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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 21-25
여호와 하나님이(2)
결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보는 것은 끔찍스러운 일입니다. 그쪽으로 굳어져 버린 사람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개는 부모 때문이고, 또 그릇된 사상을 선배를 통해서, 혹 책을 통해서 소개받은 때문입니다. 저는 딸 아이에게서 결혼하겠다는 말을 듣고서 참 기뻤습니다.
1. 본문 21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불경한 자들은 여자를 창조하신 방법에 대해 비웃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 중에는 모세가 우화를 말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가 계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모세께서는 인간의 관계가 더욱 신성해야 한다는 목적으로 남자와 여자가 하나이면서 동일한 기원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인격 안에 인성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와를 만들어 그녀가 온 세상의 일부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8)라는 말씀이 지니는 중요성입니다.
아담은 이러한 방법으로 마치 거울 속에서 또 하나의 자기를 보는 것처럼 하와를 통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실을 인정하도록 가르침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와도 그 남자에게서 유래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남편에게 기꺼이 순종하도록 가르침 받았습니다. 만일 이 두 사람이 각기 서로 다른 근원에서 나왔다면 삶의 방식이 어떻게 시작되었겠습니까? 아마도 상호간에 멸시, 질투, 투쟁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완악한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여기에서 무엇이라고 반대합니까?
‘그런 해석은 풍습과 아주 상이하므로 신빙성이 없다’ 고 할 것입니다. 만일 풍습이 체험이나 용법으로 알려지지 않는다면 그러한 반대는 인간 생성의 일반적인 방법에 대한 것보다 훨씬 다채로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들은 아담에게서 취한 갈빗대는 전혀 필요 없는 것이 되거나 그의 몸은 갈빗대가 없으므로 사실 불구자가 되었으리라고 반대합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그들이 아주 불합리한 점을 발견했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의 창조주께서 갈빗대를 이미 예비하셨으며, 이것이 다른 몸을 이루도록 하셨다고 말한다 해도 이러한 대답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일치되는 점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보다 큰 자비로써 자신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아담에게서 무엇인가 취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은 갈빗대를 하나 잃었습니다. 그렇지만 인생의 진실한 반려자를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큰 보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전에는 불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내를 통해 완전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과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몸의 지체에 힘을 부여받아야 할 만큼 연약해지셨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아담이 아주 깊은 잠에 빠졌다는 사실에 주의합니다. 그리고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합니다. 더욱이 파열이나 탈장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없어진 갈빗대를 보충해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살로 그곳을 다시 채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힘도 전혀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단지 뼈만이 제거되었습니다. 모세는 여기에서 ‘만드시고’ 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면서 인류가 여자의 인격 안에서 완전해졌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러한 것은 이전에 이미 시작된 건물을 완공하기 위하여 묘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것이 가정적인 경영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마치 모세가 합법적인 가정의 질서는 그때서야 설정되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해석은 전자의 설명과는 너무나도 차이가 있습니다.
2. 본문 22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입니다.
모세는 이제 결혼이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제도라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특별히 알아두어야 할 유용한 제도입니다. 아담은 자기 마음대로 아내를 취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주시고 승인하신 그녀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의 존엄성은 우리가 하나님을 창조주로 시인할 때 더욱 분명히 드러나게 됩니다. 사단은 결혼을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만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럴수록 결혼을 비난과 오해로부터 더욱 보호하고 변호하여 결혼의 본질적인 신성한 위엄성을 인식시켜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선하고 평온한 양심에 따라 결혼생활을 향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는 사랑과 존경으로 함께 생활하게 됩니다. 결혼을 치욕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사단의 간교한 계획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결혼에 오명을 씌우는 방법입니다. 말하자면 독신생활이라는 아주 무서운 병적인 것을 제시합니다.
둘째, 결혼한 사람들이 즐거움을 얻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몰두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결혼의 존엄성을 제시함으로써 그러한 미신적인 것을 완전히 없애고 신실한 자들이 하나님께서 내놓으신 합법적이고 순수한 의식을 정숙하게 이용하는데 방해받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남편은 자기 아내와 단정한 생활을 하기 위해 육신의 정욕을 억누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이유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결혼에 대해서 건전하게 생각하고 존엄한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모든 비난이 결혼의 창시자이시며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모세는 여기에서 하나님을 결혼의 창시자이시며 주관자라고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만 인식하는 것은 매우 부족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항상 힘써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창조주뿐 아니라 섭리하시고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으로 인식하고 고백합니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라고 하신 주의 말씀은 아주 귀중한 말씀입니다.
3. 본문 23절은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입니다.
1) 여기에서는 아담이 그 당시 아주 깊은 잠에 빠져 있었는데 어떻게 이 같은 것을 알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만일 우리가 아담이 추측으로 그 모든 것을 그렇게 빨리 판단하고 깨달아 말할 수 있었다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정말 궁색한 답변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의 과정을 은밀하신 계시나 말씀을 통해 명백히 나타내셨으리라 는 사실을 결코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의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것이 하나님께 꼭 필요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이러한 유대관계로써 더욱 밀접히 결합시키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만일 인간도 그 사실을 몰랐다면 결합도 전혀 효과를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그들에게 알려주셨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결혼을 창시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실 자체와 그 성취 방법과 계획까지 계시하셨다고 결론지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아담에게 깊은 잠이 내린 것은 아내의 기원을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통과 수고를 모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담은 자신의 갈빗대를 잃은 대신에 놀라운 보상을 받았습니다.
2) 23절 끝에 “이는(이번에야 말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담은 (하파암 ; 이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지금까지는 무엇인가 부족했다고 묘사합니다. 이것은 마치 그가 ‘이제야 나는 반려자를 구했다. 이 사람은 실제로 내 살의 일부이다. 그리고 그녀를 통해서 내 자신 곧 또 하나의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된다’ 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이어서 그는 자기 아내에게 남자 이름에서 취한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이름한 것은 이 증거와 이 표로써 하나님의 지혜를 끊임없이 전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 이렇게 최초의 가정에서 부부의 도리는 무엇보다도 동질성과 동등성, 대등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① 특히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렇습니다.
② 동등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됐습니다.
③ 함께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는 자입니다.
④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함께 감당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함께 이루기 위하여 남녀의 협력이 필요합니다(고전11:11-12). 그러기에 ⓐ 먼저는 하나님의 뜻을 함께 아는 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 함께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2)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가정을 세우실 때에 부부의 도리를 말씀하시면서 차등성과 종속성에 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칼빈은 23절에 “여자”의 히브리어 “이 솨”를 “그 남자의 여자”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이것 또한 창세기가 가르치는 논리적 순서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남자를 지으셔서 사명과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 후에 돕는 배필을 지으셨습니다.이렇게 해서 처음 가정과 사회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 수행에 있어서 남자가 앞장서고 여자가 돕는 위치입니다. 이렇게 이해해야 하나님의 정하신 질서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인간 관계에서 다스림과 복종이 없다면 공동체가 존속할 수 없습니다. 가정이든 교회든 국가든 마찬가지입니다.
(3) 그러므로 처음 세워진 창세기의 가정 이야기는,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귀히 여기며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고 순종할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내를 하나님이 주신 크고 고귀한 선물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맡기신 사명에 충성하는 길에서 아내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아내도 남편이 하나님의 뜻을 함께 받아 지도적 위치에서 이루어가야 할 자 인줄 알고 존경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엡5:15절 이하에서 그리스도인은 가정과 교회에서 희생하는 사랑과 희생하는 순종으로 주의 뜻을 이루어야 할 자라고 말씀합니다. 고대 주석가들은 라틴어의 결합으로 인해서 (이솨 ; 여자)라는 말을 virago(비라고; 여장부)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쓰인 히브리어는 ‘그 남자의 여자’라는 뜻입니다
4. 본문 24절은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입니다.
1) 여기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말씀하시는 분으로 묘사하는지, 아니면 아담의 대화가 계속되는 것을 말하는지 의아합니다.
어쩌면 모세가 맡은 선생이라는 직무에 힘입어 이러한 말을 덧붙였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중에서 마지막 견해에 동의합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역사적으로 설명한 후에 다시금 하나님의 제도가 지니는 목적을 과시하면서 부가적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사회와 관련된 직무 가운데 남자가 아내와 연합하는 것이 가장 기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 연합의 방식이 가장 신성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서 남편은 자기 육신의 아버지보다 자기 아내를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떠나기를 종용했다고 해서 결혼에 의해 부모와 아들을 단절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연의 다른 속박으로부터 면제시키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반대되는 행동을 하실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경건은 더욱 개발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체도 절대로 침해될 수 없는 성결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모세는 결혼에 대해 말씀하면서 부모님을 떠나는 것보다 아내를 버리는 것이 더 비합법적이라는 점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사소한 원인으로 이혼을 하는 사람들은 한가지 단순한 경우로 자연의 법칙을 깨뜨리는 결과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혼을 하는 경우에 그들은 결국 하찮은 존재로 변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부모와 자식의 공동생활을 강제로 주장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것보다 더 좋아하시는 그 유대 관계를 끊으려는 가장 사악한 죄악이 됩니다.그렇기 때문에 혹 한 지붕 아래 사는 경우에라도 하나님을 향한 한 가정의 독특성과 독립성이 저해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부부 사이에도 어느 한편으로의 불경건한 방식으로 절대적 종속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개별적인 독특성과 독립성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일을 어느 한쪽이 강제할 수 없습니다. 이 중요한 사실이 꼭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2) 본문 24절에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대 라틴어 번역자들은 이 구절을 ‘한 몸에’ 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헬라 주석가들은 좀 더 강하게 ‘그들 두 사람은 한 몸이 될 것이다’라고 해석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이 구절을 마태복음 19장 5절에서 인용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 둘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의미에 있어서 모호한 점은 전혀 없습니다. 모세께서는 하나님께서 많은 아내를 정하신 것이 아니라 한 남자에게 한 아내만을 정해 주셨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께서는 일반적인 면에서 아내를 단수로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므로 부부생활의 결합은 오직 두 사람 사이에만 존재합니다. 여기에서 일부다처제가 하나님께서 내놓으신 제도에 크게 불일치 한다는 점도 쉽게 드러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유대인의 자발적인 이혼에 대해 비난하시면서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마19: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제도가 영구히 우리의 행동 규칙이 되어야 하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말라기 선지자께서도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말2:15)라고 유대인들을 향해 선포했습니다. 일부다처제는 합법적이고 신성한 결혼의 부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결혼생활의 형식에 있어서 뿐만 아닙니다. 그 내용 전반에 있어서 그러합니다. 심지어는 악하고 불량한 남편이나 아내와도 인내하면서 살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어간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자신이 만들어져 가는 과정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본문 25절은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입니다.
사람들이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움이 없고 볼품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 본성의 숭고함과는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편 가축들은 벌거벗고 있으면서도 전혀 수치감이 없습니다. 우리는 벌거벗은 사람을 보면 수치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당나귀, 개, 황소는 그런 감정을 전혀 나타낼 수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모든 사람은 보는 사람이 없는 경우에도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우월성은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까?
모세는 3장에서 우리가 고찰한 수치감의 원인에 대해 설명해 줄 것입니다. 그가 여기에서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에 명예로운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치욕이 우리 자신들의 잘못으로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이 죄로써 부정해지기 전에는 부당한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욕적인 것은 모두 우리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런 인식을 가진 우리가 주 안에서 가정을 이루고 주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살 때에 늘 주의 은혜를 기리며 그 분 안에서 씻기움을 받는 중에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를 향하여 매일 회복되어 가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부부가 이미 영육간에 하나이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다스리든지 복종하든지 아무런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영육에 있어서 하나가 된 견고한 터 위,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생각이요, 그 생각에서 나오는 진리를 드러내는 말이요, 그 진리를 함께 따라가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희생하고 사랑으로 복종하니 전혀 무리가 없고, 문제도 없습니다. 이렇게 부부 사이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향한 사랑이 반듯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미 창조 때에 심어두신 원칙입니다. 변함 없는 원칙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기초를 따라서 가정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면 하나님께서 은혜와 복을 주셔서 잘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