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끌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에서 맑은 햇빛이
따스하게 쏟아지고, 선선한 바람이 살랑거리는,
그야말로 가을다이 삽상하고 청량한 날이었어.
사마천의 <사기>에 막 등장한 유방과 항우와
장량과 한신의 이야기를 읽느라 그저께 빌려 온
책을 어젠 읽지 못하였는데, 시를 읽다가 나태주의
<멀리서 빈다>를 카톡에 올렸더니 시정이 풍성한
레오나르도가 나태주의 시를 2점 실어 보냈더군.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겨울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 나태주
레오나르도에 대한 응답으로 <풀꽃과 놀다>를
친구에게 발송한 다음 <머피의 법칙>을 펼쳐들었지.
<17장 하느님과 동행하는 이점>에서 굳센 믿음과
열렬한 소망과 기도로 일어난 기적의 사례들을 읽으며,
공감하고 느끼는 바가 어찌나 많던지 숨도 쉬지 않고
한 장을 다 읽어 치웠다네. 책을 덮으면서도 한두 차례
더 읽어봐야겠다는 욕구가 일었어.
<명견만리>에선 2015년 12월에 40년 묵은 양당 구도를 깨고
신생정당 포데모스가 하원 350석 중 무려 69석을 확보하며
제3당으로 떠오른 스페인의 이변과 원인 및 변화 등을 접하고,
우리나라 정치가 앞으로 어떻게 바뀌어야할지를 추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네. 열린민주당이 지난 4월의 총선에서 20석만
확보했어도 흐린 정치에 맑은 물을 공급할 수 있었을텐데...!
신의진의 <아이심리백과 5~6세편>에서는 애착과 인격존중에
의한 아이의 자율성 제고에 관하여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지.
어제 프롤로그만 읽어보았던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가 놀라웠지.
여태 이해하거나 포용하기가 꺼려졌던 "넋 빠진 노인들"에 관하여
어렴풋이나마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 거야.
◈자기 존재에 주목받은 이후부터가 진짜 내 삶
세월호 특별법 서명을 받던 곳에서 일군의 노인들이 서명대 집기를 부수고 유가족들에게 욕설을 퍼봇는 일이 있었다. 그 고통스러운 소 동이 끝난 후 행패를 부리던 노인 중한 명과 얘기를 나누게 됐다. 나는그 소란에 대해서 묻지 않고 “ 고향이 어디세요?” 물었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오래전 세상을 떠난 아내와 살았던 시절로 갔다가 자신 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아들과 며느리 이야기로 옮겨왔다. 거리에 버 려진 부서진 장롱 같은 그의 삶을 듣다가 눈물이 차오르기도 했다.
한참 만에 노인이 불쑥 말했다.
“ 내가 아까 그 아이 엄마(세월호 유가족)들한테 욕한 건 좀 부끄럽지” “ 그런 마음이셨군요. 그러셨군요."
나는 그렇게만 말했다. 사과를 받고자 시작한 얘기가 아니었지만 노인은 사과를 했다 사과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진 않았지만 노인의 마음속에 미안함이 조금씩 고이고 있다는 걸 대화 중에도 느낄 수 있었다.
소동에 관한 얘기 그 자체만으로는 소동에 관한 진짜 얘기를 할수 없다. 싸우려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방금 전 자신이 벌였던 소란과 이야기란 바로 '나' 이야기, 자기 존재에 대한 이야기다.
자기 존재가 집중받고 주목받은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안정감을 확보한다. 그 안정감 속에서야 비로소 사람은 합리적인 사고가 가능하다. 노인이 보였던 뜻밖의 합리성도 사실은 자기 존재가 주목받은 후에 생긴 내면의 안정감에서 나온 것이다
보수단체 집회에 동원돼 당당하게 폭력을 휘두른 노인들에게 사과를 받으려면 몇 시간의 설득이나 토론이 필요할까 설득이 가능하기는 한 걸까
오랜 경력의 인부들도 힘들어하는 그랜드 피아노를 혼자서 옮기는 전문 이사꾼이 있단다. 피아노의 어느 지점에 집중적으로 힘을 모아야 피아노가 중심을 잃지 않고 들리는지를 몸으로 익힌 이는 피아노의 구조와 무게 중심을 오랜 경험을 통해 몸으로 체득해서 가능한 일이다
그랜드 피아노를 혼자서 들어올리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 철옹 같기도 하고 안개 같기도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다 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정확한 한 지점도 그랜드 피아노처럼 분명히 존재한다. 그걸 알면 사람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그 지점이 바로 한 개별적 존재로서 그 사람의 고유한 '자기'다
노인은 보수단체에서 개최한 강의를 들었다. "우리나라가 지금 이렇게 잘살게 된건 모두 어르신들 덕분이다. 어르신들이 진정한 애국자다. 오랜 세월 고생 많으셨다"는 얘기를 듣는데 코끝이 시큰했다. 노인이 말도 안 되는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도 자기 존재를 알아주는 사람들(보수단체 강사 등)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오랫 조차 없었던 방구들에 불이 지펴지듯 마음이 덥혀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노인이 그 당당한 폭력을 후회한 것도 자기 존재에 주목해주고 자기 삶에 귀 기울여준 사람(나)을 만나서였다.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예외 없이 변하게 하는 그 지점이 바로 '자기'다. 사람은 자기에 공감해 주는 사람에게 반드시 반응한다. 사람은 본래 그런 존재다.
노인만 그런 게 아니다. 학교나 부모에게 주목받지 못하는 청소년들, 좋은 대학을 못 다니고 변변한 직장이 없다는 이유로 형제나 또래 중에서 제대로 눈길 한번 받지 못하는 청년들의 삶도 한 개별적 존재로서 인정받고 주목받지 못한다는 점에선 노인의 삶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거리에서 그 노인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후에 함께 활동하는 시민 치유 활동가들과 함께 노인들을 찾아 그들의 '자기'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듣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노인들의 두 눈동자에 쏟아지 는 50~60대 시민 치유 활동가의 눈길과 반응 하나하나는 화창한 날 활짝 연 창문으로 들어오는 별 같은 것이었다. 노인들의 '자기'와 자기 삶에 쏟아지는 별. 햇별이 비추는 곳에서 생명이 시작되듯 노인들도 그랬다. 평생 이렇게 얘기하긴 처음이라며 햇살처럼 웃는 노인 들의 고백은 우리 자신의 삶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젊든 늙든 우리가 왜 이렇게 아픈지 이젠 알것 같다. 자기 존재에 주목을 받은 이후부터가 제대로 된 내 삶의 시작이다. 거기서부터 건강한 일상이 시작된다. 노인도 그렇고 청년이나 아이들도 그렇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이 글을 작성하면서 하나 배운 게 있어.
Hdcr이라는 프로그램인데, 스캔해 둔 JPG파일을 워드프로세서 파일로 변환해 주는 S/W지.
화면을 그림파일로 바꾸는 작업은 자주 해봐서 익숙하지만 다양한 문서파일로 변환해본 건 처음이야.
세상에는 배울 게 엄청 많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됐어.
산책은 커녕 마당에도 나가보지 못했는데 오후 다섯 시가 다가오고 있었어.
여섯 시 쯤 저녁식사를 하고 아파트로 가봐얄텐데 내거 선호하는 야채볶음밥이 떨어졌더군.
부랴부랴 식자재마트로 가서 볶음밥 다섯 개와 다용도 혼합야채를 한 개 사 왔지.
서둘러 저녁식사를 마치고 딸네로 가 할매를 태워 온 다음 뉴스를 본 후 이 글을 작성하다 보니
어느 새 11시가 넘었구먼.
책이 좋아지고 안목이 트이면서 무언가에 열중할 수 있게 변화된 것이 다행스러워.
오래전 부터 혼자서도 잘 노는 게 내 특성인데 언제부턴가 옅어져서 아쉬웠거든.
주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