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은 미워하며 자라고 사랑은 사랑하며 자란다/ 김수상
-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 창립 22주년에 부쳐
일본군이 동학 농민군을 죽일 때
농민군의 사지를 소나무에 묶어놓고
묶인 사람의 정수리에
송진을 바른 소나무 가지를 뾰족하게 깎아
망치로 박아 넣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불을 붙이는데,
정수리에 박힌 나무못에 불이 붙으면
팡, 팡, 팡!
농민군들 머리 터지는 소리가
10리 밖에서도 들렸다고 한다
어디 동학군뿐이겠나
대구의 10월
제주의 4.3
광주의 5월
총으로 쏴 죽이고
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죽인 나라에
아직 우리가 살고 있다
일제에 빌붙고 군부와 독재에 아첨하며
온갖 영화를 누린 사람들은
아직까지 권력의 단맛에 취해
대대손손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고 있는데
빛바랜 창호지 같은 얼굴을 한 우리들은
창천(蒼天)의 하늘 아래 별로 부끄러움이 없다
외국인 200만 명이 우리 땅에 살고 있다
같은 말을 쓰면서 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같이 살아온 사람들을 민족이라 부른다
그게 민족이라면 그런 시절은 이제 곧 지나가지 않겠는가
우리가 우리를 무참하게 학살하고 때려죽인 이유가
아직도 명백히 밝혀지지 않았다
같은 민족에게 총칼을 겨눈 반역의 죄인들이
광장의 맑은 햇빛 아래 끌려나오지 않았다
인간은 어디까지 선할 수 있고
인간은 어디까지 악할 수 있는가
사람이 죽으면 혼백(魂魄)이 되는데
혼백은 혼(魂)과 백(魄)으로 나누어진다
혼(魂)은 몸을 빠져나와
위패 안에서 살다가 하늘로 올라가고
백(魄)은 사람의 몸에 남아 흙이 되고 바람이 된다
억울한 영혼은 백(魄)이 되어 눈을 뜬 채 땅에 머문다
내가 왜 죽임을 당했는지
내 무덤을 내가 파서 왜 생매장을 당해야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상생(相生)이 먼저가 아니고
해원(解寃)이 먼저다
원한을 풀어야 같이 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민족은 해묵은 낱말이 아니다
민족은 폐기되어야 할 말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저지른 참혹한 죄가
가을밤의 별처럼 자꾸 돋아나는 한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자꾸 되돌아봐야 한다
어머니가 동구 밖에서 우리를 보낸 뒤에도
우리가 사라질 때까지 우리를 지켜보듯이
우리는 우리에게 저지른 죄를
무릎 꿇고 고백해야 한다
영원한 이념은 없고
영원한 민족도 없어라
세상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모든 사람은 같은 민족이어라
세상의 그늘 안으로
맑은 햇볕 한 줌 쥐고 달려오는 사람은 모두가 같은 민족이어라
선하고 맑은 마음만이 인간의 역사 앞에 오래 살아남아
별처럼 빛날 것이다
민족은 세상의 아픔을 함께 하는 사람들
민족은 세상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사람들
민족은 세상의 불의에 항쟁하는 사람들
민족은 진실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들
민족은 핏줄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
사랑으로 사랑하면 기쁘지 아니한가
우리는 사랑공화국에서 법도 없이 푸른 맥박으로 사는
사랑의 사람들이다
미움은 가고 사랑은 오라!
거짓은 가고 진실이여 오라!
- <뉴스민> 2017년 10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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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편으로 김수상 시인은 지난해 제4회 박영근작품상을 받았다. 심사위원회(염무웅, 고형렬, 정세훈)는 “시의 기교가 넘쳐나는 시대에 이를 초월해, 외롭지만 역사의 아픔과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꿋꿋이 시의 미덕과 참다운 도리를 다하고자 고군분투하고 있다”라며 “근대 개항기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 일제강점기 친일, 군부독재 시대 광주의 5월까지 우리가 어설프게 유폐시킨 역사를 꼼꼼히 호명해 현재, 더 나아가 미래에 접목하여 시의 진실한 길로 나아가고 있다”고 평했다. 김수상은 그렇게 진실한 시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시인이다. “시인은 삶의 뜨거운 국물을 맨손으로 받아내는 존재”라고 그는 수상소감에서 밝혔다.
제주 4.3뿐 아니라 거창 양민학살사건, 여순사건, 노근리 학살사건, 대구 10월 등 아직도 쉬쉬하며 진실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 근현대사에서의 사건들이 너무나 많다. 물론 정직하고 객관적인 평가가 이뤄지지 않아 명명하기도 애매한 사건들이다. 제주4.3만 하더라도 남로당 좌익들이 대한민국을 무너뜨리고자 일으킨 ‘4.3 폭동’이란 전두환 정권 이후의 보수진영 측 시각이 있는가하면 단독정부에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지향한 ‘4.3 민중항쟁’이란 진보진영 측 주장까지 공존한다. 그밖에 '봉기, 사태, 학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 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의 이름을 새기지 못하고 백비(白碑)인 채로 누워있다.
2년 전인가 국민을 상대로 제주4․3의 성격을 묻는 설문조사가 있었다. 그 결과 ‘양민학살’이 39%로 가장 높았고, ‘사건’ 21%, ‘항쟁’ 20%, ‘폭동’ 8%, ‘모르겠다’ 12% 순이었다. 연구자들과 진보진영에서는 항쟁으로 규정하였음도 제주도에서조차 ‘항쟁’보다 ‘학살’로 인식하고 있다. 피해 당사자들로서는 마땅한 결과라 여겨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발발 배경과 원인 등을 규명하여 역사적 평가과정을 거치는 역사적 인식에 관심이 적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뚜렷이 성격을 규정하지 못하고서 ‘제주4․3’으로 칭한다. 중립적인 가치랍시고 ‘사건’이란 표현을 쓰는 거나 사실상 매일반인 비겁하고 염치없는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지금까지는 그랬지만 군경이 공식적으로 사과를 한 올해부터는 많은 인식의 변화가 있으리라 예견된다. 2000년 ‘제주4.3특별법’이 국회통과 후 19년만이다. 그동안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권력의 잘못에 의한 불행한 사건”이라고 칭하며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정중히 사과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고는 그 활동이 많이 주춤하였으나 이제는 어느 정도 ‘해원’이 된 듯하다. 그 연장에서 제주 4.3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 여순이나 대구의 10월 항쟁도 마찬가지다. 해방공간에서의 숱한 암살사건도 속시원히 그 배후가 밝혀진 사례는 드물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란 말이 있다. 알고 있는 역사를 뇌리에서 지우는 것도 문제지만 그 역사를 잘못 알고 있다면 더욱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우리의 밝은 미래를 위해서라도 진실은 반드시 규명되어야 하고 민족의 이름으로 억울한 죽음의 원혼은 달래주어야만 한다.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