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총회겸 2021 가을 문화유적 탐방(2) – 세종대왕자태실
세종대왕자태실(世宗大王子胎室)
❍ 지정종별 : 사적 제444호(2003. 3. 6 지정)
❍ 위 치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8번지
❍ 조성연대 : 1438년(세종20)~1442(세종 24)
❍ 재 질 : 화강암
❍ 태 실 수 : 19기
∙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적서(嫡庶) 19자중 장자(長子) 문종(文宗)을 제외한 18왕자의 태실 18기와
단종(端宗)이 원손이었을 때 조성한 태실 1기
※ 단종의 태실은 세자로 책봉된 후 성주 가천 법림산으로 옮겨 새롭게 조성함
❍ 문화재적 가치
∙ 태실이 군집을 이룬 전국 최대의 태실 문화유산
∙ 태실 조성 방식의 시대적 변천을 확인할 수 있는 최고의 문화유산
(자료제공 : 성주군)
동우회 회원 문화유적 탐방 관련 사진
위 태실 자료 사진 : 성주군 제공(홍보물 및 태실문화관 전시품)
세종대왕자태실이 자리잡은 명당에 대한 이야기
선석산 아래 태봉에 자리한 이 태실은 조선조 세종대왕의 적서(嫡庶) 18왕자와 단종의 태를 안장한 곳으로 원래 이 산봉우리에는 성주이씨 중시조인 농서군공 이장경(李長庚)의 묘와 묘각이 있었으나 조선 왕가에서 왕자들의 태를 한곳에 안장하기 위해 지관을 통해 길지를 찾던 중 이곳의 산세와 지형이 뛰어난 명당이라 이장경의 묘를 옮기게 하고 세종 20년∼24년(1438∼1442) 왕자들의 태를 안장한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태실지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장경의 묘를 옮긴 것은 그의 장지에 노승이 나타나 "산(태봉)위의 저 나무를 베고 12개의 관을 묻어 묘지를 쓰면 더 없는 길지이나 묘각을 지으면 후일 그 소유가 바뀌지 않을까 두렵다"라고 하였는데 마침 산 위의 나무를 베니 나무에서 큰 벌이 나와 노승은 쏘여죽고 후손들이 11개의 헛관으로 묘를 쓰고 그 후 묘각을 지었기 때문이라 한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처음에는 19기의 태실을 두었으나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은 뒤 이를 반대한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과 계유정난(難)에 죽은 안평대군의 태실과 태실비 등은 세조3년(1457) 산 아래로 파 던져졌으나, 1977년 흩어진 석물을 찾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 당시 예조판서(禮曹判書)인 홍윤성(洪允成)이 이찬한 가봉(封)를 세조의 태실 앞에 세웠다. 그러나 지금은 비문이 지워져 알아 볼 수 없으며, 민담에 의하면 세조의 잘못을 미워한 백성들이 비석에 오물을 붓고 돌로 갈아서 거의 글자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한다.
이곳에서 출토된 태항아리, 지석 등의 유물의 일부는 국립대구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및 경북대학교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 외에는 1929년 왕가로 모두 옮겨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출처 : 성주군 제공)
감사합니다
사진촬영 : 김성길(전국사진작가 심사위원), 이태희
첫댓글 가끔 보슬비도 내리는 날씨에 일일이 모습답는다고 수고많았습니다.
건강하세요
2021년도 문화탐방 전과정을 촬영하여 올려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오늘도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세종대왕자태실의 기록과 명당의 현지 묘지 묘각을 담아주시고
탐방객의 진지한 관람 모습을 공유하여 주신 김성길 작가님 이태희 작가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