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9년 3월 4일
타임사-워너영화사 합병 발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을 발행하고 있는
타임사와 3대 영화사에 속하는 워너 브러
더스의 모회사인 워너 커뮤니케이션사가
합병, 자산규모 1백89억달러의 세계최대
의 언론-흥행 통합 메머드 회사를 설립한다
고 두 회사가 1989년 3월 4일 공동발표
했다.
▶ 2003년조선일보 강인선 기자,
이라크전 취재 차 쿠웨이트 급파
▶2003년필리핀 다바오 국제공항 폭탄테러,
19명 사망 114명 부상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섬의 다바오 국제공항에서
2003년 3월 4일 발생한 폭탄테러로 부상당한 어린
소년이 인근 병원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고 있다.
필리핀 남부의 다바오 국제공항에서 4일 오후 5시15분(한국시각 오후 6시15분) 강력한 폭탄 테러가 발생, 최소한 19명이 숨지고 114명이 부상했다고 현지 관리들이 밝혔다. 한 라디오방송은 사망자 수가 30명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이날 테러는 공항 여객터미널 외곽에 있는 대기실에서 발생했다. 사고 후 앰뷸런스 등 응급차량들이 공항 외곽 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상자들을 병원으로 후송했으며, 경찰은 즉각 공항을 폐쇄했으며 무장군인들이 경계를 섰다.
거의 같은 시각 다바오의 버스 터미널에서도 폭탄 폭발이 일어나 3명이 부상을 입었다.
글로리아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은 폭탄공격을 “파렴치한 테러” 라고 비난하고 비상각료회의를 소집했다.
▶2002년이브라힘 루고바,
코소보 초대 대통령에 당선
▶2002년조요한 전 숭실대 총장 별세
▶2001년서울 홍제동에서 진화작업을 하던
소방관 6명 사망
▶ 2000년 3월 4일.
플레이스테이션 2가 출시되다.
플레이스테이션 시리즈 중에 가장 많이 판매된 제품으로
우리나라에서는 2년 뒤인 2002년 2월 22일 발매되었다.
▶1995년한국-체코 과학기술협력협정 체결
▶1989년 3월 4일 타임사-워너영화사 합병 발표
타임워너사 제럴드 레빈 회장.
▶1989년근로자 주44시간 노동제 결정
▶1983년미국, 북한UN대표 재입국 허용
▶1982년사병 복부기간 30개월로
단축키로(84년까지 단계적)
▶1980년아프가니스탄
회교반군 파키스탄에 망명정부 구성
▶1979년미국-중공간 7개년 통상협정 체결
▶1977년루마니아를 비롯한
발칸반도 강진으로 1541명 사망
▶1977년세이무어 크레이, 프레온 냉각방식을
적용한 크레이-1 슈퍼컴퓨터 개발
▶1977년특허국, 특허청으로 승격
▶1976년북한 모잠비크에 군사고문단 파견
▶1975년찰리 채플린 기사 작위 수여
▶1973년제주 우도 무장간첩사건
수색중인 국군 [사진:중앙일보]
▶1973년일요일 우편 배달제 폐지
▶1971년한미 합동공수기동훈련(프리덤볼트작전)개시
▶1966년일본 하네다 공항서
캐나다 여객기 폭발 , 64명 사망
▶1962년미국 남극 원자력발전소 조업 개시
▶1958년충북선 명암터널 개통
▶1957년세레베스도 반군,
인도네시아 정부에 자치권 요구
▶1956년모로코, 메뚜기떼와의 전쟁
▶1956년영국회사, 알래스카 석유 채굴
▶1951년제1회 아시아경기대회 인도 뉴델리서 개막
20개 가맹국을 상징하는 20개의 동그라미로 되어있는 아시아경기대회의 휘장.
▶1949년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 퇴임, 후임에 비신스키
▶1933년루스벨트 제32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
▶ 1918년 오늘,
스페인 독감의 첫 번 째 사례가 발생
1918년에 처음 발생해 2년 동안 전세계에서 2500만~5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간 독감을 말한다. 14세기 중기 페스트가 유럽 전역을 휩쓸었을 때보다도 훨씬 많은 사망자가 발생해 지금까지도 인류 최대의 재앙으로 불린다.
원어명La Grippe
스페인독감이 정확히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학자들은 1918년 여름 악성 독감이 동시 다발적으로 유행하고, 첫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에 독감 이름을 스페인독감으로 부르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독감이 처음 보고된 것은 1918년 초여름이다. 당시 프랑스에 주둔하던 미군 병영에서 독감 환자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나, 특별한 증상이 없어 별로 주목을 끌지는 못하였다. 같은 해 8월 첫 사망자가 나오고, 이 때부터 급속하게 번지면서 치명적인 독감으로 발전하였다.
곧이어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미군들이 귀환하면서 9월에는 미국에까지 확산되었다. 9월 12일 미국에서 첫 환자가 발생한 지 한 달 만에 2만 4000명의 미군이 독감으로 죽고, 총 50만 명의 미국인이 죽었다. 1919년 봄에는 영국에서만 15만 명이 죽고, 2년 동안 전 세계에서 2500만~5000만 명이 죽었다.
한국에서도 740만 명이 감염되었으며 감염된 이들 중 14만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에는 바이러스를 분리·보존하는 기술이 없어 그동안 스페인독감의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2005년 미국의 한 연구팀이 알래스카에 묻혀 있던 한 여성의 폐 조직에서 스페인독감 바이러스를 분리해 재생하는 데 성공하였다. 재생 결과 이 바이러스는 인플루엔자 A형 중 h4N1형으로 확인되었다.
▶1913년윌슨 미국 대통령에 취임
▶1909년민적법(현행 호적법의 효시) 공포
▶1892년이광수 출생
일제 강점기에서 가장 악질의
친일 문학가로 손꼽히는 인물.
이광수야 대한민국 최초의 신소설 ‘무정’을 발표하고, 2.8 독립선언서를 쓰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파로 변절한 것이야 모두들 다 아는 이야기일터이니 이는 배제하고 모르는 이야기들을 하도록 해볼까한다.
-. 그는 소년 인권에 관심이 많았다. 소파 방정환과도 친밀감이 있었으며 그는 평생토록 어느 누구에게도 어리다고 반말을 하지 않았으며, 평생 존대를 했다.
-. 자유연애주의자로 첫부인 백혜숙과 사랑없는 중매결혼을 한 것에 스스로 인정않고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 와세다대 유학시절 의과대학 다니던 허영숙과 연애를 하던 중에 나혜석과 동시에 연애를 한다. 나혜석이 자신과 같은 자유연애주의자임에 기쁘하여 나혜석과 결혼을 꿈꿨으나 허영숙과 연애중임을 안 그녀의 오빠가 강하게 반발하여 무산되고 만다. 나혜석은 훗날 파리에서 삼일운동 지도자 33인 중 한명이며 변절하는 최린과 연애하게 되고 그로인해 남편과 이혼을 하나 나혜석의 자유연애주의에 불안감을 느낀 최린은 그녀와 결혼을 포기하고 이에 나혜석은 최린을 정조유린죄로 고소한다. 물론 패소하지만.
-. 단재 신채호의 영어 선생을 하기도 했다. 본래 김규식이 영어 선생이었는데 (당대 영어로는 넘버원이 김규식이었다) 신채호는 Sometime를 소메티메로 읽고, I am a boy를 I는 am a boy하여슬람. 이라고 읽으니 이에 빡친 김규식이 영어선생 자리를 때려치웠는데 신채호가 ‘발음은 필요없고 뜻만 알려주면 된다’며 김규식을 붙잡는 통에 김규식이 일본 시절 친하게 지냈던 이광수를 소개시켜줬다.
-. 그는 수익이었던 원고료 등으로 신한청년당, 임시정부 등에 적극적으로 재정적 지원을 하였으나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그가 재정적으로 곤경에 처하자 임시정부 역시 함께 곤란에 처하였다. 그 정도로 임정에 대한 그의 경제적 지원은 매우 컸다.
-. 그의 변절의 시작이라고 보는 ‘개벽’에 실린 민족개조론에서 그가 본 조선민족성은 ‘허위되고 공상과 공론만 즐겨 나태하고 서로 신의와 충성이 없고, 일에 임하여 용기가 없고, 빈궁하고’ 등으로 보았다.
-. 그는 인생 롤모델이 도산 안창호 선생이었다. 그는 안창호가 구속되었을 때 그를 구명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타협적 민족주의(자치론)을 주장은 하였을뿐 적극적으로 친일행위를 하지 않던 시기라 조선총독부에 연줄이 없어 그의 노력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 자치론을 주장하긴 했지만 그는 동아일보에 ‘단종애사’를 연재하면서 단종을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받는 백성으로, 사육신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한명회, 신숙주를 친일파 관료로, 수양대군을 일본 천황으로 묘사하는 등 ‘민족적 경륜’을 발표한 것이 바로 변절을 한 것은 아니었다.
-. 그는 한번도에서 열린 최초의 미스코리아 대회의 심사위원을 맡았다.
-. 이순신 가문이 가난하게 사는 것에 분개하여 그들을 돕고자 쓴 소설이 ‘이순신전’이고, 여기에 더하여 그는 당시 갑부였던 윤치호(당시 친일파)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그들을 금전적으로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윤치호는 이광수의 청으로 이순신 가문을 재정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이순신전’ 원고료는 모두 이순신 가문에 모두 전달하였다.
-. 해방 이후 이광수는 ‘도산 안창호’ 평전을 썼으며,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의 윤문 작업에 참여하였다. 우리가 읽고 있는 백범일지는 이광수의 윤문으로 된 글을 읽고 있는 것이다. 이는 김구가 이광수에게 요청한 것이다.
-. 이광수는 해방 이후 ‘자열서’를 통하여 자신의 친일을 반성하고 잘못을 고한 최남선과는 다르게 ‘나의 고백’, ‘친일파의 변’을 통하여 자신의 친일은 민족을 위한 것이라는 궤변을 일삼았으며, 이는 훗날 반민특위에 잡혔을 때도 동일하였다. 그는 조선초어독부가 조선인 38,000명의 명단을 보여주며 친일을 안하면 이들을 다 죽이겠다고 하여 민족을 위해 했다는 말도 하기도 했다. 그 명단은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 문단의 거두 박태원을 발굴한 것이 이광수이고, 소학교에 다니던 어린 아이의 글을 보고 너는 명문가가 되겠다하여 그를 적극 지원했는데 그 아이가 피천득이었고, 시 창작대회에서 참가자 김영랑이 자신의 시가 마음에 들지 않아 휴지통에 버리고 대회 불참을 하려고 하자 그의 시를 보고 넌 시인이 되겠다하여 그를 시단으로 끌어 들인 사람 또한 이광수다.
-. 한민족은 단일 민족이라고 처음 이야기하였다. 이는 일본이 내세웠던 내선일체에 쉽게 융화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광수 전까지 기본적 상식은 다민족, 다종족 국가였다.
▶1889년청나라, 서태후 들어앉고 덕종제친정
▶1889년미국 카톨릭 성직자 스펠만 출생
▶1883년미국 정치가 알렉산더 스티븐스 사망
▶1866년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으로 프랑스 신부 베르네 순교 (병인박해)
▶1852년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고골리 사망
러시아 문학에 큰 영향을 끼친 러시아 소설가
니콜라이 고골리.
고골(고골리) [Gogol, Nikolai Vasilievich, 1809.3.31~1852.3.4]
러시아의 소설가 겸 극작가 니콜라이 바실레비치 고골리가 1852년 3월 4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43세였다. 우크라이나에서 소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고골리는 어려서부터 문학에 재능을 보였으나 관리로서 꿈을 펼치고자 했다. 하급관리 생활 중에도 틈틈이 신문이나 잡지 등에 글을 투고했다.
1830년 `이반 쿠팔라의 전야`로 각광을 받은 그는 농촌을 무대로 한 단편소설집 `다칸키 근교 농촌 야화`로 문단에 그의 지평을 넓혀나갔다.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가운데 하나인 소설 `죽은 넋`은 제1부만 완성되고 2부는 미완성인 채로만 남아 있어 오늘날 그의 이름은 주로 희곡 `검찰관`과 중편소설 `외투`로만 기억되고 있다. 관료사회의 악을 폭로한 `검찰관`으로 그는 지배 계급의 반발을 사 서유럽으로 피신해야 했다.
10여년 동안을 거의 서유럽 특히 로마에서 보냈으며 이 기간에 대작 `죽은 넋` 1부와 최고의 걸작 `외투`(1842)를 완성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우리는 모두 고골리의 `외투`에서 태어났다"고 말했을 만큼 고골리는 러시아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인간의 악을 풍자적으로 그린 `죽은 넋 1부`와는 반대되는 도덕적인 인간과 갱생하는 인간을 그려보려 했던 `죽은 넋 2부`는 그를 끊임없이 괴롭혀 정신착란에까지 빠지게 했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이날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작품은 중국 루쉰(魯迅)에게도 영향을 끼쳐 `아큐정전`이나 `광인일기` 등에 그의 흔적이 묻어나오고 있다.
▶1832년이집트학의 비조로 꼽히는 프랑스 문헌학자 장프랑수아 샹폴리옹 사망
이집트학(Egyptology).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고대 이집트의 언어 역사 문화 등에 관한 전문연구 분야를 일컫는 말로 19~20세기초 유럽과 북미를 풍미했던 학문이다. 고대 이집트에 대한 관심은 그리스시대부터 있었지만 학문적 연구는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중 발견된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을 근원으로 해서 이뤄졌다.
이 돌에서 고대 이집트 문자인 상형문자(象形文字)를 해독해 낸 사람은 프랑스 문헌학자 J.F.샹폴리옹이었다. 그가 이집트 문명의 수수께끼를 풀어낸 이후 이집트학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다. 이집트학의 전기를 마련한 샹폴리옹이 1832년 오늘 타계했다. 42세였다.
로제타 스톤 해독은 고고학 최고의 성과였다. 고대 이집트의 신비와 미스터리의 매듭을 한꺼번에 풀어냈다. 가로 72㎝, 높이 114㎝, 두께 30㎝의 이 현무암은 1799년 알렉산드리아에서 56㎞ 떨어진 지중해변 작은 마을 로제타(아랍어로는 라시드)에서 프랑스군에 의해 발견됐다. 여기에는 서로 다른 이집트 문자와 그리스어가 새겨져 있었다. 고대 이집트어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시대였다.
나폴레옹은 이집트원정에 고고학자 지리학자 시인 화가 등을 동원, 이집트 고대 유물까지 ‘원정’했다. 원정대는 고대이집트어 자료 사본을 만들어 먼저 파리로 보냈다. 이미 중근동 언어에 익숙했던 샹폴리옹은 1808년부터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한다. 이집트 상형문자를 하나씩 대조하고 짜맞추는 퍼즐과도 같은 작업 끝에 드디어 신비에 쌓인 이집트문자를 해독하게 된다. 1822년, 그의 나이 32살이었다. 젊은 연구자의 열정이 이집트로 가는 길을 활짝 열어젖힌 셈이다.
샹폴리옹은 로제타 스톤이 알렉산드리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한 영국군에 의해 대영박물관으로 옮겨지는 바람에 정작 실물은 보지 못했다.
▶1789년미국 연방의회 뉴욕시에서 개원되고 연방헌법 발효
▶1678년이탈리아 작곡가 비발디 출생
안토니오 비발디
이탈리아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 Antonio Vivaldi )이탈리아 베네치아 에서 출생 (~1741년 07월 28일 오스트리아 빈 에서 사망)
기악곡 사계, 성악곡 스타바트 마테르 등
근대 바이올린 협주곡 양식을 정착시킨 이탈리아 바로크 음악의 거장이다. 바다의 폭풍,즐거움, 밤, 귀염둥이, 의심, 불안, 안식,애인등이다.
특히 사계에는 봄, 여름, 가을,겨울이라는 제목 외에 각 계절의 모습과 풍광을 묘사한 소네트
(정형 서정시)를 붙여 '음(音)으로 그린 풍경화'를 만들었다.
▶1394년포르투갈 항해왕자 엔리케 출생
▶ 1193년 이슬람의 영웅, 술탄 살라딘 사망
살라딘(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Saladin(Salah al-Din Yusuf Ibn Ayyub), 1137/38~1193.3.4]
이슬람의 술탄.
이집트·시리아·예멘·팔레스타인을 통치했으며 아이유브 왕조를 창건했다. 가장 유명한 이슬람의 영웅이기도 하다. 대(對)십자군전쟁에서 예루살렘을 탈환해(1187. 10. 2) 88년간의 프랑크족에 의한 점령통치를 끝냈다. 살라흐의 군사전략은 제3차 십자군전쟁을 일으킨 그리스도교 측의 대반격을 곤경에 빠뜨렸다.
살라흐는 쿠르드족의 저명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던 날 밤, 그의 아버지 나즘 앗 딘 아이유브는 가족을 데리고 알레포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북부 시리아의 강력한 투르크 총독, 이마드 앗 딘 장기 이븐 아크 손쿠르 군대에 입대했다. 발베크와 다마스쿠스에서 성장하는 동안 살라흐는 군사훈련보다는 종교공부에 더 많은 흥미를 가진 평범한 청년이었던 듯하다.
그의 공식적인 경력은 그가 장기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아미르 누레딘 휘하에서 중요 군사지휘관으로 있던 그의 삼촌인 아사드 앗 딘 시르쿠의 참모로 활동하면서 시작되었다. 제1차 십자군이 세운 라틴-그리스도교계(프랑크족) 번국(藩國)들에 이집트가 패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시르쿠가 군대를 이끌고 3번에 걸쳐 이집트로 원정하는 동안 이집트에서는 예루살렘의 라틴계 왕인 아말릭 1세와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유력한 대신인 샤와르, 그리고 시르쿠 3자(者) 사이에 복잡한 투쟁이 진행되었다. 시르쿠가 죽고 샤와르가 암살당한 뒤 살라딘은 1169년 31세의 나이로 시리아 군사령관과 이집트의 와지르(총리)로 임명되었다. 그가 비교적 빨리 권력의 자리에 부상한 것은 쿠르드족의 동족등용 관습은 물론 그 자신의 두드러진 재능 때문이었다. 살라흐는 일반적으로 술탄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이집트의 와지르로서 실제로 왕(malik)의 칭호를 받은 사람이 었다.
1171년 살라흐가 시아파 파티마 칼리프 왕조를 폐지하고 이집트의 수니파 복귀를 선언하여, 결국 이집트의 유일한 통치자가 됨으로써 그의 지위는 더욱 강화되었다. 그는 이론적으로는 한동안 누레딘의 봉신(封臣)으로 남아 있었지만 이러한 관계는 1174년에 누레딘이 죽으면서 끝이 났다. 이집트의 방대한 농경지를 재정 기반으로 삼아 살라흐는 소규모이지만 잘 훈련된 군대를 이끌고 시리아로 와서 누레딘의 어린 아들을 대신하는 섭정직을 요구했다. 그러나 곧 이러한 요구를 포기하고 1174~86년 살라흐는 자신의 기치하에 시리아, 북부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등 모든 이슬람교도 영토의 통합을 열심히 추진했다. 그는 능란한 외교술을 구사하고 필요시에는 기민하고 결단력 있게 군사력을 사용하여 그 과업을 완수했다. 허례와 방탕과 잔인성은 찾아볼 수 없고 아량 있고 도덕적이면서도 확고한 통치자로서 그의 명성은 점차 높아갔다. 그때까지 이슬람교도들이 상호간의 심각한 불화와 격심한 경쟁 때문에 십자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살라흐의 일관된 목적의식 아래 이슬람교도들은 육체적·정신적으로 재무장되었다.
살라흐의 모든 행동은 '성전'(jihād:그리스도교도들의 십자군에 상응하는 이슬람교도의 싸움)이라는 사상에 대한 강렬하고 확고한 헌신에 의해 영감을 받았다(→ 지하드). 이슬람 종교제도의 증가와 전파를 장려한 것은 그의 정책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살라흐는 학자와 설교자들을 널리 불러모았고 그들이 활동할 대학들과 사원들을 설립했으며, 그들에게 특별히 '성전'을 선양하는 작품을 쓰도록 의뢰했다. 그의 생활방식의 진면목이었던 도덕적 쇄신을 통해 살라흐는 그의 통치영역 내에서 5세기 전 최초의 이슬람 세대들이 당시 세계의 절반을 정복할 때 아주 소중하게 경험했던 열의와 감격을 어느 정도 재창출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살라흐는 새롭고 개선된 군사기술을 도입하는 것보다는 제멋대로인 많은 군사를 통일시키고 훈련시킴으로써 군사적 세력균형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 드디어 1187년 라틴 십자군 왕국들과의 전투에서 자신의 전군사력을 투입할 수 있었을 때 살라흐의 군대는 십자군에 뒤지지 않았다. 1187년 7월 4일 살라흐의 탁월한 군사적 감각과 십자군측의 무감각 덕분에 그는 팔레스타인 북부 티베리아스 부근의 하틴에서 지치고 갈증나 괴로워하는 십자군을 함정에 빠뜨려 일격에 궤멸시켰다(→ 하틴 전투). 이 한 번의 전투에서 입은 십자군의 타격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이슬람 군대는 신속하게 예루살렘 왕국의 거의 전지역을 공략할 수 있었다. 3개월 만에 아크레·토론·베이루트·시돈·나자렛·카이사레아·나불루스·자파(야포)·아스칼론(아슈켈론) 등지가 함락되었다. 그러나 살라흐의 더없는 위업이면서 동시에 십자군운동 전체에 가장 심각한 타격을 준 것은 1187년 10월 2일로, 이때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 모두에게 성지인 예루살렘은 88년 동안의 프랑크족에 의한 점령통치를 끝내고 술탄의 군대 앞에 항복했다. 그리스도교인들이 이 도시를 정복할 당시의 유혈이 낭자했던 주민에 대한 대학살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으로 이슬람교도의 재탈환은 살라흐와 그 군대의 교양 있고 예의 바른 행동으로 빛이 났다.
1189년 당시 십자군은 단지 3개 도시만을 점령할 정도로 위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살라흐의 급격한 승세는 티레에 대한 공략전에서 실패하여 무색해졌다. 티레는 지금까지의 전투에서 뿔뿔이 흩어져 살아 남은 그리스도교도들이 모여든 거의 난공불락의 해안 요새였다. 이곳은 라틴인들의 반격 집결지가 되었다. 아마도 살라흐는 자기의 예루살렘 탈환에 유럽인들이 다시 반격해올 것을 예상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예루살렘 함락은 유럽에 깊은 충격을 준 사건이었으며, 유럽은 새로이 십자군을 일으켜 대응했다. 많은 고위 귀족들 및 유명한 기사들과 아울러 이번의 제3차 십자군에서는 세 나라의 국왕이 전투에 참가했다. 그리스도교 진영이 쏟는 노력의 양과 그것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남긴 인상은 기사도적이고 위풍당당한 적으로서의 살라흐 이름 위에 살라흐가 이룬 군사적 승리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영광을 덧붙여주었다.
십자군 원정은 오랫동안 소모적으로 계속되었으며,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때로는 충동적이었지만 분명히 천재적인 전력에도 불구하고 거의 무위로 끝났다. 여기에 살라흐의 흔히 인정되지는 않았지만 가장 위대한 업적이 있다. 지치고 의욕 없는 봉건제하의 징집병을 데리고 1년 중 단지 한정된 계절에만 싸울 수 있는 실정에서 살라흐는 불굴의 의지로 그리스도계의 뛰어난 전사들을 상대로 대등한 싸움을 할 수 있었다.
십자군은 레반트 해안에 마련된 불완전한 교두보에서 거의 전진하지 못했고 리처드 왕이 1192년 10월에 동양을 떠나면서 전쟁은 종료되었다. 살라흐는 자신의 수도였던 다마스쿠스로 철수했다. 오랜 전쟁 동안 끝없이 마상에서 지낸 생활이 그의 건강을 해친 때문인지 곧 죽었다. 그의 친척들이 벌써 그의 제국의 토막들을 차지하려고 다투고 있는 동안 그의 친구들은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강력했고 가장 관대했던 통치자가 자신의 무덤을 만들 돈마저도 충분히 남겨 놓지 않았다는 것을
https://youtu.be/zkcKKFwA9EA
출처 네이버지식백과,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