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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제가 실시된 이후 각 지방에서는 문화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지역문화발전'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주민통합차원에서 다양한 문화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군산시는 개항 102주년을 맞는 바다를 낀 항구와, 군산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주변의 크고 작은 산들, 언제든지 철새를 볼 수 있는 금강 등
지리적 조건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문호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고장이기도
하다. 이 지역은 이처럼 풍부한 문화자원을 가지고 있다.
이 뛰어난 지리적, 문화적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자원화 하지 못하므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다행히도 금강 변에 철새조망대가 만들어지고
채만식 문학관이 개관을 해 많은 자료들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이처럼 자연적 조건과 주변여건들을 묶어 줄 수 있는 다양한 문화사업들이
진행될 때 문화선진도시로써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2001년 '지역문화의 해'를 맞이하여 군산을 대표하는 대문호 채만식의
대표적인 작품 "탁류"를 극으로 각색하여 공연함으로써 지역의 공연예술 창작
활동을 진작시키고 창작공연 작업의 활성화를 도모코자 하며
대내외적으로 '군산-문화의 도시(채만식)'의 이미지를 확고히 하고
시민들에게 소속감 및 자긍심을 고취케 한다.
⼑ 공 연 명 :
⼑ 일 시 : 2001년 10월 5일 (7시), 6일 (3시, 6시)
⼑ 장 소 : 군산 시민문화회관
⼑ 제작 및 출연
- 작 / 채 만 식 - 각 색 / 추 연 석
- 제 작 / 박 능 규 - 연 출 / 최 균
- 기 획 / 박 능 규 - 조연출 / 노 용 성
- 감 수 / 이 혜 자 - 무대감독 / 조 승 철
- 무대미술 / 송 칠 성
- 출 연 / 편성후, 추미경,
김영진, 채은희, 박해윤, 곽순선
송재명 외 8명
⼑ 주 최 : 극단 사람세상
⼑ 후 원 : 군산시,
전라북도, 군산예총, 한국연극협회 군산지부
⼑ 협 찬 : 군산현대스포츠센터, 대성병원, 원우건설
채만식(1902~1950년)의 '탁류'는 우리나라 풍자소설의 대명사이다. 식민지 시기
순정적인 여인 초봉의 인생 몰락을, 전라도 사투리가 짙게 밴 특유의 냉소와 욕설로써
절묘하게 풀어간 수준 높은 작품이다. 채만식의 매력은 날카로운 사회의식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직접적 고발이 아닌 간접적 풍자로 소화해낸 점이었다.
이것은 일제의 냉혹한 탄압이 존재했던 당시 식민지 문학인이 현실을 고발할 수 있는
몇 안돼는 대안 가운데 하나였다.
가혹한 독재의 시기였던 70년대에 채만식이 새삼 주목을 받게된 것은
이같은 점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 소설의 무대는 탁류가 흐르는 금강하구의 군산이다.
몰반 정주사의 딸 초봉은 자기 집의 하숙생 남승재와 사랑에 빠지지만
당장의 물질적 도움을 기대하는 정주사의 강권에 의해 은행원 고태수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결혼한지 얼마돼지 않아 고태수는 정을 통하던 여인의 남편에 맞아 죽는다.
초봉은 꼽추 장형보에게 겁탈 당한 뒤 약국주인 박제호의 첩으로 들어앉는다.
그리고 얼마 후 초봉은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르는 딸을 낳는다.
박제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초봉에게 싫증을 느끼고 그녀를 꼽추 장형보에게 넘긴다.
초봉은 자기 신세를 서러워하면서도 친정의 궁핍한 살림을 돌보기 위해 장형보에게 몸을 맡긴다.
그러던 어느날 초봉은 장형보가 딸에게 함부로 구는 것을 참지 못하고 장형보를 살해한다.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으나 옛 연인 남승재와 여동생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 작품에서 정주사, 고태수, 박제호, 장형보는 모두 속물화하고 타락한 1930년대 한국사회의
인간상들이다. 이들은 초봉을 이용하고 탐하며 짓밟는다.
그리고 효용 가치가 없다 싶으면 여지없이 그녀를 버린다.
채만식은 소설에서 이 속물들을 그만의 장기인 풍자로써 꼬집는다.
순결한 여인 초봉을 농락하는 이 사회가 채만식이 말하고자하는 탁류이다.
그런데도 초봉은 끝까지 이같은 탁류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채만식은 남승재와 그의 연인 계봉에게 탁류를 헤치고 살아야 하는 시대적 사명을 부여한다.
「탁류」의 작가 채만식.
그는 우리나라 문학사에 있어 풍자와
시니시즘을 개척한 개성있는 작가로
평가된다.
◇ 인간과 생애
채만식은 1902년 군산시 임피면 취산리에서 부친 채규섭(蔡奎燮)과 모친 조우섭 사이의
5남1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서당에서 천자문과 동몽선습 소학 사서삼경 등을
깨우쳤으며 9세가 되어서야 임피보통학교에 입학, 신학문을 접하게 된다.
1918년 서울로 유학, 중앙고보(中央高普)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부속 제일 와세다 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관동대지진과 가정의 어려움으로 1년6개월만에 학업을 단념하고
1923년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취직하게 된다. 이때 조선문단에
단편「세길로」를 발표, 문단에 데뷔한다.
1926년에는 조선일보로, 이후 개벽사(開闢社)로 자리를 옮긴다.
이에 앞서 그는 중앙고보 2학년인 18세때 집안의 강권으로
한살위인 함라면 은선흥(殷善興)과 결혼, 3남매를 두었으나 인연을 끊다시피 하고
숙명여고 출신인 둘째부인 김씨영(金氏榮)과 재혼한다.
34세때인 1935년 서울에서의 기자생활을 청산하고 개성으로 가서
중형 준식(俊植)의 금광업을 도우며 창작에 몰두한다.
1938년에는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해 서울로 피신했다가 1945년 봄 일제의 탄압에 못이겨
고향 임피로 돌아와 8·15 해방을 맞는다. 이 해에 아버지와 큰아들의 상을 당하게 된다.
1949년 6월 탁류의 인세수입 37원과 몇편 소설의 원고료를 합해
익산시 주현동에 난생 처음 집을 마련한다. 그러나 무리한 집필로 폐환이 악화돼
감당키 어려운 치료비 때문에 집을 처분하고 나머지 돈으로 마동 269번지에
반토담집 초가를 사서 이사한다.
그해 6월 6·25사변이 발발하기 보름전인 1950년6월 11일 4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 가난과 질병의 외로운 생활
소설가 홍석영(前 원광대교수)의 말처럼 「작가 채만식의 길지 않은 생애는
가난과 질병과 싸우면서 온몸으로 문학과 대결해온 고독한 생활」이었다.
그는 초혼의 실패로 가정생활 역시 불우했다. 그러면서도 불패의 자유분방한 기질을
지니고 있어 중학시절 축구선수였으며 대학에서는 학교대표선수를 맡기도 했다.
그는 꽃을 지극히 사랑한 반면 심한 결벽증이 있었다.
그의 완벽증은 작품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작품마다 신경질적일 만큼
세심한 솜씨를 보여 부호 하나라도 허술히 하지 않았으며 문장 서술에 있어서도
철저히 냉정함을 유지하였다.
그러한 직설적인 태도는 문단생활에도 그대로 드러나 교제가 깊은 문인들이 많지 않았다.
백철(白鐵), 이무영(李無影), 최정희(崔貞熙) 정도와 친하게 지냈으며
제자 역시 최태응(崔泰應) 한사람에 그쳤다.
그는 한때 동반작가(同伴作家)의 위치에 있었으나 어떤 조직이나 이데올로기에 묶이는 걸
한사코 싫어했다. 그는 기회 있을때마다 「우리 민족은 우리 민족 나름대로의
특수한 생활과 이데올로기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여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끝내 거부했고 단발령에도 맞섰다.
그러한 그도 일제말기에는 일제의 전시체제에 순응하는 글을 몇 편 남겼으며
훗날 민족의 죄인이라는 글을 써서 자책하기도 했다.
◇ 문학세계
채만식의 작품은 소설 87편, 희곡 28편, 산문 평론 수필 등 3백45편에 이른다.
그는 소설 뿐 아니라 희곡분야에 까지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정작 무대에 올려진 희곡은 1편 뿐이었다. 일반적으로 그에 대해서는
풍자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김유정(金裕貞) 이상(李箱) 등과 함께 풍자적 방법으로
문학사상 특별한 경지를 개척함으로써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의 문학을 이해하는데 있어 대표할만한 장편소설로 「탁류」「태평천하」「금의 정열」을
들수 있고, 단편으로는 「레디메이드 인생」「소망(小妄)」「치숙(痴淑)」 등을 꼽을수 있다.
주제면에서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세태를 사실적으로 그린 것과 지식인의 암담한 생활을
시니컬하게 표현한 내용으로 나눌수 있다.
▲ 1902년 군산시 임피면에서 출생.
아호는 백릉(白菱) 또는 채옹(菜翁)
▲ 1914년 임피보통학교 4년 졸업
▲ 1922년 서울 중앙고보 졸업과 와세다대
부속 고등학원 입학
▲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중단하고
귀국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입사
▲ 1925년 단편 「세길로」조선문단
추천 받음
▲ 1926년 조선일보 학예부기자로 옮김
▲ 1932년 개벽사 기자로 입사
▲ 1934년 조선일보에「인형의 집을 나와서」를 연재.
단편「레디메이드
인생」발표
▲ 1936년 단편「심봉사」문장지에 발표.
그러나 총독부의 검열로 전문 삭제됨
▲ 1937년 조선일보에 장편「탁류」연재
▲ 1939년 장편「천하태평」 발표
▲ 1945년 일제의 탄압에 견디지 못해
고향인 임피로 이사
▲ 1946년 익산시 고현동으로 옮기고 중편
「민족의 죄인」
「허생전」등 발표
▲ 1950년 6·25사변 발발 2주전에 폐환으로 별세.
미완성 장편 「소」를 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