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들의 고군분투
대만(臺灣, Taiwan)의 전투기인 F-CK-1 징궈(經國)가 초도 비행(初度飛行)에 성공한 것이 1989년이니 생각보다 상당히 오래전의 일입니다.
징궈는 비슷한 외관(外觀)과 성능(性能) 때문에 종종 FA-50과 비교(比較)되는데 FA-50이 2011년에 첫 비행이 이루어진 것을 생각한다면 대만의 전투기 개발사가 우리보다 20년 정도 빠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기종(機種)의 외형(外形)이 비슷한 이유는 기술제휴선(技術製携線)이 록히드 마틴(Lockheed Martin)으로 동일(同一)하기 때문입니다.
↑대만산 경전투기인 F-CK-1 징궈
최초 대만은 F-104를 비롯한 노후 주력기(老後主力機)를 대체(代替)하기 위해 F-16이나 F-20의 도입(導入)을 고려(考慮)했지만 중국의 방해(妨害)로 계획(計劃)이 좌절(挫折)되었습니다.
고심(苦心) 끝에 당시 서방의 대표적 범용(代表的凡庸) 전투기인 F-16 정도의 성능(性能)을 목표(目標)로 국산 전투기 개발(國産戰鬪機開發)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만이 모든 것을 자력(自力)으로 하기에는 애초부터 불가능(不可能)해서 기술 도입(技術導入)에 나섰고 이때 미국이 도움을 주었습니다.
↑대만 공군이 사용한 F-104
당시 소련(蘇聯, Russia)를 봉쇄(封鎖)하는데 중국(中國, China)의 도움이 필요(必要)했던 미국의 레이건(Ronald Reagan, 1911년 2월 6일~2004년 6월 5일) 정부(政府)는 대만에 무기 판매(武器販賣)를 제한(制限)했지만 최소한(最小限)의 자위(自衛)를 위한 지원(支援)은 결정(決定)했습니다.
때문에 형식상 민간기업(形式上民間企業)들이 개별적(個別的)으로 기술 제휴(技術提携)를 하는 형태(形態)로 징궈 개발 사업(開發事業)에 참여(參與)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제공 가능(提供可能)한 기술 수준이 F-16이하로 제한(制限)되어 있었기에 대만이 원하는 수준의 전투기가 제작(製作)되기는 힘든 환경(環經)이었습니다.
↑원래 F-104는 다목적 기종(多目的機種)으로 쓸 것을 염두(念頭)에 두고 제작(製作)했으나 기본 설계(基本設契)는 요격기(邀擊機)라서 문제가 많았다.
베트남(Vietnam) 전쟁(戰爭)에 제공권 확보(制空權確保)를 위해 소수 투입(小數投入)했지만 공대공 전과(空對空戰果)가 없고, 베트남 공군과 중국 공군의 MiG-19를 상대(相對)로 지속적(持續的)인 손실(損失)을 겪었다.
그러나 롤링썬더 작전(북폭(北爆)의 제약하(制約下)에서 적기(敵機)의 요격(遼隔)을 차단(遮斷)하는 임무(任務)를 F-4로 대체(代替)되기 전까지 매우 성공적(成功的)으로 수행(遂行)했다.
이후에는 전폭기(戰爆機)로 전용(專用)했다.
↑징궈는 처음부터 성능이 제한받았습니다
특히 제트기의 심장(心臟)이라 할 수 있는 제트엔진의 확보(確保)에 애를 먹어 민간기용(民間機用) 엔진을 개조(改造)한 F125-70이 채택(採擇)되었습니다.
결국 징궈는 뛰어난 기체 구조(機體構造)에도 불구(不具)하고 추력(推力)이 부족(不足)해서 원활(圓滑)히 작전(作戰)을 펼치기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작(製作) 도중 미국과 프랑스의 정책 변화(定策變化)로 F-16과 미라주(Mirage) 2000의 획득(獲得)이 가능(可能)해지자 징궈는 예정(豫定)된 256기의 절반(折半) 정도인 130기만 생산(生産)되었습니다.
↑미라주 2000의 도입은 징궈 양산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F-16과 미라주 2000이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Down grade 형(形)이 제공(提栱)되었지만 그럼에도 징궈보다 성능(性能)이 좋았기에 최초 계획(最初計畫)대로 생산(生産)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만일 서방(西方)이 중국과 대립(代立)하던 시기(時期)였다면 대만은 전투기를 적시(適時)에 도입(導入)할 수 있었을 것이고 굳이 자력(自力)으로 개발(開發)에 나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징궈는 국제 정세(國際政勢) 때문에 태어났지만 개발 주체(主體)도 만족(滿足)할 수 없었던 대만의 고민(苦悶)이 그대로 반영(反映)된 전투기라 할 것입니다.
↑부족한 점이 많지만 징궈는 여전히 대만의 주요 전력입니다
우리와 단교(斷交)한 후 1998년까지 대만의 최대 수교국(最修交國)은 남아프리카공화국(南亞共)이었는데 엄밀(嚴密)히 말해 왕따들끼리의 합종연횡(合從連橫)이었습니다.
당시 남아공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로 대변(代辨)되는 시대착오적 인종 정책(時代錯誤的人種政策)을 펼쳤기에 날이 갈수록 국제사회(國際事會)에서 고립(孤立)되었고 따라서 국방(國防)을 위한 무기(武器)의 도입(導入) 또한 원활(圓滑)히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중국에 의해 외교적(外交的)으로 봉쇄(封鎖)를 당한 대만과 비슷한 처지(處地)였습니다.
↑남아공의 미라주 III
남아공은 비록 주변(周邊)에 거대 적국(巨大敵國)이 없었지만 최소한(最小限)의 국방(國防)을 위한 전투기는 필요(必要)했습니다.
하지만 무기금수조치(武器禁輸調治) 때문에 도입할 수 없자 대만처럼 국산 전투기 개발에 나섰습니다.
그러던 1980년대 초에 치타(Cheetah)라는 이름의 전투기가 제작 완료(製作完了)되었다는 소식(消息)이 처음 전해졌습니다.
이때만해도 완전히 새로운 전투기라는 소문(小問)이 자자했는데 실은 기존(旣存)에 사용(使用) 중인 미라주 III/50을 업그레이드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도움을 받아 남아공에서 개량한 미라주 III인 치타
따라서 남아공의 치타는 새로운 전투기로 보기 힘듭니다.
하지만 개조(改造)의 천재(天才)들인 이스라엘(Israel)이 깊숙이 개입(介入)한 사실만으로도 성능은 상당히 향상(向上)된 것으로 평가(平價)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종 차별 정책이 철폐(撤廢)되고 무기에 대한 금수가 풀리면서 스웨덴의 JAS-39가 도입(導入)되자 치타는 조기(早期)에 퇴역(退役)했습니다.
이를 2010년 에콰도르(Ecuador) 공군이 수입(輸入)하여 제식화(制式化)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름대로 성공한 개발 사례(開發事例)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