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없게 지나간 중, 고등학교시절 6년 동안 그나마 기억에 남는 추억거리가 있다면, 실기시험이 아니었나 싶다. 예체능 과목의 실기시험이란게, 단위수란 개념이 없었던 중학교 시절엔 국영수과라 불리우며 매우 중요히 취급을 받던 주요 과목들 만큼이나 비중이 컸었다. 점수를 80점에서 90점 사이로 거의 다 몰아넣어서 마음편하게 실기시험을 볼 수 있게 하는 선생님도 있는가 하면(주로 체육선생님, 미술선생님), 100점은 절대 안주시고, 못할 경우엔 0점도 불사하시는 분도 가끔 볼 수 있어서, 실기시험을 볼 무렵이면 온통 아이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그리고, 그런 무지막지한 선생님들의 공통점을 찾아 보려면, 그 대부분이 "음악선생님"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때 어설픈 오르간 연주에 맞춰 부르던 노래를 떠올린다면, 그리고 6학년때 우리반을 담임하셨던 그 할아버지 선생님께서, 교육방송 녹음 테잎으로 음악수업을 대체하셨 던 일을 떠올린다면, 번듯한 음악실과 피아노가 있는 중학교 에서의 음악 수업은 어린 내가 보기에 꽤나 환상적이었다. 그러나 그 음악실에, 청소가 아닌, 정말 음악수업을 위해 들어간 것은, 중학교 2학년이 되고 나서부터였다. 그래서인지 1학년때의 음악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특별히 나지 않는다. 다만 음정이랑, 음계와 같은 지겨운 음악이론에 대해 매우 어렵고도, 엄격한 수업이 진행되었나? 하는 희미한 인상이 남아 있을 뿐이다. 덕분에 그 이후로 음악... 이란 과목의 이론 시험에 별다르게 시달린 기억은 없다. (예외가 있긴 하지만 나중에 말하겠다.)
2학년때 맞이한 음악선생님은, 꽤나 멋진 분이셨다. 한 10년은 더 젊어보일 정도로, 옷도 잘 입으시고, 뭐, 어린 내 눈엔 그렇게 비췄나 보다. 지금 생각해도 해박하다 할 만한 지식과, 외국 풍물 이야기, 특히 빈 과 같은 음악의 도시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로, 1학년때의 지리했던 음악수업에 대한 이미지를 바꿔 놓으신 듯 하다. 솔직히 그 선생님과, 그 수업과, 음악실에 있는 피아노가 마음에 들었던 나. 그리고, 첫 음악 실기 시험을 맞이 하였다. "자유악기, 자유곡" 이란 충격적인 단서와 함께.
당시 우리반은 남녀 합반이었고, 당연하다고 설명해도 될른지 모르겠지만 음악실기에서 여자애들이 남자애들보다 뛰어난 것은 사실이었다. 음악실기시험은 음악시간이 일주일에 한 번이었으니까, 3시간, 즉 한 3주동안 계속 되었던 듯 하고, 첫 실기시험에 발군의 피아노 실력을 보여준 몇몇 여학생들 때문에 난 피아노란 악기를 포기했다. (모짜르트 피아노 소나타니, 베토벤이니 하는 곡들을 친는 애들 앞에서 아라베스크(아실래나?) 나 두드리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대신 잡은게 피리, 리코더 였다.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었을까? 음악선생님? 아님 모짤트를 친 여학생? 어쨌든 나름대로 심사숙고한 끝에 결정한 곡이 아마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뮤직, 2악장 로망스? 이던가 세레나데던가? (미 미 미이이 솔 파레파라 솔미솔...하고 나가는 곡) 지금은 곡명도 생각나진 않지만 멜로디는 선명하다. 물론 악보..를 구한다는건 생각도 못했고, 이모가 사다주신 테잎 안에 있는 곡을 들으면서 계속 계이름을 찾아내서 적어갔다.
문제는 리코더의 음역이었다. 다행히도(물론 그 곡이 무슨 조의 곡이었는지는 몰랐지만) 바 장조로 음계를 배치하자 리코더(소프라노 리코더일 껄. 아마도)의 음역에 곡이 딱 맞아 들어갔다. 그 이후론 정말 눈물나는 연습이 있었을 뿐이었다.
당시로는 혁신적이었던 반음들(피아노에서 검은 건반들)을 암기하고, 연습하느라...
또 하난, 지금도 내 핸디캡으로 남아 있는 오른손의 상처였다. 중학교 1학년 여름때 유리창을 치는? 바람에 뼈 빼고 끊어질건 다 끊어졌던 오른손 손목이, 지금도 그렇지만, 다른건 다 이어졌어도, 신경만은 완전히 회복이 안되었던 까닭에, 손가락 끝부분의 감각이 둔하기 짝이 없어서, 구멍을 제대로 짚었는지 번번히 눈으로 확인을 해야만 했다. 결국엔, 손가락이 척척 구멍과 맞아떨어지게 되었고...
연습하는 기간동안 또 한차례의 음악수업이 지나갔고, 그땐 한 남학생이 피아노로 모 드라마 배경음악이었던 "걸어서 저 하늘 까지"를 멋지게 연주하여 갈채를 받았다. 물론 아주 좋은 점수를 받은 건 아니었지만.(모짜르트와 가요... 아무리 자유곡이라지만, 같은 점수를 줄 수는 없으셨나보다.) 그리고 몇몇은 기타, 몇몇은 플롯을 연주했었다. 나머지 대부분은 리코더였고, 난 그 수많은 리코더들중에서 음악선생님의 눈에 띌 만큼 연주를 잘 해야만 하는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그 시절엔 그렇게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었나 보다.
그리고 결국엔 운명의 날이 왔다. 내 보라색 리코더(당시로선 좀 특이한 색깔이었다.)를 꼭 잡고선 나가서 넓은 음악실 (일반 교실 2개의 크기였다.) 앞에 서니 아무리 강심장이라 하더라도 어찌 떨리지 않겠는가? 100개가 넘는 눈동자가 나를 주시하고, 시작하라는 음악선생님의 목소리가 무섭게 들려오고, 손가락끝부터 발끝까지 후들후들 떨리는 가운데, 애써 숨을 들이쉰 후에 첫 음을 불기 시작했다.
두어번쯤은 구멍을 잘못 짚어서 애써 더듬거리다 위기를 모면했던 것 같다. 다행이 듣기엔 아무런 잡음이 없었나보다. 그리고 리코더 유일의 A가 나왔었고 그게 나였었던 것 같다. 이후로 음악선생님의 총애?를 받았다. 지금은? 얼굴이 까마득하다. 아니 거짓말이지만, 여하튼 만나본진, 6년이 다 넘었으니까.
3학년때의 음악선생님은 좀 덜 자상하셨고, 더 무서우셨으나, 어쩐 일로 첫 음악수업시간이후로 멀쩡한 우리반 반장을 제끼고 날더러 음악반장이라 하시더니, 온갖 잡일을 다 시키셨다. 1학년들이 음악실 청소하는걸 감독하게도 했으며, 그 사이에 몇번 피아노를 음악실에서 두드려보는것도 눈감아 주셨다. (그 광경을 훔쳐본 모 여학생은 내 피아노 소리를 듣고 "뽕짝" 이라 평한 바 있다.) 3학년땐 남녀 분반이었고, 난 이미 세 번째 음악선생님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지라, 별다른 동기부여는 없었지만 어쨌든 당시의 두 번째 음악 실기시험 또한 열심히 했었던 것 같다. 이번엔 조건이 좀 특이했다. " 한국 가곡중 택일, 가사 암기"
약간은 암담한 느낌도 들었지만, 다행히 아버지의 옛날 LP레 코드중에 비목을 찾을 수 있었고, 가사 죽도록 외워서, 당시의 내 목소리의 한계를 알고 있었던 만큼, 적당히 두세"키"를 낮춰서 불렀던게 맞아 들어갔는지, 아님 나 말고 다른 남자애들은 나보다도 더 의욕이 없어서, 가사를 다 외운 경우가 별로 없었는지, 음악반장..이라는 감투에 별 손색을 안 줄 정도로 부르고 넘어갔었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에서 배운 음악이, 지금 내가 클래식을 좋아하는 모습에 어느정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는지 단언하긴 힘들지만, 그다지 크지는 않은 듯 하다. 그땐 쇼팽은 난해했었고, 바하는 졸렸으며 말러란 작곡가는 아애 들어보지도 못했으니까. 하지만 당시에 모범생 소리를 듣던 내가 세 분의 음악선생님께 총애를 받고(1학년대의 경운 기억이 잘 안나지만... 난 모범생이었으니까,-"미안해 난 왕잔가봐?") 나름대로의 같잖은 프라이드내지는 특권의식에 취해서 다른이들보다 음악을 많이 들으려고 '노력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다만 당시에 정말로 후회되는 일을 꼽으라 한다면, 중학교 1학년 어느날 피아노 배우길 그만뒀다는 것 정도... 가 아닐까.
여기서 글을 끝내고 싶지만, 아직 1년이 더 남아 있다. 내가 제대로 배운 4년간의 음악의 마지막 한 해를 장식해주신 위대한 분, 정영일 선생님에 대한 이야길 하고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앞의 세 분들과는 달리 이분의 경우 구체적인 성함을 적은 것 만으르도 무언가 특이한 이야기가 앞으로 펼쳐질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앞의 세분의 경우엔, 송구스럽게도 성함이 생각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반백의, 거의 백발에 가까운 희끗한 머리에, 작고 다부진 체구, 묘상(토끼모양의 얼굴)이 동안처럼 보였을라나 거기에 아침조회시간마다 강당앞에 올라가셔서 전교의 모두를 눈빛 하나만으로 숨죽이게 하고, 그 지휘봉아래 굴복하게 하신 그 위엄은, 신입생인 내가 보기에도(아직 그분의 수업을 안들었을 때였다.) 대단한 종류의 것이었다. 게다가 선배들로 부터 암암리에 전해들어온 몇몇 충격적인 이야기들(뽑는다느니, 밟는다느니, 바른다느니 하는)이 첫 음악 시험 이전의 그 분에 대한 인상을 상당히 일그러트려놓았다. 덕분에 우리반 30명은 첫 음악시간, 음악실 앞에서 2열 종대로 정렬하여 명찰과 교표를 5초마다 다시 확인해가며 뻣뻣한 자세로 그분을 기다리는 해프닝을 연출하였다. 절도있는 걸음거리로 나타난 당신이 처음 하신 말씀은 아마
" 거기 뭐하는 수작이야? 어서 들어가서 앉지 못해? " 쯤이었을 거다.(기억은 안나지만 분명 그러셨겠지..)
뭐, 부반장이란 직책으로 인해 가끔 그분에게 고약한 일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걸 제외하고는, 아니 그걸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분의 수업은 너무나 재미있었다. 고대원시종합예술로부터 시작하여, 1000년전에 부르던 고대 음악, 투르트바투르? 라던가 하는 방랑시인의 이야기등이 3부 합창으로 이루어 진 멜로디를 선배들로부터 알아서 전수받으라는 지사 와 함께 학기초 음악수업의 주된 내용이었다. 명찰과 배지, 그리고 수염만 조심한다면 별 탈 없이 재미있는 이야기로 음악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수염... 예긴데, 당시에 난 면도기가 없어서 주말쯤엔 항상 수염이 삐쭉삐쭉 나 있었다. 다행이 음악시간은 화요일이어서 월요일 아침에 깨끗이 면도를 하고 학교에 가면 별 탈이 없었다. 하지만, 월요일에 늦잠을 잔 날의 경우엔 이야기가 틀려졌다. 내가 사온 집게로 내 수염을 몽창 다 뽑힐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는데, 다행히 그냥 넘어갔던 걸로 기억된다. (왜 그랬는지, 그냥 들여보내주셨다.) 그리고 그 이후로, 아무것도 아닌 그 일이 지난 이후로, 내 머리에 박힌 정영일 선생님은, 당신이 그 위기사항을 조성하셨음에도, 자비심의 화신...과 같은 모습이었으며, 평생동안 이어지는 충성의 근원이 되었던 것이다.(그만큼 그분의 화술과 용병술은 뛰어났다.)
그리고 1학기 음악실기 시험이 다가왔다. 7차니 8차니 선배님들로부터 기숙사에 우리학교의 전설같은 야사들을 전해 익히 전해 들어왔지만, 당시만 해도..설마... 하며 안일한 마음을 먹고 시간을 때우던 분위기가 우리반을 지배하고 있었다. 시험날짜가 정해지고, 시험 요강(?)이 정해지고 내가 조장이 되고, 연습을 피터지게 하는 가운데도, 어디까지나 야사는 야사일 뿐... 이라는 생각이 우리들 모두에게 박혀있었고, 그것은 분명 큰 실수였다.
음악실기서험의 요강. 지정곡 5개 자유곡 1개. 시험 당일 추첨에 의해 각 조별로 부를 지정곡을 결정, 결정된 지정곡과 자유곡을 암보, 암기하여 합창, 자유곡의 경우 반주, 악보제출이 필수. 시험이 끝난 이후 조장이 칠판의 점수표에서 예상되는 점수를 찍고, 그 점수가 선생님의 점수보다 작을 경우, 그냥 그 점수를 얻음, 선생님의 점수보다 클 경우 0점. B+를 못넘길 경우 재시험, 1회 재시험시마다 소정!!! 의 품목을 갖춘 30명분의 간식거리를 준비할 것. 그리고... 음.... 자유곡의 경우엔 반주자를 제외한 전원이 무용을 준비하여 반 전원을 즐겁게 해줄 것. 마지막으로 모든 음악실기험의 과정은 테이프에 녹음되고, 무용하는 장면은, 사진촬영됨. 그러한 이유로 복장통일과, 반듯한 머리등은 필수. 6개조, 각 조 5명으로 편성. 불행히도 가위바위보에 의해 내가 조장이 되었으며, 준비상태가 불량할 경우엔 조장이 대표로 밟히게 되니까, 내가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조원들을 닥달해서 연습을 하던 모습. 쉬이 상상이 가시리라.
음악 실기시험이 한창 진행되던 여름무렵 중간고사, 기말고사마저도 버려가며 밴치에 나와서 노래를 불러대는 학생들의 모습이 학교 집권층에 좋게 보였을 리가 없고, 작년을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 학교를 떠나신 결정적인 이유라는 루머도 돌고 있지만 그다지 믿을 만한 건 못되는 것 같다.
우리조는 두 번 만에 통과하였다. 에메랄드!!색 초 유치 와이셔츠와, 청바지로 복장을 통일하고 전원이 무스로 머리를 번들번들하게 하고, 마지막 상상을 초월한 자유곡, 등대지기의 부채춤 풍의 무용으로 쇼크를 먹인 결과 의외로 통과가 쉬웠나 보다. (위대한 조장? 의 영도하에 우리반 최초로 통과한 조였다.) 떨리는 손으로 조장인 내가 뽑은 종이를 펴서 나온 글자는 그야말로 눈물나게 고마운 애니로리 1절 이었던 것이다. (만약에 영어가사였다면... 생각하기도 싫다.) 지정곡 가뿐히 패스, 자유곡은 앞에서 말한 그 무용. 덕분에...과자도 한상자... 1차시험의 패배의 결과인 한상자...를 사가는 걸로 끝났다. 그리고 음악시험이 나머지 6,7차까지 가는 동안 우리 조원들은 가만히 앉아서 그 이상의 많은 과자들을 즐겼다!!
당시에 반주를 위해서 키보드를 학교까지 들고 다니고 했던 일들이 기억에 난다. 2차로 합격했던 그 날, 같은 조원들끼리 기숙사 방에 모여서 파티를 벌였음은 말할 것이 없다. 지옥의 수렁에서 같이 빠져온 전우들사이엔 여간해선 찾아보기 힘든 유대감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해 여름동안 난생처음으로 매우 난감한, 무슨 음악회 다녀오라는 것과는 차원이 틀린, 음악숙제를 하나 받았다. 당시에 우리학교 음악실에 정열적으로 CD를 갖추어 나가던 음악선생님이 (3~4?)번째로 들어온 CD 180여장을 우리 학년 모두에게 나눠주시며, 각 장에 대한 조사를 원고지 30장이상! 해 오라고 하신 것이었다. 초기의 선배들이야 베토벤 교향곡이니, 유명한 음반들을 하셨을테니 얼마나 편하셨으랴. 우리들이 받은 음반의 대부분이 고대음악, 종교음악. 특히 도서실에서 아무리 찾아도 단서하나 알아낼 수 없는 러시아 종교음악 계통이 많았다. 게다가 악기들도 눈에 뵈는건 다 원전악기. 옛날에 쓰던 하프의 둔탁한 소리들....
그러나! 내가 괜히 쁜지인가? 얍실하게 그 많은 음반중에 다행히 포레... 그나마 자료조사가 쉬운 포레의 피아노 4중주의 음반을 집어낸 것이었다! 조사한 자료를 정리하니 원고지 50장이 가뿐히 넘었다. 다른 종교음악을 맡은 친구들을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CD와 원고지를 제출하고 편히 쉬던 기억 이 난다.
학교 집권층의 압력때문이었을까? 2학기의 음악실기시험은 비교적 정상적인 형태로 돌아왔다. 다만 "기회 오직 1번에, 고전음악 빠른악장, 암보로 연주, 악보는 필히 복사해서 제출"이라는 굉장히 모호한 단서가 우리들을 고민케 했었다. 난 오랜만에 기타를 연습했다. 현재 모 국악관련 케이블 tv의 작가로 있는 모 양의 도움과, 자습실에서 책상에 기타모양 상상하고 긁어댄 처절한 연습의 결과로 뜻박의 좋은 점수를 받았던 걸로 기억된다.
대부분의 학생이 채 연주를 끝내기도 전에 차가운 "그만" 이란 소리에 벌레씹은 표정으로 들어가야 했다. 계속되는 선생님의 "그만, 그만하세요." 소리에도 쇼팽의 녹턴을 계속 연주하던 모 학생의 비참한 최후... 가 목격된 이후로 더 이상 반항하는 학생은 없었다. 그래도 모두가 즐거웠다. 우리는 어느새 그 냉혹한, 살얼음판을 걷는듯한 선생님의 수업을 스릴감 있게 즐기는 방법을 배웠던 것이었다.
역시 복장은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고, 악기의 특이성도 고려되었다. 유일하게 단소를 불었던 반장이 좋은 점수를 받은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몇가지 특기할 만한 점으로는 음악선생님의 지적...이었는데,
"음표를 그대로 정직하게 연주하는게 다는 아냐 악보를 다시 해석하는게 필요해. 연습방법을 바꿀 필요가 있어요."
->내가 받은 지적.
"모짜르트에서 벌써부터 베토벤의 냄새? 가 나면 안되. 그만."
"누가 기타를 그렇게 맥없이 친다고 했나? 아주 모욕적이야!"
"더 빨리, 더 빨리, 더 빨리, 아냐, 두배는 더 빨리, 그만!"
등등이었다. (--;)
선생님은 작년을 마지막으로 학교를 떠나셨고, 새로운 이상한 여자음악선생님께서 오셔서 실권을 장악하셨다. 그 선생님의 "내가 정선생님게서 벌려놓은 여러 일을 정리하겠다." 라는 충격적인 발언이후로 우리 2학년 중 그 선생님을 선생님으로 보는 학생은 별로 없다. (그만큼 우리의 충성심? 은 대단하다.) 어차피 음악수업도 없으니까.
선생님이 떠나신 이후로 객관식 답란을 다 칠하면, 나비모양이나, 장구모양, 화살표가 나오던 즐거운 음악 이론 시험도 사라져 버렸고, 가끔씩 밤늦게 자습실에서 나와 음악실앞을 지나면 들을 수 있었떤 정말 환상적인 재즈 피아노의 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3부로 부르던 교가조차도 제창으로 바뀔 뻔 하였다.
정영일 선생님은 음악 이상의 것을 많이 가르쳐 주셨다. 어차피 음악이라는게 작곡된 장시의 사회상과 결합되어 있는 이상 당시의 시대를 읽지 못하면, 음악을 읽을 수 없다 하셨다. 가끔은 음악에서 피냄새를 맡을 수 있어야 하고, 음악에서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하셨다. 평생을 같이 할 악기 하나를 갖도록 강권하셨고, 우리중 몇몇을 사람으로 만드는데도 지대한 공헌을 하신걸로 기억된다. 이전의 3년간의 음악수업과는 달리, 내가 정영일 선생님께 특별히 총애를 받았던 일은 없는 듯 하다. 나름대로 성탄절엔 카드도 보내고, 또 잘보이고 싶은 마음에 실기도, 이론도 열심히 해서 좋은 점수를 받아 왔지만, 사실 당신께서 내 얼굴이나 기억하실른지 의문이다.
대가 지나면서 3부 합창의 멜로디가 잊혀지고 교가가 제창으로 바뀌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분께서 열심히 수집하시고, 전산화를 고집하시던 CD와 그에 대해 우리들이 조사한 상세한 해설또한 다 마쳐지지 못한 채 남겨지게 되었고, 앞서 새로 오신 선생님에 의해 정리, 아니 패기 되는 것도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 음반들이 공개되어 자유대출이 되길 얼마나 고대했던가!) 하지만 당신께서 창단하신 까리따스 챔버 오케스트라나, 당신의 수업을 들은 나를 비롯한 많은 학생들이 당신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영원히 간직할 임은 분명한 일이다.
네분의 음악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사실 주변의 아이들이 음악수업시간을 상당히 싫어해오던 가운데, 나 잘난 맛에, 아니 튀고싶은 심리에 음악선생님과 친해지려고 노력하고, 또 음악에 다가서려고 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 동기야 어쨌든 지금은 음악이 너무나 좋고, 비록 가끔은 내게 좌절을 안겨주기는 하지만, 감사해야 할 대상이기에, 난 네분의 음악 선새임에게도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딱 네분으로 끝이다. 언제 다시 학교에서 음악을 배울 수 있겠는가?)
하지만 비단 네분만이 내게 음악선생님이셨던가? 내가 음악과 친해질 수 있도록 이리저리 중매를 서 주셨던 수많은 내 주위의 분들 모두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일이 당연한 거라 생각된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내 아이들에게,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음악 선생님이 되어 줄 수 있길, 그들이 음악과 친해질 수 있도록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될 수 있길,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ps : 여기까지 다 읽을 사람이 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다른 음악관련 모임에서 [음악에게]라는 글쓰기 이벤트 중이랍니다...
1등상품 전자렌지에 눈이 뒤집혀서...(왜 음악모임의 1등 상품이 전자렌지 인지 이해못하겠지만...)
장문의 글을 쓴김에 여기에 올립니다...^^
첫댓글 헉.... 길다... 나중에 천천히....-_-
헉.... 길다... 나중에 천천히....-_-
헉.... 길다... 나중에 천천히....-_-
헉.... 길다... 나중에 천천히....-_-
한번에 다 읽었다... 한 5분에서 10분 넘게 걸린듯.... 재밌다.. 나도 그런 음악 선생님 만나 봤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