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구를 기다립니까
우리 인간은 일상생활에서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살아간다. 그것은 사람일 수도 있고, 어떤 서클 모임일 수도 있고, 또는 TV프로그램일 수도 있다.
기다림은 희망이요. 기쁨과 행복이다. 마치 농부가 씨를 뿌리고 가을 추수를 기다림과 같다. 이는 마음에 여유 있는 평온한 기대감이다.
누구나 영적, 정신적 기다림이 있다. 이 기다림을 성취하기 위해 한 없이 참고 참는다. 여기 일생의 고민이 있고 아픔이 있다.
이렇게 때로는 오지도 않는 것을 평생 기다린다. 사람은 불안한 존재이다. 이 사실을 작가 사무엘 베케트(S. Beckett, 1906-)는 <고도(Godot)를 기다리며>에서 잘 묘사하고 있다. ‘고도’는 절대자, 신이다. ‘기다린다’는 기묘한 행동을 통해 우리의 일생 삶의 뒤에 숨어있는 현대인의 생존의 불안을 독특하게 묘사하고 있다. 신의 존재를 확인 하려는 부단의 고통이다. 이 작품은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전 세계 20여개 국어로 번역되어 계속 공연되고 있다. 이 짤막한 연극이 인생의 심오한 내면세계를 진솔하게 잘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며칠 전 신문에서 S목사님의 “그 분은 언제 오실까”의 제목에 눈이 번쩍 띄어 그 기사를 읽어 보았다. 재미있는 것은 한류로 이름 난 ‘욘사마’(배용준)를 기다리는 얘기였다. 매우 흥미가 있어서 S목사님의 글을 정리해 본다.
S목사님이 일본 도쿄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는데 한 식당 이름이 ‘고시래(高矢禮)였고 업주는 ‘욘사마’였다. 식당명으로 볼 때 주 음식은 한국메뉴라는 것이 짐작되었다. ‘고시래’라는 어휘에는 한민족의 관습이 숨어있다. 야외에서 음식을 들 때 첫술을 떠서 들판에 던지며 ‘고시래’라고 말 한 풍습이 있다. 무당굿이다.
그런데 이 식당에 한 끼 식사를 예약하는데 무척 어려웠다고 했다. ‘욘사마’의 이름값 때문이라고 한다. 식대는 비빔밥, 김치찌개 값이 무려 한화로 5만원이다. 또 놀란 것은 이 식당에는 꼭 예약을 해야 한다. 손님의 99%가 일본여성이라는 사실이다. S목사님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비싼 곳에 들어오려고 하느냐의 질문에 한 직원의 답변은 “일본여성의 마음에는 ‘욘사마’(배용준)가 전에 한 번 여기 왔으니 이번에도 꼭 오신다는 기다림과 설렘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가 자기 자신이 식사할 때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꽉 차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 한류가 시작된 것은 “겨울연가”의 방영이었다. 이 영상의 효과는 춘천시내 곳곳의 촬영지에는 아직도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S목사님은 비빔밥 한 그릇을 시켜놓고 ‘욘사마’를 기다리는 손님들의 마음에 담긴 이야기를 듣고 많은 것을 생각하셨다고 한다. 한류명성은 국가브랜드를 높이고 주재대사들의 수 십 배, 수 백 배의 경제적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눈으로 보았다고 하신다.
S목사님은 말하기를 “비빔밥 한 그릇을 시켜놓고 내 마음은 그 분 ‘예수님’ 생각으로 목이 메기 시작했다. 자기가 담임하는 교회 1만 명의 신도들의 마음에, 아니 이 땅에 천만이 넘는 기독인의 마음에, 아니 이 글을 쓰는 내 마음에 고시래식당의 손님들이 ‘욘사마’를 기다리는 그 마음처럼 예수님을 기다리는 설렘이 있을까? 눈시울이 젖으면서 숟가락을 쉽게 들 수 없었다”고 하셨다.
최근 스스로 목숨을 끊은 ‘행복전도사’ 최윤희씨 부부 역시 육체의 고통을 참지 못했다. 그들은 기다리지 못했다. 그들이 끝까지 견디고 기다렸더라면 아주 훌륭한 모범인사로 남았을 것이다.
우리는 욥의 인내와 기다림을 생각해본다. “그의(욥)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욥 2:9-10).
욥의 아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다리지 못 한다. 답답하고 속이 상할 때 막말을 한다. 참지 못하고 기다릴 줄 모르면 가장 불행한 자가 된다.
많은 사람들은 돈이 많고 좋은 집과 자가용이 있으면 행복해진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은 크게 잘못 된 것이다.
오래전에 필자가 잘 아는 법인택시 기사가 있었다. 그 택시 기사는 “나는 개인택시를 몰면 내 평생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다. 그리고 “끝까지 기다려 보겠다”는 것이다. 필자는 참 좋은 생각이라고 칭찬했다. 그런데 그는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개인택시를 몰고 있었다. “이제 기사분의 소원이 성취됐으니 행복하지요?” 이 말에 그 기사 답변은 엉뚱한 것이었다. 그 기사 왈“내가 개인택시를 모니 더 피로하고 고단합니다. 왜냐하면 쉬지 않고 30분만 더 운전하면 상당한 일당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계속 뛰니 몸이 견디지 못합니다. 오히려 법인 택시를 몰 때가 더 편한 것 같습니다” 이 기사 얘기는 진실이다.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이 커서 제어할 수 없다. 인간은 ‘이것으로 끝낸다’고 결심하나 욕심의 악마는 그대로 두지 않고 인간을 부추겨 조금 더 일하게 하다가 결국 큰 실패에 빠뜨린다. 조금만 더 기다리자. 조금만 더 하자. 조금만 더 열성을 내자. 이렇게 해야 잘 살게 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한가?
우리나라도 ‘조금만 더’ 일함으로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이상하게도 잘 사는 나라일수록 자살률이 높다. 어떤 나라도 어렵게 살 때는 행복하고 자살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우리나라 통계에 의하면 소득이 2만 불 이상 되는 요즘에는 자살하는 사람의 수가 부쩍 늘고 있다. 2008년에 자살한 사람은 1만 2000명이나 됐다. 하루 평균 33명 이상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셈이다. 교통사고보다 높다. OECD국가 중 자살 숫자가 가장 높다. 자살수가 해가 갈수록 높아진다. 한강다리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금문교는 자살교로 오명이 붙어있다. 이 같이 재력이 넉넉한 사람들이 자살한다. 이 사실은 돈만 가지고는 행복을 찾을 수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돈이 있고 없고 간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행복을 못 느끼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같이 불행한 사람은 감사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은 행복의 기본요소이다. 소원성취를 위해 기다림에는 노고의 고통과 기다림의 지루함이 따르기 마련이다. 이 때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속죄와 구원 그리고 영생의 언약을 믿고 감사의 마음을 가지면 어떤 태산 같은 난관도 이길 수 있다. 이와 반대로 감사가 없으면 불만불평과 원망이 싹트고 폭음주독하고 남을 살해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일어나게 된다.
인간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소원성취를 위한 코스를 밟는다.
공부에서 입학, 졸업에서 취직, 연애(중매)에서 결혼, 월급에서 내집마련, 승진에서 과장, 부지런해서 성과금, 그리고 부귀, 명예, 건강, 장수, 칭찬, 행복 등 수많은 기다림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이는 정상 코스이다. 하지만 이 코스의 어딘가에서 탈락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코 낙망하거나 자포자기해서는 안 된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남을 돕는 사랑의 생활을 해야 한다. 이 세상은 유수같이 빨리 지나간다.
우리 믿는 자 앞날에는 영원한 하늘나라가 기다리고 있다. 공중에서 천군천사들의 나팔소리에 구름타고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 희망찬 기다림이 되지 않겠는가 생각해본다.
조영자 시인(권사)은 하찮은 들풀 하나도 잊지 아니하시는 조물주를 만났기에 온갖 허무고통 속에서도 기다리고 기다린 영생의 기쁨을 감동적인 시어로 읊었다.
오늘 아침도/ 내 의식의 눈 뜨면/ 소중한 만남의 은총 속에/ 햇살 가득히 펼쳐 질 가능성/ 손 안에 잡힐 듯 다가와/ 내 삶의 기쁨 노래하지만,
황막한 사막 모래 바람 속/ 불쑥 찾아드는 불청객/ 병들고 아파 마음 허허롭고/ 언젠가 티끌로 돌아가야 할/ 허무 속에 뒹구는 낙엽들.
살같이 빠르게 물처럼 흘러가/ 한 개비 성냥불인 양/ 반짝 타 버릴 수 없는 삶/ 시공을 초월한/ 당신을 만났기 때문.
우리 남은 시간/ 아껴 써야하리/ 참으로 감사할 수 있음은/ 영원 속에 존재하시는/ 당신을 만났기 때문.
(조영자-당신을 만났기 때문)
2011. 1.
영호남 은퇴교수 친목회
명예회장 김태한 드림
김태한 장로 / 대구남산교회 원로장로, 전 계명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