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사회에 한인사회에 양쪽을 포교한 숭산스님.
미국인들과 한국인들을 동시에 포교한 숭산스님은 미주한국불교계의 도안, 대원, 법안스님들과는 달리 한 장소의 한 사찰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한 것이 아니었다. 숭산스님은 미국에서 가장 작은 주인 로드아일랜드 주 프로비덴스에 거점을 마련하는 한편 미국한인사회의 관문인 L.A.와 미국의 문화와 경제의 중심지인 뉴욕과 미중부의 중심도시 시카고에도 활동 거점을 마련하였다.
L.A.에는 1973년 2월 3일(음력 1월 1일)일에 달마사 개원 대법회를 하였다. 숭산스님이 보스톤 가기 전에 L.A.들렸는데 이때 인연 맺은 사람들이 1972년 10월에 준비위원들이 모여 숭산스님 문하인 한계정 포교사를 초청하여 주지로 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해 11월에 한계정, 송문영, 김종모, 김천련, 김준원씨등을 선임하고 삼보사 개원법회에 온 구산스님, 숭산스님, L.A.총영사, 한인회장을 비롯하여 100여명의 신자가 참석하였다. 이 달마사는 켈리포니아에서는 삼보사에 이어 두 번째이고 L.A.에서는 가장 먼저 설립된 한국사찰이었다. 달마사는 현재 고려사 원주로 있는 대도행 보살이 달마사 원주로 있을 때 달마사 신도들이 모금을 하여 집 3채를 사서 부지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수년 동안 신도들이 어렵게 모금하여 마련한 세채 중 한 채는 달마사의 분규로 인해 처분하였는데 이 부분은 참으로 아쉬운 순간이었다. 현재 L.A에는 올림픽 블로바드와 윌튼이 만나는 지점에 한국 전통식 대웅전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달마선원은 미국인들이 운영하는 선방이다.
뉴욕에는 당시 이미 가정법회형식으로 모임을 하던 최명심행 보살들의 요청으로 일본 홍법원에 있던 구윤각 스님을 불러들여 원각사 주지를 맡게 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구윤각스님이 원각사를 떠나자 숭산스님이 원각사 주지로 취임하여 L.A., 보스톤, 프로비덴스 등을 오가면서 원각사 신도들을 지도하다가 1976년 부처님 오신날 행사를 마치고 원각사 부주지로 있던 법안스님에게 주지를 넘겼다. 그후 원각사에 있던 미국인들과 강자구, 이순배, 최명심행(이선조) 보살등 숭산스님을 따르던 사람들과 1977년 맨하탄 31가에 조계사를 개원하였다. 이 조계사는 원각사와는 달리 한국인 신도들과 미국 불교인들이 함께 사용하였다.
또 시카고에는 1974년 5월 부처님 오신날 행사때 불타사에서 손지학스님이 숭산스님에게 출가하였기 때문에 불타사를 종종 방문하여 불타사에서 설법을 하면서 불타사가 자리를 빨리 잡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손지학스님에 의하면 숭산스님이 시카고 방문할 무렵 "언론에 숭산스님의 방문을 알리면 많은 사람들이 불타사에 모이곤 하였다"고 숭산스님의 방문이 불타사의 신도확보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숭산스님은 시카고를 방문할 때 마다 한국인 신자들 뿐만 아니라 1980년대에는 매년 시카고 방문하여 남방불교 지도자들 모아놓고 참선지도를 하였다. 이 지도로 인하여 인도제자도 생기고 미국사람으로 신부였다가 출가한 현도스님을 제자로 두기도 하였다. 수피이기도 하였던 난키드는 숭산스님 제자가 되어 현재까지 불타사에서 미국인들에게 참선을 지도하고 있다.
또 1993년 미국불교전래 100주년 기념으로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불교대회때 관음선종학교와 시카고 불교실업인협회(임대지) 콩그레스 호텔에서 가진 리셉션에서 호스트로 이 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초청하여 세계 각국에서 온 스님들과 불교지도자 100여명 참석하였다.
이외에도 숭산스님은 미국인들을 위하여 예일대학교가 있는 New Haven, L.A.의 달마선원, 버클리의 Empty Gate(공문사), 시애틀, 캔사스 시티, 캔터키 주의 렌싱턴 근교 등에 직접 혹은 숭산스님의 제자들에 의해 선원들이 들어섰다. The Kwan Um School of Zen은 이들 지역 외에도 플로리다주. 콜로라도주, 델라웨어주, 버지니아주, 네바다주. 위시콘스주, 인디애나 주, 아리조나주, 알칸사주, 뉴헴프셔주, 메인주 등 미국에만 30여개에 달한다.
이러한 거점을 중심으로 불교인들에게 가장 큰 행사인 '부천님 오신 날' 행사를 프로비덴스에서는 양력 4월 8일에 하고 뉴욕, 시카고를 거쳐 L.A., 달마사에서는 음력 4월 8일날 하였다.
이렇게 숭산스님은 한인 동포들과 미국사람들을 동시에 포교하였는데 숭산스님이 미국 젊은이들을 어떻게 포교하였고 미국인들의 반은이 어떠하였는지 아래 기사를 통해 알아보자.
숭산스님이 캔사스에 첫발을 디딘 1978년부터 1991년까지 일년에 한 차례씩 캔사스 선원을 방문하면, 안거를 이끌고 강연을 하고 선원의 식구들과 오붓한 시간을 갖기도 했었다. 스님의 방문 일정이 잡히면 선원 식구들은 다운타운에 스님의 방문을 알리는 포스터를 붙이고 주소록에 올라있는 식구들에게 편지를 띄우고 때로는 몇 날 밤을 새우면서 스님이 묵으실 방을 단장하기도 했다. 숭산스님의 방문은 작은 도시 로렌스에서 장안의 화제였다. 로렌스의 지역신문 Lawrence Journal World와 The University Daily Kansan은 숭산스님의 대중 법문을 여러번 기사로 다루었고 지역 라디오 방송에게도 숭산스님은 훌륭한 뉴스원이었다. 캔사스 대학의 대강당에서 주로 이뤄졌던 숭산스님의 대중법문은 늘 만원이었고 숭산스님이 지도하는 안거 역시 사람들로 북적였다. -----본지 127호
이렇게 숭산스님은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중의 하나인 미국이 좁다고 미주 전지역을 다니면서 선원을 세우고 선을 알리면서 미국사회에 불교를 널리 알렸다. 숭산스님의 초기 행적을 본지의 기록을 토대로 간단하게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972년 4월 숭산스님 미국입국.
1972년 9월 프로비덴스 홍법원 발족하고 현판식 가짐.
1972년 10월 L.A.달마사 건립을 위한 준비위원들이 달마사 건립을 위한 뜻을 모으고 숭산스님 제자 계정스님을 초청하여 주지로 함.
1972년 10월 계정스님 도미.
1972년 10월 10일 숭산스님 Providence Zen Center 개원.
1972년 11월 8일 숭산스님 미국인 재가 5계 수계식. Jacob Perl, Barbara Rhodes, Larry Rosenberg, Stephen Mitchell, George Bowman, Lincoln등
1973년 2월 3일(음력 1월 1일)달마사 개원 대법회를 함. 구산스님, 숭산스님 설법과 L.A.총영사, 한인회장을 비롯하여 100여명의 신자가 참석.
1973년 5월 6일 숭산스님, 계정스님 계사로 미국 최초로 수계법회. 25명 보살계 받음.
1974년 5월 프로비덴스 선원 장의사 건물 사서 확장 이전.
1974년 5월 손지학스님 시카고에서 숭산스님에게 출가. 당시 38세 --첫번째 출가자
1974년 6월 25일 김창식 신검도 총재 숭산스님 초청으로 미국 입국
1974년 숭산스님 카나다 토론토에 선원개설.
1974년 숭산스님 보스톤 케임브리지 선원 개설
1976년 1월 숭산스님 LA.달마선원 개원.
1976년 5월 9일 캘리포니아 지역 삼보사, 달마사, 관음사 3개 사찰이 공동주최 하여 제1회 합동법회를 박성배교수 사회로 L.A. 한국일보 소극장에서 L.A.한국일보 후원으로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숭산, 도안, 계정스님과 이한상 거사 등과 신도 4-5백명이 참석하였다. 이 행사는 도안스님이 제안하여 숭산스님과 이한상 거사가 찬동하여 이루어짐.
1976년 6월 보스톤에 김창씩 (원광선사)가 불교와 심검도 지도하는 심광사 개원
1976년 Stephen Mitchell(무각스님)이 미국에 온 후 그때까지 행한 숭산스님의 선문답 100개를 모아 'Dropping Ashes on the Buddha- 부처님께 재를 털면'이라는 책을 출판함.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한국선을 접하는 계기가 됨.
1977년 맨하탄 31가에 숭산스님, 강자구, 이순배, 이선조(최명심행)씨 등이 뉴욕 조계사 개원.
1978년 프로비덴스 선원 Cumberland에 있는 50에이커 양로원을 사 이전,
1979년 5월 프로비덴스 홍법원 현재의 장소로 이전.
1981년 미국인 무상스님 숭산스님으로부터 삭발 출가. 1983년 무승스님, 1985년 도안스님 순으로 출가
1981년 8월 숭산스님 관음선종 선포하고 김창식씨등 40여명에게 보살승 수계식을 함.
1982년 9월 숭산스님 미주 홍법 10주년 기념하는 대법회를 L.A.T.T.C. 강당에서 가짐. 탄허스님, 숭산스님과 세계 여러나라 스님들 참석. 또 프로비덴스 Cumberland 재미홍법원 본부에서는 세계종교지도자들을 초청 대한불교조계종 재미홍법원 10주년 기념 세계평화고승대법회 봉행. 본국 총무원장을 비롯하여 12개국 500여명 참석,
1982년 숭산스님의 달마통신에서 가려 뽑은 편찬한 책 Only Don't Know -The Teaching Letters of Zen Master Seung Sanh 출간.
1987년 프로비덴스 홍법원에서 세계평화와 경허 만공 선사상 선포를 위해 3년마다 한번씩 개최하는 제1회 세계일화( 世界一花, The Whole World is a Single Flower)대회 개최.
1992년 10월 10-11 프로비덴스 홍법원에서 숭산스님을 비롯하여 6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스님의 미주전법 20주년 기념식이 10일날 평화탑 준공식으로 시작하였다. 이 탑은 6바라밀을 상징하여 6각 지붕으로 된 7층 탑이다. 이 탑은 미국인들이 손수 설계하고 못질과 대패질을 하여 건립한 것이다. 이 행사에는 한국에서 벽암 강남측 총무원장, 원담 덕숭총림 방장, 화계사 주지 정수스님, 범조스님과 화계사 합창단, 미주에서는 도안스님, 담오스님 캐나다 양일스님, 광옥스님, 조계사 도명스님. 11일 오전에는 <급변하는 세계에서 불교의 역할>이란 주제로 페널 토의가 열렸다.
1999년 4월 6일 유니온 신학교에서 숭산스님을 초청하여 학장과 학생등 2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설법을 듣고 질의 응답을 함.
1999년 10월 9-10일유럽과 중국,일본,싱가포르,베트남, 홍콩,말레이지아 등과 미주에서 온 3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매 3년 마다 열리는 '제5차 세계일화대회-Whole World is a Single Flower Conferencer'가 로드아일랜드 주 컴버랜드에 있는 국제관음선원에서 열렸다.
한국의 전통불교고수와 미국사회에 적응화 모색
숭산스님은 미국에 한국불교를 전파하면서 한국의 전통불교 고수와 미국사회의 적응화라는 모순된 관계속에서 곡예 아닌 곡예를 하여야만 하였다. 시카고 거주 임대지 거사는 숭산스님의 오랜 신도로 숭산스님의 생일기념으로 8월에 프로비덴스 열리는 행사에 십 년 이상 가족들과 참석한 사람이다. 임대지 거사는 숭산스님이 철저하게 한국전통불교를 고수하면서 이 땅에 한국불교를 심기 위해 노력하였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홍법원도 조계종의 종헌종법에 따라 조계종 홍법원을 설립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숭산스님은 지금부터 15년 전인 1990년 본지와의 인터뷰때도 미국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중요한다고 주장하였고 숭산스님의 행적을 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이런 한 점을 확인할 수가 있다.
나는 한국 선(禪)을 통해 불교를 알리고자 노력해 왔는데 재래의 선, 승려의 수도를 위한 선은 포교에 적합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선의 일상화, 대중화를 통하지 않고는 광범위한 포교를 참되게 이룰 수가 없습니다. 한국불교가 대승불교라 하지만 까다로운 전통적인 선의 수행법은 소승적인 폐쇄성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포교대상이 되는 지역이나 국가의 문화와 새롭게 만난다는 개방적인 자세에서 포교의 방편을 찾아봐야 합니다."-본지 4월호에 실린 인텨뷰.
위와 같이 숭산스님은 미국에서 한국의 전통적인 방법이 미국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이를 창조적으로 변형하여 미국에 맞게 적용시켰다. 숭산스님은 어떻게 미국사회에 적응하였는가? 스님이 출가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인가하고 법복을 입게하며, 관음선종을 조직하고, 결혼한 사람들 중에서 일생을 불교를 위해 헌신할 사람들을 선별하여 보살승이라는 계를 주는 것 등은 기존의 조계종단에서는 인정할 수 없는 민감한 문제였다.
1982년은 숭산스님이 미국에 온지 10주년이 되는 해다. 이것을 기념해 두 번째 여름 결제가 끝난 그해 가을 9월 17- 19일 새로 짓고 단장한 Cumberland 재미홍법원 본부 Providence Zen Center에서 세계종교지도자들을 초청 대한불교조계종 재미홍법원 10주년 기념 세계평화고승대법회(Great Masters World Peace Assembly)를 봉행했다. 12개국에서 온 500여명의 불자가운데서 숭산스님이 제일 신경쓴 것은 특별초청한 한국조계종 총무원장과 25교구 본사 주지스님들이었다. 이들은 대개 숭산스님의 도반이거나 정화불교운동을 같이 한 동지들이었다. 10주년 기념법회는 이들에게 숭산스님의 미국불교포교 10년의 열매를 과시하고 인정받는 자리였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한국에서 온 조계종 중진스님들이 보기에, 숭산스님의 득도한 미국제자들이 키가 크고 몸매가 훌륭한데다 가상장삼을 걸치고 있으니 모양새가 그렇게 좋을 수 없는데, 아니 머리를 기르고 가운데는 아이들까지 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알아보니 보살승(菩薩僧)이라고 결혼해 세상에 살면서 보살운동을 하는 승려라고 했다. 한국불교미국개척사- 삼우스님
이 보살승에 대하여 임대지 거사는 이것은 숭산스님에게서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보살승 중의 한 사람인 심검도의 창시자로 보스톤에서 심광사를 운영하고 있는 원광스님 김창식씨는 "1977년때 지도법사를 받았고 1981년에 8월에 생일에 잔치할 때 관음선종 선포하고 처음 보살승할 때 40여명 받았다. 한국인으로는 유일하였는데 직접 숭산스님이 가사를 입혀주었다."고 주장했다. 이 외에도 숭산스님은 재가신자에게 숭산스님의 판단에 의하여 직접 깨달음을 인정하여 주기도 하고 재가신자들에게 법사복을 입게 하기도 하였다. 이 문제는 여전히 논란이 되는 부분이고 숭산스님이 비판받는 면이기도 하다. 또 숭산스님은 승속을 떠나 법사, 선도법사, 지도법사, 선사, 대선사 라는 제도를 두어 Kwam School of Zen을 운영하고 있다. 숭산스님은 이 제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일년 정도의 참선 수행뒤에 오계(五戒)를 주고 수계(受戒)후 2, 3년 정도의 정진이 있고 난 뒤 일반법사라는 초보적 지도 자격을 주고 일반법사 자격을 받은 뒤 5년의 열심의 수행이 있은 뒤 선도법사의 인가가 있고 몇 년간 선도법사로서의 수행과 지도활동을 한 뒤 대중법회에서 천칠백공안(空案)의 치열한 통과가 있은 뒤에야 비로소 지도법사라는 자격을 인정받게 되는 겁니다. 지도법사는 선방이나 선원을 직접 통괄 지도할 수 있는 자격을 뜻하기도 합니다."- 본지 4호에서 옮김. Kwam School of Zen에 따르면 현재 27명의 지도법사와 12명의 선사가 있다고 한다.
인가문제에 대해 숭산스님은 "재가나 출가의 구분이 수행과 정진의 차별을 가져올 수 없고 오도(吾道)의 분별을 낳을 수 없습니다. 원칙이 이러한데 승복을 입은자 만이 '깨달음'을 독점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고 득도의 지름길로 다가갈 수 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이분된 차별이 오히려 출가자의 불필요한 권위의식과 나아가서는 독선까지도 조장할 수 있는 법입니다. 선지식들의 말씀대로 불성은 개에게도, 똥묻은 막대기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게으른 출가자보다는 열심한 신도가 불법에 더 가까울 수 있고 그런 신도들은 수행자로서 격려해 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재가불자에 대한 '인가'도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지요. 과거의 예를 들더라도 유마거사나 병거사, 부솔거사가 모두 재가 불자로서 대덕못지 않은 인가를 불가로부터 받았었고 이조말의 대유, 추사 김정희 또한 당시의 고승 초의선사로부터 어느 선지식 못지않은 대우와 존경을 받으며 교분을 나누었지요. 설사 인가라는 형식이 불가에 속한 고유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인가의 대상이 될 깨달음의 높은 경지는 불가에만 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지 4월호에서 옮김.
이러한 스님의 사고를 반영하듯 승속을 가리지 않고 수행정도에 따라 여러 가지 직위를 부여하고 관음선종도 종단을 창설하였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스님은 관종선종이 종단이 아니고 <관음선종회>라는 신도단체라고 해명하였다. 그리고 지금도 관음선종측에서는 독립된 종단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Kwam School of Zen은 독립된 종단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고 본다. 운영도 미국에 맞게 운영이사회를 통하여 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전통식이 아니지만 미국의 법에 맞게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 가장 큰 불교단체인 샴?u라센터도 쵸감 트롱파 린포체가 미국식에 맞게 새로운 종단을 만들었고 이것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국조계종단에서 숭산스님 문도에게 화계사 운영하게 한 것은 숭산스님 활동에 조계종단에서 도움을 준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Kwam School of Zen에서 조계종을 너무 의식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제자들의 배출과 이들의 활동
숭산스님의 공적중에서 가장 큰 공적중의 하나는 뛰어난 제자들을 많이 두었다는 것이다. 이들이 미국의 각지에서 숭산스님의 뜻을 이어 불교를 전하고 실천하고 한국불교사상을 한국과 미국에서 널리 알리는 것이다. 사실 숭산스님도 불교권에서는 숭산스님이 널리 알려졌지만 한국사회 전반에 숭산스님이 알려진 것은 미국인 현각스님이 쓴 <만행>이 나온 이후였다. 즉 제자 현각이 숭산스님을 한국사회에 널리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숭산스님의 제자들은 'Dropping Ashes on the Buddha- 부처님께 재를 털면' 'Only Don't Know-오직 모를 뿐', The Compass of Zen- 선의 나침반, 'The Whole World is a Single Flower' 4권의 책은 널리 알려져 있고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왔다. 이외에도 Only Doing It for Sixty Years가 '오직 할 뿐'이란 제목으로 한국에서 출판되었다.
숭산스님은 미국인 출가제자만 해도 프로비덴스 홍법원 조실 대광스님, 무상사 조실 대봉스님, 숭산스님 시자스님으로 오랜동안 활동한 무심스님, 만행으로 널리 알려진 현각스님, 태고사 주지 무량스님, 그 외에도 무상스님을 비롯하여 10명이 넘는다. 스님이 세운 절만 해도 L.A. 달마사와 달마선원, 뉴욕, 조계사와 국제선원, 프로비덴스 홍법원, 보스톤 캠브리지 선원을 비롯하여 커네티컷 뉴헤이븐 등에 미주 주요 도시에 스님이 직접 선원을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잘 운영되고 있다. 이 외에도 시애틀, 토론토, 켄사스 시티, 버클리, 시카고 등지에 스님의 제자들이 선원을 운영하고 있다. 스님으로는 뉴욕 조계사 묘지스님, 시카고 불타사 현성스님등이 숭산스님의 직계 제자로 활동하고 있고 불타사 초대 주지였던 손지학 스님도 시카고에서 조용하게 정진하고 있다. 보스톤에서는 심검도 창시자 원광스님이 보살승으로서 심광사를 열고 있다.
숭산스님을 오랜동안 존경하며 따르는 미국에 사는 한국불교신자들도 많다. 미주에서 한국사찰을 가장 먼저 시작한 뉴욕불교의 개척자 고 최명심행 보살을 비롯하여 뉴욕지역의 이순배, 강자구 시카고 임대지 L.A 지역의 원만성보살, 손범락 거사, 오렌곤주 포틀랜드 원진법사 등이 숭산스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숭산스님의 건축불사
현재의 흥법원은 약 13만평인데 여기에 5백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숙박시설과 참선도량을 갖춘 건물을 75년에 짓기 시작하여 77년에 완성하였다. 이 건물에 큰 법당과 작은 법당이 각각 1개씩 있으며 지하는 식당, 1층과 2층에는 도서관, 출판실, 사무실 그리고 오십개의 방이 있다. 이 재원은 주로 미국인들한테 나왔는데 당시 싯가로 약 40만불이 들었다. 법당은 1978년 시작하여 2년 걸려 1979년에 완성하였는데 여기에 든 비용도 수십만 달러가 들었다. 1984년 여름에는 재일동포 정복실의 도움으로 청기와를 얹은 한국전통사찰이 프로비덴스 홍법원에 세워졌고 이름이 금강선사( Diamond Hill Zen Monastery)라고 붙여졌다. 이것은 완벽한 한국전통사찰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미국본토에 세원진 최의 한국 전통식 사찰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뒤를 이어 L.A. 달마사에서 목조로 한국전통사찰이 건립되었다. 또 홍법원의 또하나의 자랑인 평화탑은 숭산스님 미국전법 20주년 기념식이 있었던 1992년에 건립되었다.
숭산스님은 위와 같이 1972년부터 미주전법을 시작하여 미전역을 누비면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숭산스님은 일찍부터 당뇨병이 있어 많은 고통을 받았다. 그리하여 1999년 제5차 세계일화대회 참석 이후 더 이상 미국에서의 활동은 하지 않고 있다. L.A. 달마사 분규는 숭산스님에게 큰 상처지만, 숭산스님이 미주한국불교사에 기념비적인 활동을 한 스님이라는데에는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현재 서부대학교(University of West)에서 불교학 박사과정에 있는 김운하씨는 "숭산스님은 중국식 선풍이 아닌 제자들에게 깨침을 하는 방법을 미국식으로 계발하였다. 이분율을 깨치는 방법을 조사들 것을 따르되 거기에 그치지 않는 미국사람들에 맞는 방법을 개발하였다. 즉 숭산식으로 자기 방법론을 개발하였다고 본다. 또 거침없는 대답은 제자들에게 호감을 주었다고 본다."고 평가하였다. L.A. 관음사 도안스님은 "숭산스님은 자기관리를 잘 한 스님이다. 아침예불에 꼭 참석하고 108참회를 하고 좌선을 일관되게 하여 학생들이 군말없이 따라 하게 하였다. 그러나 선을 지도하는데 있어 질의 응답을 보면 공식화된 느낌이 있다. 부처님의 설법은 응기설법이었다. 사람에 따라 설법이 달랐다."라고 말했다.
동양에서 건너와 미주불교계에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은 많다. 이중에서도 일본의 스즈끼 다이세쯔, 티벳의 쵸감트롱파 린포체는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1969년에 미국에 온 쵸감트롱파 린포체는 스즈끼 다이세쯔와 교류하면서 샴발라센터를 조직하여 미국에 불교를 널리 알리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또 콜로라도 볼더에 나루빠 대학교를 만들어 티벳불교를 전파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동시대를 살았던 숭산스님도 교육기관을 만들었다면 오늘날 미주한국불교의 방향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아쉬웠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정달 법사
정달법사는 숭산스님이 프로비덴스에서 포교를 시작할 때 당시에 스님으로 홍법원에서 같이 생활을 한 사람이다. 정달법사를 통하여 당시 홍법원에서 숭산스님의 활동을 들어본다.
질문: 홍법원에 있었던 기간은 언제부터 언제까지입니까
정달법사:1973년 2월 7일부터 9월 25일까지 있었습니다. 프로비덴스 도일 에비뉴(Doyle Ave.) 134번지입니다. 홍법원이라고 거창하게 간판이 붙어있었지만 아주 슬럼가이었습니다. 흑인들이 마약을 먹고 병을 깨고 술을 마시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에 2 베드룸 아파트의 아래층을 빌려서 숭산스님과 저 그리고 미국인 5명이 살았습니다. 그때 김종선 교수가 도와서 이곳에 절을 하게 되었는데 이 김교수가 세탁소를 하였습니다. 당시 김 교수는 프로비덴스 주립대학교에서 동양사를 가르치고 그 부인은 유학생으로 온 사람인데 둘이 결혼하여 세탁소를 하였습니다. 이 세탁소에서는 드라이크리닝도 하고 코인 론드리 세탁소를 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저는 다르미 질을 하고 숭산스님은 이 세탁소 기계가 고장이 나면 고쳤습니다. 숭산스님은 파타임으로 기계가 고장나면 고치곤 하였는데 숭산스님은 공고출신으로 기계를 잘 알았습니다. 저는 다르미 질을 하면서 풀타임으로 일을 하면 세탁소와 이때부터 인연이 되었습니다. 숭산스님이 세탁소에서 일했다는 것은 기계 수리한 것입니다.
질문: 거기에서 신행생활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정달법사: 아침에 4시에 일어나면 숭산스님이 만들어 놓은 반야심경, 예불을 미국식으로 간단하게 만들어 삼정례하여 모시고 108참회를 한 다음 참선을 하였습니다. 예불을 마친 다음에 매일 (숭산스님이) 요령을 울리고 5분간 인텨뷰를 하였습니다. 이 방식이 한국식 하고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숭산스님이) '조사서래의 판치생모니'라 하고 물으면 미국인들이 어떤 사람은 '허 허'하고 박수를 치고 주먹을 휘드르고 할도 하고 방도 하는데 저에게는 거부 반응이 왔습니다. 한국선방에서는 탁마할 때 절대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견처나 득처가 있으면 문안을 드리고 묻고 대답하고 탁마를 합니다. 또 숭산스님이 애들에게 신비한 가르침이 있어야 하니까 '달마 플레이'라 하여 이 미국인들에게 최면을 걸었습니다. 최면이 걸린 사람들이 전생에 태국스님이었다. 한국스님이었다 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미국인들을 지도하였습니다. 또 숭산스님은 조사어록을 놓고 '한영사전'을 놓고 직역하여 지도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재떨이를 털다"하면 '재떨이'를 사전에서 찾고, '털다'를 사전에서 찾아서 이를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렇니까 많은 문제가 있던 방법이었지요.
낮에는 미국인들은 학교나 직장을 갖고 저녁 7시에 예불하고 참선을 하였습니다. 9시에는 잠을 잤습니다.
저는 당시 여러 가지 면에서 의아심이 많았습니다만 30여 년이 흐른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의 방편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징과 꽹과리를 치고 하였는데 이것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또 한가지 재미있었던 것은 제가 운전면허증 첫 시험에서 떨어졌는데 두 번째 보게 되었을 때 이 미국인들이 저의 합격을 기원하는 '관세음보살'을 약 30분 정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험을 보는데 시험관이 저에게 '한국의 어디에서 왔느냐? 부산, 군산, 대구 어디에서 왔느냐? 나는 부산에도 있었고 군산에도 있었다.'하면서 저를 친절하게 대해주어 마음이 편안해져 운전면허 시험에 무사이 합격하였습니다. 저는 이들에게 '당신들이 기도하여서 무사히 합격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신앙심도 깊고 순수하였습니다.
이때 생활은 모두가 한달에 $80를 내고 당번은 돌아가면서 하였습니다. 저는 당시에 몸이 아주 지친 상태였습니다. 몸이 피곤하여 일어나지 못하게 되자 숭산스님이 소 꼬리를 구해 조리를 해주어 몸에 원기를 넣어 주었습니다.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채식을 하였는데 이들에게 '수행자가 몸이 아프면 육식을 할 수도 있다. 이 몸이 있어야 도를 닦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양해를 구해주었습니다. 요즈음 소 꼬리를 먹어도 그때 같은 맛과 효과를 느끼지 못하는데 당시에는 큰 힘을 얻었습니다. 지금도 숭산스님에게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또 당시에 숭산스님은 한국에서 큰스님이고 저는 이름없는 젊은 스님인데 숭산스님이 미국인들에게 '이 스님은 나의 프렌드(친구)다'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저는 숭산스님이 많은 개화가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질문: 주말에는 어떻게 지냈습니까?
정달법사: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일요일은 용맹정진을 하였습니다. 특히 토요일 밤에 집중적으로 많이 하였습니다. 설법은 매주 토요일 저녁에 하였습니다. 일요일은 법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이때 브라운대학교 프르덴 교수를 알게되었는데 이 사람이 일본에서 3년간 일본 스님을 하였기 때문에 불교를 알고 일본말도 잘하였습니다. 그래서 숭산스님이 일본말로 설법을 하면 이 사람이 영어로 통역을 잘하였습니다. 프르덴 교수가 숭산스님이 포교에 큰 도움을 준 사람입니다.
질문: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하였습니까?
정달법사: 처음에는 10명, 15명 모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이 점점 불어나기 시작하여 여름에는 40-50명이 모여들어 장소가 비좁았습니다. 대개 브라운대학교와 주립대학교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정말 구름과 같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당시에 동양사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 타이밍이 잘 맞았습니다. 학생들이 숭산스님 흉내를 많이 냈습니다.
질문: 당시는 동양식품점도 많지 않았을 텐데 식사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정달법사: 당시에 프로비덴스에 한국식품점이 하나 있었는데 이곳에서 양배추를 사다가 소금에 절여서 고춧가루 넣어 김치를 만들었습니다. 밥을 하였고 살라드를 만들어 먹었습니다. 미국인들도 김치를 잘먹었습니다. 빵, 밥, 김치 살라드 등을 잘 먹었습니다.
질문: 방은 몇 개였고 공간 사용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정달법사: 방은 2개고 리빙룸이 있었습니다. 숭산스님 혼자 자고 저하고 제이콥이 한데 자고 베티하고 바리라는 여자들 둘이 한데 잤습니다. 여기서도 자고 저기서도 자고 하였지요.
[2004년 7월 169호]
첫댓글 숭산스님에 대해 이 글을 읽고 자세히 알았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불자님들 열심히 용맹정진하시어 성불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