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인디안
- 모텔을 몇 달 운영하다 보니 의외로 인디안 손님들도 제법 많았다. 그곳에서는 이 인디안이라는 이름이 주는 이미지가 별로 좋지 않다고 해서 이들을 퍼스트 네이션 ( First Nation ) 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주로 드라이덴 주변 인디안 보호구역의 마을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곳을 밴드 ( Band ) 라고 부르며 그곳에는 밴드 대장이 있어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들은 시간만 나면 장을 보러 드라이덴에 와서는 이왕 온 김에 그들의 마을에선 구경도 못하는 술도 싫건 마시자고 작심하는듯 했다. “자빠진 김에 쉬어간다” “ 뽕도 따고 님도 보고” " 도랑 치고 가재 잡고 " 라는 우리 속담을 100프로 실천 하는 것은 좋은데 이로 인한 폐해 또한 적지 않았다.
- 이들은 그래도 도로가 있어 차를 타고 드라이덴에 올 수 있으니 큰 다행 이라고 했다. 이들 보다 더 먼곳, 길도 없는 곳에 사는 인디안들은 한 겨울에만 드라이덴 왕래가 가능하다고 했다. 평소에는 주변의 수많은 호수에 둘러쌓인 인디안 캠프( Band) 내에서만 생활하다 12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얼어버린 호수위로 차를 몰고 이곳까지 와서 부지런히 앞으로 1년간의 생활 필수품을 실어 나른다.
- 이들보다 더 멀고 외진 곳에 사는 인디안들은 최후 수단으로 경 비행기에 의존 한다고 했다. 그곳의 물가는 이곳 드라이덴의 평균 3배 가량이라고 했다. 정말 팍팍한 생활임을 말 안해도 알 수 있었다.
- 필자는 처음 이들을 만났을 때 진한 동포애를 느끼곤 했다. 우선 생김새가 우리와 너무 닮았다. 얼굴, 골격이며 피부색하며 얼핏 보면 우리네와 구별이 잘 안될 정도였다. 이들은 약 1만년에서 1만5천년전 ( 혹은 더 이전 ) 마지막 빙하기때 시베리아와 몽고 지방에서 살던 사람들이 얼어 붙은 베링해를 건너 북미대륙으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들의 일부는 북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해 우리가 통상 부르는 이름의 북미 인디안이 되었고 일부는 더 남쪽으로 내려가 중남미 토박이 인디안 ( 그곳에서는 이들을 “인디오”라고 부른다 ) 이 되었다. 과거 찬란했던 잉카와 마야문명이 이들에 의해 이뤄졌던 것이다.
- 자연친화적으로 소박한 삶을 영위하던 이들에게 어느날 소총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서구 백인들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갖은 회유와 감언이설로 이들의 땅을 빼앗는다. 그러다 여기에 응하지 않으면 인디안 전사들을 죽이고 마을을 불태워 초토화 했다. 부녀자와 어린이들까지 몰살을 시키기도 했다. 분노한 몇몇 인디안 부족들이 봉기해서 백인들과 정면충돌을 하기도 했지만 애초 이들은 백인들의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필자가 어렸을 때, 미국의 서부영화가 판을 칠 때, 인디안 대 부대의 공격으로 고립무원에 빠진 수비대가 거의 전멸하고 요새가 함락될 즈음에 나팔소리와 함께 구원군인 기병대가 들이닥치면 그 장면에서 예외없이 신나게 박수를 쳤던 기억이 난다.
- 그 당시를 회상 하면 거의 모든 영화가 백인은 선이고 인디안은 악의 화신들 처럼 그렸고 우리는 모두 이를 굳게 믿었던 것이다. 어떤 영화에는 인디안들이 백인 거주지에 들어와 부녀자와 어린이들까지 잔인하게 학살하는 장면도 많이 있었는데 이곳에 와서 우리 모텔의 고객인 인디안 ( First Nation ) 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이와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 지금까지도 이들에게는 “잔인한 백인들은 인디안 마을을 습격하면 집에 불을 지르고 부녀자를 겁탈하고 인디안 전사들을 죽여 그들의 두피를 벗겨 그것을 자랑스럽게 머리에 쓰고 다니기도 했다 ” 는 내용이 구전되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백인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품게 되는 이유다.
- 백인들의 압도적인 우위가 확정되고 더 이상 토착 인디안들의 저항이 없어지자 이젠 이들을 보호 해야 한다며 인디안 거주지를 만들어 그 안에서만 살게한다. 살 집과 겨우 먹고 살 정도의 돈 만 주고 그들을 그곳에 묶어 놓고 그곳을 벗어나면 그나마 혜택도 주지않는다. 일종의 고사작전으로 세월이 흐를수록 그곳은 황폐해지게 마련이다. 그야말로 굴러온 돌( 서구 백인들 ) 이 박힌 돌 ( 토착 인디안 ) 을 박살을 내어버린 것이다.
- 북미대륙 ( 주로 미국과 캐나다 ) 을 종횡으로 자유롭게 이동하며 주로 들소 < 미국에서는 버팔로 ( Buffalo ) 캐나다에서는 바이슨 ( Bison ) 이라 부른다 > 들을 사냥하며 수천년을 살아온 이들에게 애초에 국경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과 캐나다가 건국된 뒤에는 문제가 생겼다. 미국과 캐나다간 국경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미국과 캐나다정부가 합의한 것이 바로 인디안들의 생계형 자유왕래이다. 이 법은 아직도 유효해서 그 엄한 미국 국경통과도 이들은 여권이 없어도 양국이 발행한 인디안 증(證)만 보여주면 무사 통과라고 한다.
- 이들은 해마다 밴드마다 파우 와우 ( Pow Wow ) 라는그들 고유의 축제를 즐기는데 규모가 작은 곳은 수 십명에서 수 백명, 규모가 큰 곳은 천여명씩 모여 며칠간 행사를 벌린다. 이 때의 드라이덴 시는 각양각색의 복장을 한 이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물론 드라이덴의 모든 호텔과 모텔이 모두 빈방 없음 ( NO VACANCY ) 사인등이 켜지는 날이다.
- 당초 팀버랜드 모텔을 인수 할 때 전 주인 레나가 이들 인디안 고객들에 대하여 탐탁치 않게 말 하는것을 여러번 들었다. 그리고 옆집 엘리도 그들이라면 머리를 저었다. 한 마디로 공중 도덕을 모르고 예의없고 더러운게 그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를 보고 참고하라며 이 말도 해 주었다. Indians have two tongues ( 인디안은 거짖말쟁이다 ). 필자는 이들의 말을 그저 백인들이 인디안들에게 갖고있는 편견에서 기인 된 것이라고 믿고 귀 기울이지 않았다.
- 그러나 날이 가면서 그들을 대하는 빈도수가 늘면서 그리고 그들의 축제인 파우 와우를 겪으며 그들에 대한 동포애 같은 애초의 좋은 감정이 점점 사그러져 갔다. 그들이 묵고 간 방들은 예외없이 지저분했고 한명으로 체크인 하고 2-3명이 자고가기 예사였다.
- 더구나 성인 ( 특히 남자 ) 2명 이상이 묵어 갈 경우 술을 취하도록 마신후 시너나 본드등 환각제를 흡입해 그역한 냄새로 청소하는 우리 모텔 직원 뿐 아니라 다음 투숙 손님까지도 불쾌하게 하곤 했다. 그 냄새는 빨리 없어지지도 않아 어떤 손님은 아예 방을 바꿔줘야 하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 화재의 위험성도 컸다. 화장실 변기에 생리대를 투하해 변기가 막히는 일도 생기곤 했다.
- 꼭 엘리의 말 그대로 였다. 그렇게 첫 해를 보내며 그들에 대한 나의 감정은 애증의 교차였다. 그들의 설 땅을 빼았았고, 그대신 그들을 보호 한답시고, 강제로 인디안 마을에 거주케 하며 고사작전 (?) 을 펴는 백인들과 그렇다고 이렇게 자포자기 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이들 대부분의 캐나다 인디안 ( First Nation ) 들. 그렇다면 결국 백인들의 작전이 성공하는 것 아닌지?
첫댓글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인생이 바뀐다고 하죠.
핍박 받아 못먹고 못살면서 지속적으로 비하. 멸시 당하며 천박한 조상을 둔 불쌍하고 추한 인종이라 쇠뇌 교육까지 받으며 몇세대를 거치면 그렇게 밖에 생각을 할 수가 없고. 그런 행동이 당연하다 싶죠.
일제 36년도 난리인데 수백년씩 수탈, 핍박받는 남미, 인도...을 보시면 이해가 가죠.
천년 이전에 흩어져 이제는 서로 원수처럼 싸우는 동이족 후손들인 --스탄 민족들을 참고해 보세요.
당시 인디안 추장들이 7세대가 지나면 인디안들의 위상이 회복되기 시작하는데 복수하지는 말고 힘을 모아 지구를 지키라고 했답니다.
애증의 갈림 길에서 고민할 경우가 많습니다.
검운 머리는 모두 다 형제다 해놓고 막상 속썩이면 화부터 날때 호흡을 가다듬으며 진정을 ...정말 힘들어요
- 나쁜 예를 들었지만 착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지요.
- 후에 Native 소설가, 시인 그리고 그림 그리는 화가도 우리 단골이 되었지요.
- 그림으로 방값을 대신하기도해서 지금도 몇장 소지하고 있지요. 후에 명화로 인정되면 혹시 돈방석에...... ㅎㅎㅎㅎ
전 40평 정도 되는 12인용 인디안 텐트, 티피에 토론토대학 인디언 미술교수가 그려 준 것이 있는데 ...
인천공항에 비상 걸려 싸이렌이 울고 공항경찰들이 노트북 반 만한 자물쇠 두 개로 잠근 제 가방을 밀고 오며 방송을 하더라구요
간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방송국 팔고, 인디안 추장이 기러기 아빠 불쌍하다고 직접 만들어 준 것이라고...
이맘때쯤 텐트 안에 모닥불 피우고 영화처럼 바베큐 하면서 둘러 앉아 세상사도 말하고 노래도 부르면 그것만으로도 돈방석에 앉은 기분인데...
퇴촌 연예인 마을 옆에 살때는 긴 머리소녀 가수가 가끔 놀러 온 분들과 즉석 공연을 해 주기도...
본가의 형님이 귀하다고 20년 가까이 풀어 보지도 않으셨다네요.
쥐들의 보금자리라도 되지는 않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