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력제(萬曆帝, 1563년 ~ 1620년)는 명나라의 제13대 황제이다. 휘는 익균.(翊鈞, 이준) 융경제의 아들이다. 1572년부터 1620년까지 48년간 재위하였다. 그의 치세는 역대 명나라 황제들의 통치 기간 중 가장 길며, 명나라가 건국된 지 200년쯤 지난 때라 왕조가 서서히 몰락해가는 시기였다.
생애
만력제는 정치를 잘 알지 못했던 등극 초기에는 모든 일을 재상 장거정(張居正)에게 맡겼다. 오랫동안 그의 스승이었던 인연 때문이었다. 장거정의 교육 방식은 너무 엄격해 어린 만력제의 숨통을 끊어 놓기 일쑤였다. 공론을 줄이고 명실상부, 기강 확립, 명령 복종, 군비 확충 등을 중시한 그는 ‘철혈 재상’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사심 없이,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국사를 처리했으며 개혁에도 열심이었다. 덕분에 명나라는 그런 대로 모양새를 갖출 수 있었다.
만력제가 제위에 오른지 10년째 되던 해 그런 장거정이 세상을 떠났다. 그동안 기를 펴지 못했던 반대파들은 입을 모아 장거정의 비리를 들추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장거정을 편들었던 만력제도 그의 재산이 자신을 능가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장거정의 가산을 몰수했다.
그것은 돈에 대한 콤플렉스였다. 돈에 대한 콤플렉스가 만력제의 장래는 물론 나아가 명나라의 장래를 망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는 나라에 아무리 위급한 일이 생겨도 동전 한 닢 내놓지 않는 지독한 구두쇠가 되어 갔다. 반면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했다. 황제의 재산은 날이 갈 수록 늘어 갔으나 국고는 점점 줄어 들었다.
황제가 돈을 밝히니 고관과 환관들은 매관매직을 일삼는 탐관오리가 되어갔고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만력제는 아부하는 자를 재상에 앉혀 놓고 오로지 치부에만 열성을 보였다. 거기다 술과 여자까지 밝혔다.
만력제가 죽은 뒤로 3명의 황제가 대를 이었으나 이미 만력제 때 뒤숭숭해진 민심은 이자성의 난을 불러왔고, 그가 죽은 지 24년째 되던 해 명나라는 멸망을 맞이하고 말았다. 역사가들은 한결같이 “명나라가 망한 것은 숭정제 때가 아니라 만력제 때였다”고 썼다.
평판이 매우 좋지 못한 군주이지만, 임진왜란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매우 적극적으로 정책을 펼친 편이다. 물론 현명하다고 할 수 없는 어리석은 패착의 연속이긴 했지만 그 적극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래서 당대와 후대 중국인들에게서는 만력제를 가리켜 ‘고려의 천자(天子)’ 또는 ‘조선의 황제’라고 일컫기까지 했다. 조선에서 명나라에 대한 호감이 생겨난 배경도 이때 만력제가 보여준 적극적인 우호 정책 탓이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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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 癸 辛 癸 - 明神宗의 命
酉 亥 酉 亥
甲 乙 丙 丁 戊 己 庚
寅 卯 辰 巳 午 未 申
* 10세(壬子歲) 壬申年에 황제 등극. (정확한 대운은 모르나 대략 庚申대운)
* 58세(甲子歲) 庚申年에 사망. (정확한 대운은 모르나 대략 乙卯대운)
[본명을] 간단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디면 그 학자는 금백수청격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최근들어] 악마의 글은 읽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읽어볼 참이다. 그는 모를 게 분명하고 나는 웃을 일이 생길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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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曆帝
1563. 9. 4~1620. 8. 18.
중국 명대(明代:1368~1644) 말기의 황제.(1573~1620 재위)
이름은 주익균,(朱翊鈞) 묘호는 신종,(神宗) 시호는 현제.(顯帝)
만력제는 일종의 은둔자였으며 국정에는 태만했다. 그결과 중앙과 지방 관료들의 전횡과 부정부패가 날로 심해지고, 재정은 위기에 봉착했다. 특히 '만력 3대정(三大征)'으로 발생한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만력제는 환관을 전국에 파견하여 광산을 열고 상세(商稅)를 징수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를 위해 파견된 환관의 가렴주구가 극에 달해 이른 바 '광세(鑛稅)의 화(禍)','직용(織庸)의 변(變)'과 같은 민란이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또한 태자 책봉문제를 둘러싸고 동림당(東林黨)과 비동림당(非東林黨)의 당쟁이 격화되어 정치적 혼란도 더욱 심해졌다.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배경으로 산시성[陝西省]을 비롯한 북부 여러 성에서 농민반란이 발생했으며, 지방에는 유적(流賊)과 난민(亂民)이 대량으로 생겨났다. 이러한 현상은 만주족의 침입에 호조건으로 작용하여 마침내 만주족은 청(淸:1644~1911)을 건국하고 중국으로 쳐들어와 중국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한편 만력제 시기에는 서양 선교사들의 중국 진출이 눈에 띈다. 서양 선교사들은 그 이전부터 여러 차례 중국 진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1601년에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만력제로부터 거주와 포교의 허가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중국 진출에 성공했다.
명신종(明神宗, 1563-1620), 즉 만력제는 만력 14년부터(1586년) 황궁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고, 사망할 때까지 30여년간 조정을 돌보지 않았다. 만력제는 10세에 등극하였으니 명실상부한 소년 천자이다. 이는 그가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세월을 그저 후궁에서 보냈다는 말이 된다.
명나라 말기의 학자인 하윤이(夏允彛)는 "귀비가 총애를 얻은 때로부터, 황상은 점차 귀찮아 했고, 조회에 임하는 것이 드물어졌다"과 하였다. 확실히 이 황제가 가장 즐기는 것은 후궁에서 취생몽사하면서 세월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가 가장 싫어한 것은 아마도 문관들의 고집센 얼굴이었을 것이다. 재미없는 상소문때문에 스스로의 달콤한 꿈이 깨지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내각수보(內閣首輔) 즉, 재상도 황제 본인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대신들이 올린 글은 대부분 건드리지 않고 남겨두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심지어 주요한 관직의 임명에 대하여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서로 품급이 다른 관복을 누가 입든 대동소이하고, 자기와는 상관없다는 것같았다. 명나라의 제도에 따르면, 고위직은 황제가 친히 임명하지 않으면 비워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정부의 많은 관직이 빈 채로 남아 있었다.
만력34년(1606년)에 대학사 심리(沈鯉)가 황제에게 호소한 글을 보면, 이부상서는 이미 3년간 비어있었고, 좌도어사도 역시 1년간 빈자리로 남아 있었다. 형부와 공부는 시랑 1명이 겸직하고 있고, 병부는 상서와 시랑이 모두 비어 있었다. 예부는 겨우 시랑 1명만 남아 있고, 호부에도 상서 1명밖에 없었다. 전체적으로 당상관 31자리 중에서 24자리가 비어 있었다.
만일 제대로 자기 직책을 수행하지 않는 관리를 제외한다면, 조정은 거의 아무도 정사를 돌보지 않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정부기구는 중국역사상에서도 아주 드문 경우이다. 조정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황제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만력제는 심지어 장엄한 국가제사행사도 생략했고, 비슷한 귀찮은 일들은 모두 관리들이 대행하게 하였다.
제국의 정치기구가 공전되자, 문관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최상부로 승진할 희망이 없어졌다. 이에 대하여 황제는 이미 습관이 된 듯했다. 만력제는 아무 생각이 없었고, 이런 복잡한 국면을 해결할 의지도 없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그저 회피하는 것이었다.
여색 이외에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돈버는 것이었다. 즉, 자기가 살아있을 때, 자손에게(특히 그가 총애한 복왕) 자산을 넘겨주는 것이었고, 자기가 죽은 후에도 걱정없이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이란 것이 바라는 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모든 노력의 결과는 전체 왕조, 특히 그의 자손들을 포함하여, 되돌아올 수 없는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만들었다. 그가 아주 사랑했던 복왕 주상순은 여러 해 후에, 낙양에서 이자성에 의하여 참수당한다.
만력 41년(1613년) 9월의 어느 아침, 한 이민족 여인이 튼튼한 말을 타고서, 만력제의 시야에 들어왔다. 무엇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광경에 황제는 질식할 것같았다. 미친 듯한 말발굽은 그의 신경을 밟는 것같았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끼게 하였다. 말이 뛰자, 먼지가 일었고, 마치 구름처럼 말의 사방을 에워쌌다. 말은 멀리서 가까이 다가왔고, 그는 말탄 기수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도 전에, 그녀는 눈앞에 나타났고, 손에는 긴 창을 들고 그를 향하여 돌격해왔다. 그는 큰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자신이 용상에 누워 있고, 이마에는 식은 땀이 많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만력황제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허약해진 몸은 여기저기 아파왔다. 곁에 있는 환관은 그를 위하여 이마의 땀방울을 닦아 주었다. 그는 환관에게 명하여 대신들을 불러오라고 했다. 대신들에게 있어서 이렇게 황제를 대면하는 것은 드문 기회였다. 그들은 줄줄이 들어와서 용상 아래에 무릎을 꿇었다.
황제는 그들에게 자기가 꾼 기괴한 꿈을 이야기했다. 사관은 황제의 말에 따라, 이 꿈을 <<명신종실록>>에 기재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400년 후에도 그가 꾼 꿈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황제는 신하들에게 해몽을 해주기를 바랐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피휘를 할 필요가 없다. 무슨 뜻일까. 기탄없이 말해달라"
관리들은 금방 답을 내놓았다. 꿈속의 이민족 여자가 말을 타고 창을 들고 있다는 것은 대명제국의 강산을 빼앗겠다는 뜻이라고.
만일 사서의 기재가 정확하다면, 우리는 놀라운 역사의 계시를 보게 된다. 명나라가 회복할 수 없는 수렁에 빠지려는 순간에 운명은 꿈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명나라의 주인에게 계시를 내린 것이다. 이는 위험의 근원이 어디인지, 도전자의 신분이 어떠한지도 알려준 것이다.
현재 우리는 관리들의 해몽이 그들의 해몽 이론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시국분석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이 기회를 빌어 황제에게 권유하기 위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들이 꿈속의 이민족 여자를 대명제국의 진정한 위협으로 보았고, 섬서에서 온 농민군이나 몽고고원의 철기군도 아니라고 보았다. 이것은 그들이 역사를 꿰뚫는 혜안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그저 역사의 우연인지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이 꿈은 의미심장하다.
역사는 어떤 때는 소설과도 같다. 그러나, 만력제는 관리들의 분석을 그다지 믿지 않았던 것같다. 이러한 계시도 그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상소문과 같이 보았던 것같다. 국면이 얼마나 엄중하건, 진언이 얼마나 비분강개하건, 모두 주색선단의 역량에 미치지 못했고, 황제로 하여금 그가 스스로 만든 환상의 만족에서 해탈하도록 하지 못했다.
만력 44년(1616년) 누르하치가 허투하라에서 칸에 올랐을 때, 만력제가 3년 전의 꿈을 기억해 냈는지는 모르겠다. 누르하치가 24세 되던 그 해에(만력11년, 1583년) 부친의 직위를 상속받아, 명나라에 의하여 건주좌위도지휘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후궁에 머물던 만력제는 이렇게 기억하기 어려운 이름은 생소했을 것이다. 만력제가 언제부터 누르하치의 이름을 기억하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요동변방의 부락수령이 그의 왕조에 감히 도전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2년 후 즉, 만력 46년(1618년) 4월 13일, 누르하치는 2만의 보병기병을 이끌고 대명왕조를 토벌하기 시작한다. 개시 전에 <<칠대한>>을 써서 명나라를 토벌하는 선언문으로 삼고, 향을 태워 하늘에 고한다. 누르하치는 그의 팔기군을 두 길로 나누어 명나라를 공격한다. 좌익 4기는 동주, 마근단을 공격하고, 누르하치가 친히 이끄는 우익 4기는 요동의 주요도시인 무순성을 공격한다.
긴창을 든 백색의 외로운 빛이 밤에 빛난다. 다른 점이라면 창을 든 사람이 누르하치라는 것이고, 만력제의 꿈속에 나타난 이족 여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장창이 휘둘러지면, 수천 수만의 팔기 기병이 밀물처럼 성벽으로 밀려갔다. 전쟁이 개시된 것이다. 모든 것은 만력제의 꿈속에 나타난 것과 같았다. 창을 든 여자는 말 위에서 뛰어다녔다. 만력제가 꿈꾸었던 용상이 그의 목적지였다.
누르하치가 중국 동북부에서 돌연 나타났지만, 만력의 고집을 꺽지는 못했다. 이미 발생한 사실에 대하여 황제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침중해서가 아니라 그가 냉막해서이다. 변방의 봉화도 그의 식어버린 열정을 되살리지 못했다. 연단로의 불꽃이 그의 얼굴에 비치고, 그에게 장생불사의 약속을 해준다고 생각할 때만이 만력은 약간의 흥분을 내비칠 뿐이었다.
만력 47년(1619년) 9월, 이부상서 조환의 호소하에, 조정백관은 문화전 앞에 줄줄이 무릎을 꿇고, 황제가 친히 조회에 참석하여 정사를 논의할 것을 기구한다. 이런 장면은 대단한 것이다. 이는 관방의 청원활동이고, 민간의 것은 아니다. 관료들이 이런 최후의 방식으로 황제에 항의를 표시한 것이다. 하루의 시간도 이들의 연약한 무릎으로서는 무척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나이들고 약한 관리들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이 정도만 해도 기적이다. 관리는 모두 모였다. 오로지 황제만 빠진 것이다.
황제는 부재로 그의 존재를 표현했다. 침묵으로 그의 권위를 나타냈다. 하루종일 황상은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항의하던 관리들도 진퇴양난에 빠진다. 그들은 스스로 일어나서 항의를 끝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할 수도 없었다. 이 문제에 있어서 무릎과 머리의 판단은 서로 달랐던 것이다. 황제와의 힘겨루기에서 관리들이 우위를 점할 수는 없다. 사태는 수습이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황제는 대충 때가 된 것을 보고는 환관을 보내어서 문화문에서 성지를 낭독하게 한다: "모든 관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조회에 참석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그저 두 글자로 답했다: "면담(免談, 말을 꺼내지 마라)"
실망이 극에 달한 조환은 올린 글에서 황제에게 이렇게 물었다: "만일 어느 날 계문이(북경 서쪽) 유린당하고, 철기가 경교(京郊)를 짓밟을 때도, 폐하께서는 여전히 깊은 궁궐에서 아무 걱정없이 베개를 높이 베고서, 병을 핑계로 해서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고집센 만력제는 관료들의 압력에도 전혀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그는 관리들을 더욱 미워했다. 만력48년(1620년), 그가 황제위에 있은지 48년이 지난 후, 만력황제는 평안하게 세상을 떠난다. 그는 그가 친히 설계에 참여한 정릉에 묻힌다. 효단황후와 효정황후 즉 공비 왕씨의 관 사이에 놓여진다. 만력의 손안에서 쇠퇴해진 명나라는 숭정과 같은 열심히 일하는 군주를 만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운명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24년후 즉, 숭정 17년 3월 19일(양력 1644년 4월 25일) 대명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는 매산 수황정에서 목을 매고 자살한다.
첫댓글 삼명통회에 나오는 명인데...뭘? 밑에 모두님께서 아주 상세히 설명해놨고...또 본인이 댓글도 달아두었으니 참고바랍니다. ^^아예 이제 대놓고 무덤을 파시네요. 이렇게 금백수청을 이해하시는 분이 아까 밑의 것처럼 금백수청을 통변하시나요...
干支에 모두 金水로 불잡(不雜)하다. 水가 金月 生했다. 金을 水가 도와 清하다. 二水와 二金이 象을 이루었다. 소위 금백수청(金白水清)이다. 별다른 잡이 끼여 있지 않다. 또 兩干이 모여 불잡(不雜)하다. 소이 높아 天子가 된다 = 위 사주의 삼명통회 통변
삼명통회의 금백수청은 그 조건의 좀더 까다롭습니다. 맑은 냇물에 조약돌이 더욱더 빛나보이는 것이겠지요?
辛 庚 癸 癸
巳 子 亥 酉
金이 水月에 生했다. 金이 도리어 洩氣된다. 亥子에 침(沉)된다. 소이 수액을 면하기 어렵다 - 삼명통회 그 밑에 밑에 있는 명조 ^^
적천수에서 말하는 금백수청 金水相生格. 金水各占二干二支又名金白水淸
본격적으로 삼명통회에서 말하는 금백수청격은 金白水淸。此輩宜登科第。此象乃庚申辛酉日生秋月令。引到時上遇亥子水鄕。以金則白。以水則淸
즉 경신, 신유일 생이 추월에 태어나 해자수를 만나는 것이니 금은 빛나고 물은 맑다고 한다. ^^
이 명조의 기신은 무엇이라고 봅니까? 황제 등극년과 사망년을 명리학적으로 설명한다면? 기타 그의 일생을 보고서 부대적 설명을 한다면?
통변보다 시급한 것이 제대로 금백수청, 벽갑인정, 목화통명과 같은 조후론, 격국론의 용신, 종기와 종세와 같은 억부론일진데....기본적인 지식이 붕괴되어 있는 상황에서 무슨 통변을 논하겠습니까? 일단 기본적인 지식의 기반을 세운다음에 통변을 논하지요. ^^
그동안 인간 말종이라 판단하여(스스로 악마라고 하면서 못된 짓을 다했으니..) 글도 읽지 않다가 명리학에 대해서 아는 체하길래 판을 깔아놓으니 헛소리나 지껄이는구료. 명리를 모르거든 그냥 한문선생이나 하시요.
양신성상격이네.금백수청도돼고.편인격도돼고.화토운이 기신인데 대운이 나쁘게흘러서 요절했네.
기신화가재라서 남방화운에 돈밝히다 돈때문에 인생조졌네.
병진대운에 뒤졌겠다.
여자도 밝혔네.전생의 나인가보다.나는 돈은 안밝히는데.
홍홍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