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9일(월)-조선일보 논설위원 강경희 칼람
'건국전쟁' 62먼묭, 이제야 걷히는 이념 전쟁의 장막 뒤
한강 다리 끊고 도망간 '런(RUN)승만'이라고?
전시 외교 올인하고 망명정부 거부하면서 끝까지 싸우다 죽겠다고 머리맡에 권총 놔둔 '건☜승만'이었다.
다큐멘터리 '건국전쟁'이 개봉 17일만에 관객 60만명도 넘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제일 황당하게 와닿았던 장면은 한강 다리 끊고 도망간 '런(run)승만'으로 조롱받고 폄하되고 있다는 대목이었다.
김덕영 감독이 3여 년간 제작하면서 101분 필름에 다 보여주지 못한 미반영 분량이 훨씬 많을 것이다.
김일성과 스탈린의 6.25전쟁 계획은 발발 2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 이남을 차단해 국군을 격멸한 다음, 남한에 있던 20만명 이상의 '인민봉기'로 정부를 전복하고 한 달 내 전쟁 종결을 목표로 했다.
북한 남침이후 3일간 이승만 대통령의 행적'을 군사학자 남정옥)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씨가 논문으로, 소책자로 기술한 게 있다.
정부 수립 2년밖에 안 된 신생 국가가 조직도 미비하고 전차와 전투기도 한 대없는 심각한 戰力열세 속에 침략을 당했는데, 국제정세에 혜안 있던 75세의 老대통령이 어떤 戰時외교로 미국과 유엔의 지원과 참전을 신속하게 끌어내 대한민국을 수호했는지를 볼 수 있다.
간추려 소개한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북한군의 대대적 남침이 시작됐다. 대통령이 첫 보고를 받은 것은 오전 10시경,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하고 미국 본토에서 군함을 구입해 하와이에 머물던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의 즉각 귀국을 지시하고(25일 오전 11시), 무초 미국 대사롸 회동하며(오전11시 35분), 장면 주미 대사에게 미국 원조를 빨리 받아내도록 지시하고(오후 1시), 비상국무회의를 주재했다(오후 2시). 미국의 지원이 공식화되지 않자 밤늦게 무초 대사를 다시 경무대로 불렀다(밤 10시). 밤을 꼬박 새우면서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했지만 전속부관이 깨울 수 없다고 하자 "한국있는 미국 시민도 죽어가는데 장군 잘 재우라"하고 호통치고는(26일 새벽 3시), 무처대사에게 전화해 대포와 전투기 지원을 요청했다(새벽 4시 30분).
이튿날 오전 치안국을 방문해 전황을 확인하고 경무대로 돌아가는 길에 서울 상공에는 북한의 야크 전투기가 맴돌았다(26일 오전). 전세는 급격히 악화됐다. 의정부가 함락되고 북한군의 서울 진입이 초읽기에 들어섰다. 대통령은 서울에 남겠다고 했지만 "국가 원수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더 큰 혼란"이라는 설득에 피란을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