성보다 높이가 7척이나 더 높았고,
넓이도 20리가 더 넓었다.궁전도 새로 지은 성으로 옮겼다.
이를테면 도읍을 옮긴 것인데, 새 도읍의 이름 또한 영(郢)이라 하였다. 옛 도성은 기남성으로 바꾸었다.
기산(紀山)남쪽에 있는 성이라는 뜻이다.또 낭와(囊瓦)는 새 도읍지인 영성 서편에 큰 성을 하나 더 쌓았다.
그 성의 이름을 맥성(麥城)이라 불렀다. 이로써 기남성, 영성, 맥성은 품(品)자 형을 이루어
서로 긴밀한 연락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초나라 사람들은 이것을 다 낭와의 공이라 칭송했다.
그러나 심윤술(沈尹戌)만은 냉소했다."낭와(囊瓦)는 덕을 닦을 생각은 하지 않고 공연히 성만 쌓았구나.
오군이 강을 따라 쳐들어오면 성이 열 개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말을 들은 낭와는 다시 수백 척의 전함을 만들어 수군을 조련시켰다.
훈련은 3개월 동안 쉼 없이 이루어졌다.그런 중에 초평왕(楚平王)이 병에 걸렸다. 병은 좀처럼 낫지 않았다.
어떤 약을 써도 듣지 않았다. 결국 초평왕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재위 13년. BC 516년 겨울의 일이었다.
초평왕의 뒤를 이어 진(秦)나라 출신인 맹영의 소생 세자 진(珍)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초소왕(楚昭王)이다.이때 초소왕의 나이 열한 살.낭와(囊瓦)는 그대로 영윤자리를 유지했다.
좌윤에는 백주리의 아들 백극완(伯郤宛)이 올랐고, 우윤에는 언장사(鄢將師)가 올랐다.
비무극은 초소왕이 세자였던 시절에 스승이었으므로 대신의 반열에 올라섰다.초평왕의 죽음과
초소왕(楚昭王)의 즉위로 인해 초(楚)나라는 계보 전투에서의 패배를 설욕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58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