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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 철학의 본질: 자기 통제와 실천
철학은 말이 아니라 삶의 실천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통제하는 존재여야 하며,
철학자는 **그 선택 능력(프로하이레시스)**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2. 통제할 수 있는 것 vs 없는 것
세상에는 두 종류의 것이 있다:
① 우리의 통제 안에 있는 것(생각, 판단, 욕구 등)
② 우리의 통제 밖에 있는 것(몸, 재산, 명성, 타인의 평가 등)
진정한 자유는 통제 가능한 것에 집중하고,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의존하지 않을 때 얻어진다.
3. 사물의 본성에 대한 이분법
프로하이레시스(Prohairesis):
인간만이 가진 자유로운 선택 능력, 선과 악의 기준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이다.”
디하이레시스(Dihairesis):
어떤 것이 나의 통제 안에 있는지 구분하는 능력,
이 분별을 통해 **삶의 평정(아파테이아)**에 도달한다.
4. 외부가 아니라 내면에 자유가 있다
자유, 행복, 평온은 외부의 소유나 평판이 아니라
내면의 선택과 통제, 그리고 분별에 달려 있다.
5. 인간은 자연에 따라 살아갈 때 행복
자연은 신과 인간의 이성을 포함.
인간은 신에게서 받은 이해하는 힘과 의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함
에픽테토스
에픽테토스(그리스어: Ἐπίκτητος, 라틴어: Epictetus, 55년경~135년경)는 고대 그리스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소아시아에서 노예로 출생하였으며 고문을 받아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는 이때 스토아 철학을 배웠으며 노예에서 해방되자 젊은이들에게 철학을 가르쳤다. 그의 사상은 의지의 철학으로서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으며, 자유로울 수 있는 최대의 것으로는 신을 생각하였다. 그는 아무런 저서도 쓰지 않았으나 제자인 아리아노스가 그의 강의를 간추려 쓴 《어록》, 《제요》가 있다.
생애
에픽테토스는 서기 55년경에 태어났다.[1] 출생 장소는 프리기아의 히에라폴리스이었다.[2] 그의 부모가 이름을 지어주었으며, "에픽테토스"는 그리스어로 "획득한"이란 뜻이다. 그는 어린 시절을 로마에서 보냈으며, 네로의 해방노예이며 매우 부유한 자유민이었던 에파프로디토스 밑에서 노예로 일했다. 에픽테토스는 무소니우스 루푸스 밑에서 노예로서 스토아 학파 철학을 공부했다.[3] 하나의 자료만이 주인인 에파프로디토스가 에픽테토스의 다리를 부러뜨려 절름발이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어서 정확한 사정을 확인하기 힘들지만, 어쨌든 그는 절름발이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4] 좀 더 믿을 만한 증언은 킬리키아의 심플리키우스의 것으로, 에픽테토스가 어린 시절부터 절름발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5]
에픽테토스가 어떻게 노예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는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결국 그는 자유민이 되었고 로마에서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서기 93년경 도미티아누스는 모든 철학자를 로마에서 쫓아내고, 결국에는 이탈리아에서 떠나게 했다.[6] 에픽테토스는 그리스 에페이로스에 있는 니코폴리스로 떠났으며, 니코폴리스에 철학 학교를 세웠다.[7]
그의 가장 유명한 제자인 아리아노스는 그의 밑에서 젊은 학생으로 공부했고(대략 AD.108년 경), 에픽테토스의 강의를 적은 공책을 바탕으로 유명한 "에픽테토스의 논쟁"을 썼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일부 학자는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빌린 책들처럼, 아리아누스의 책도 에픽테토스가 썼다기보다는 아리아노스의 저술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8] 아리아노스는 에픽테토스를 힘있는 연설가로 묘사하였다. 그에 따르면, "에픽테토스는 듣는 사람에게 에픽테토스가 그에게 느꼈으면 하는 것을 느끼도록 유도하였다."[9] 뛰어난 이들이 그와 대화를 나누려고 하였고,[10]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그와 친하게 지내면서[11] 니코폴리스에 있는 그의 학교에서 에픽테토스의 말을 들었을 지도 모른다.[12][13]
그는 평생 별로 가진 것 없이 매우 검소하게 살았다.[5] 그는 오랜 기간 혼자 지냈으며,[14] 그러나 노년에 그는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의 자녀를 입양했고, 한 여성의 도움을 받아서 그 자녀를 길렀다.[15] 에픽테토스는 서기 135년 무렵에 사망했다.[16] 그가 죽은 후에, 그가 사용했던 기름 램프는 그를 존경했던 사람에게 3000 드라크마에 팔렸다.[17]
사상
“ 모든 존재하는 것 중에서 일부는 우리의 힘 안에 있고, 다른 것은 우리의 힘 안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힘 안에는 생각, 욕구, 얻고자 하는 의지와 피하고자 의지가 있는데,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의 행동을 포함하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우리 힘 안에 있지 않은 것은 몸, 재산, 평판, 관직,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의 행동을 포함하지 않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우리 힘 안에 있는 것은 자연에 대해서 자유롭고, 자연에 의해서 방해받거나 속박받지 않습니다. 우리 힘 안에 있지 않은 것은 약하고, 노예처럼 자유롭지 못하며, 방해에 굴복하며, 다른 무언가에 의존합니다. 다음 말을 기억하십시오. 만약에 당신이 자연스럽게 노예와 같은 것을 자유롭다고 여기고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의 것을 당신 자신의 것으로 상상한다면, 당신은 방해에 부닥칠 것이고, 슬피 울게 될 것이며, 혼란에 빠질 것이고, 신들과 사람들에게 불평을 늘어놓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당신이 오직 당신에게 속한 당신의 것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것은 정말로 다른 사람의 것으로 생각한다면, 아무도 당신을 혼란스럽게 하거나 방해하지 못할 것이고, 당신은 누구도 비난하지 않을 것이며, 당신은 당신의 의지에 반하는 어떤 일도 하지 않을 것이고, 당신에게는 어떠한 적도 없을 것이며, 어떤 위협도 당신을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편람,1. 매데슨 번역 ”
알려진 바에 따르면, 에픽테토스는 스스로 쓴 것이 아무것도 없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사상은 모두 그의 제자인 아리아노스가 기록한 것이다.[9] 주요한 책은 "강연"이다. 원래는 여덟 권이었으나 네 권만 보존되었다.[18] 또한 아리아노스는 대중에게 맞춘 요약판을 편집하였고, 그 요약판의 제목을 "편람," 또는 "안내서"라고 붙였다. "강연"의 서문에서 아리아노스는 루키우스 겔리우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그에게 들은 것이 무엇이든 간에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한 단어 한 단어를 받아 적었고, 내 미래의 쓸모를 위해서 기억을 통해 그의 사고방식과 솔직함이 담긴 그 말을 정확히 보존하려고 노력했다네."[9]
에픽테토스는 초기 스토아 학파보다 더 윤리학에 집중했다. 되풀이해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소크라테스의 것이라고 말하며, 그는 우리의 목적은 우리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에픽테토스에 따르면, 스토아 학파에 있어 선생의 역할이란, 그의 제자들에게 배우도록 격려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모든 인간에게 유효하며 변하거나 침범할 수 없는, 진실한 "사물의 본성"을 배우게 해야 한다.
"사물의 본성"(nature of things)은 한발 더 나아가면 두 범주로 구분된다. 하나는 우리의 한정된 힘에 복종하는 것이고(prohairetic things), 다른 하나는 우리의 한정된 힘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다 (aprohairetic things).
첫 번째 범주에는 판단, 충동, 욕망, 혐오 등이 속한다.
두 번째 범주에는 소위 "아디아포라"(adiaphora)라고 하는 것이 속하는데, 구체적으로 살피면 건강, 물질적인 부, 명성 등이 있다.
범주를 논한 다음에, 에픽테토스는 제자들에게 두 가지 기본 개념을 소개했다.
하나는 프로하이레시스(Prohairesis:선택 또는 사리판단)의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디하이레시스(Dihairesis)의 개념이다. 프로하이레시스는 사람은 다른 모든 생물과 구분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능력으로, 우리 자신의 판단에 따라 우리가 무엇인가를 몹시 원하거나 피하고, 격한 감정에 휩싸이거나 퇴짜를 놓고, 동의하거나 반대하는 것이다. 에픽테토스는 반복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prohairesis)이다." 디하이레시스(Dihairesis)는 우리의 선택을 실천하는 판단이며, 우리가 우리의 한정된 힘 안에 있는 것과 한정된 힘안에 없는 것을 구분하도록 한다. 결국 에픽테토스는 그의 제자들에게 선과 악은 오직 우리의 선택에 존재할 뿐, 결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님을 가르쳤다.
https://naver.me/5OQAGxtr
에픽테토스
[ Epictetus ]
요약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고대 그리스 로마 철학자이다. 노예 출신이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후기 스토아학파의 대가가 되었다. 인간의 내적 자유에 대한 고찰로 스토아 철학의 윤리학을 발전시키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원어명 Epiktētos
출생-사망 55? ~ 135?
목차
삶과 업적
루키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와 함께 대표적인 후기 스토아 철학자로 꼽힌다. 그가 남긴 저서는 없으나 제자 플라비우스 아리아누스(Flavius Arrianus)가 정리한 《담화록(Discourses)》과 《편람(Encheiridion)》, 그 외의 단편적인 기록들을 통해 관련 사상이 전해진다.
기원후 1세기 중반 아나톨리아 남서부 프리지아(Phrygia, 지금의 튀르키예)의 도시 히에라폴리스(Hierapolis)에서 태어났다. ‘부수적으로 얻은’, ‘획득한’이란 의미의 그리스어 ‘에픽테토스(Ἐπίκτητος)’로 불리던 노예였다는 것 외에 유년기나 가족에 대한 별다른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9세기 말 편찬된 대백과사전 《수다(souda)》의 기록에 따르면 에픽테토스는 어린 시절 네로 황제(Nero)의 신하 에파프로디토스(Epaphroditos)의 노예가 되어 로마로 건너갔다. 에픽테토스는 다리를 절고 병약한 인물로 주로 묘사된다.
에픽테토스의 삶은 스토아 철학자였던 스승 무소니우스 루푸스(Musonius Rufus)을 만나면서 크게 바뀌었다.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으나 이후 에픽테토스는 노예상태에서 풀려나 로마에서 철학자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황제의 철학자 추방령으로 로마에서 쫓겨났으며, 그리스 서부 대도시 니코폴리스(Nicopolis)에 새로이 정착해 평생을 스토아 철학 전파와 제자 양성에 힘썼다. 높은 명성을 얻었으나 이에 연연하거나 부를 탐하지 않으며, 자신의 철학을 삶 속에서 성실하게 실천하였다고 한다.
철학 사상과 의의
초기 스토아 철학자들이 스토아 철학의 근간을 세우고 중기 스토아 철학자들이 이를 발전시켰다면, 후기 스토아 철학자들은 스토아 철학 이론을 현실에 어떻게 적용해 나갈 것인지를 고심했다고 할 수 있다. 에픽테토스 역시 지식에 매몰되는 것을 경계하고, 혼란스럽고 급변하는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러나 그는 현실 정치에 적극 참여하여 이권을 누린 다른 후기 스토아 철학자들과는 달리 욕심 없고 절제된 삶과 소박한 가르침 속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실천하고자 했다.
에픽테토스 사상의 특색은 윤리학에 있다. 이는 그의 어록이 비교적 상세하게 담긴 《담화록》과 주요 논지를 요약한 《편람》에 잘 드러나 있다. 당대 지식인들은 물론 대중들에게까지 널리 읽었다고 알려진 이 글들에서 에픽테토스는 ‘인간의 자유와 평정’, ‘신적 자연과 이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찰한다. 에픽테토스는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외적세계와 내적세계로 나눴다. 자연재해, 육체의 건강과 질병, 사회적 지위, 부, 전쟁 등은 외적으로 이미 결정되어 주어진 것들이므로 개인의 선악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이에 반해 주어진 외부세계에 반응하는 인간의 믿음과 욕구, 충동, 혐오 그리고 행동의 선택은 개인의 의지와 자유가 작용하는 영역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이처럼 에픽테토스는 인간의 진정한 자유가 외부조건이 아닌 인간 내부에 존재한다고 보았는데 여기에는 노예 출신으로 자유민이 되기까지의 험난했던 삶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 《담화록》 전반에서 에픽테토스는 제도나 선천적으로 제약을 뛰어넘는 인간의 자유와 그로부터 얻는 평정을 강조한다.
외적조건보다 내면의 정신적 자유를 강조한 에픽테토스의 사상은 행복한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그는 인간은 자연에 따라 살아갈 때 진정 행복해진다고 보았다. 여기서의 자연은 신과 인간의 이성을 포함한다. 따라서 “내가 원하는 것보다는 신이 원하는 것이 더 낫다. …나의 뜻은 신과 함께 한다.”는 에픽테토스의 말은 종교적이기 보다는 다양한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신이 부여해준 이성을 통해 신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다. 우주와 비교했을 때 인간은 작은 존재이지만 인간의 이성은 신보다 작지 않다. 따라서 인간은 신에게서 받은 이해하는 힘과 의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한편, 소크라테스를 자신의 철학적 모델로 삼은 에픽테토스는 대화를 통해 얻는 깨달음을 중시했으며 난해하거나 화려한 수사어구를 쓰기보다는 쉬운 말로 진리를 전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제자들과 논의한 철학적 주제들 상당수가 주로 결혼, 가정, 우정, 질병 등 일상 소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사상은 후대 철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로마 황제이자 스토아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에픽테토스의 저작을 자주 인용하였다. 중세 신학자들은 에픽테투스의 사상을 기독교 관점으로 해석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