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한 사과가 없어요” 추석 앞두고 농가 덮친 ‘탄저병’
예산군 일대 사과 농장 ‘초토화’
반점 생기고 썩어 상품가치 없어
인건비 문제로 수확 포기하기도
50년 동안 사과 농사를 해온 이인석 씨(78)가 밭에 쭈그려 앉아 탄저병에 걸려 떨어진 사과를 살펴보고 있다. 김태영 기자
“멀쩡한 사과가 없는데 따면 인건비만 더 들지. 그냥 내버려 두렵니다. 올해 사과는 포기했어요.”
20일 충남 예산군 오가면에 있는 사과밭. 밭 주인 이인석 씨(78)는 오른손 검지로 크게 X자를 긋더니 시선을 땅에 꽂으며 이렇게 말했다. 시커멓게 썩어 떨어진 사과가 이 씨 신발에 밟혀 곤죽이 돼 쉰 냄새가 진동했다.
이 씨는 “50년 동안 사과 농사를 지었는데 처음 겪는 재해다. 하늘이 원망스럽다”라면서 “지금 같으면 수확을 안 하는 게 가장 나은 선택이다”라며 한숨을 쉬었다. 이 씨의 1만1570㎡ 규모 밭에는 사과나무 900그루가 있다. 나무 대부분은 탄저병을 피하지 못했다. 반점이 얼룩덜룩하고 썩어서 진물이 흐르는 사과가 가지마다 매달려 있었다. 사람을 불러 모조리 따려고 했지만, 한 사람당 하루 인건비가 최대 20만 원이라 엄두도 못 냈다고 한다. 이 씨는 “사과에 있는 검은 반점이 블랙홀처럼 일 년 농사를 삼켜 버렸다”면서 “농사에 들어간 비용과 사과 값까지 합쳐 수천만 원 손해를 봤다”며 울상을 지었다.
근처에서 27년째 사과 농사를 해온 김영분 씨(75) 밭도 사정은 비슷했다. 김 씨는 “예년 같으면 18kg짜리 상자 1000개를 땄는데, 올해는 상자 100개가 전부”라며 “추석 대목을 꿈꿨는데 폭삭 무너졌다”고 말했다. 김 씨 농장에서는 최근까지 5kg짜리 사과 상품(上品)을 5만 원에 팔았는데, 이제는 산다는 손님이 와도 내다 팔 멀쩡한 사과가 없어 손님을 돌려보내기도 했다.
올해 탄저병이 창궐하면서 충남 예산군 일대 사과밭이 초토화됐다.
탄저병에 걸려 반점이 퍼지고 중앙부가 검게 변해 썩어버린 사과.
탄저병은 열매 표면에 갈색 작은 반점이 퍼지면서 중앙부가 검게 변해 썩는 병이다. 주로 나뭇가지의 상처 부위나 열매가 달렸던 곳, 잎이 떨어진 부위에 균사 형태로 침입해 겨울을 보낸다. 5월부터 포자를 만들었다가 여름철 비가 오면 빗물을 타고 퍼져 1차 전염 이후 열매에 침입해 발병한다. 고온다습한 조건에서 빠르게 퍼지는 게 특징이다.
올여름 물폭탄 같은 비가 쏟아지면서 탄저병이 유독 심하게 번진 것으로 보인다. 예산군에 따르면 지난해 7월 한 달간 지역 내 총강수량 평균은 130.15mm인데, 올해 같은 기간에는 이보다 4배가 넘는 555.38mm의 비가 퍼부었다. 특히 한 번에 많은 비가 집중돼 내리는 특징 때문에 열매에 물이 몰려 과수가 터지는 열과 피해도 나타났다.
추석을 앞두고 탄저병에 열과 피해까지 겹치면서 차례상에 오를 사과가 귀해져 ‘황금사과’가 됐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낸 ‘농업관측 9월호 과일’ 보고서에 따르면 9월 사과(홍로) 도매 가격은 10kg에 최소 7만 원, 최대 7만4000원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 2만8400원보다 2배 이상 비싸다. 조정옥 예산군농업기술센터 농촌지도사는 “탄저병에 강한 ‘부사’라는 사과 품종까지 피해가 접수돼 상황이 심각하다. 잦은 비 때문에 방제 시기를 놓친 것도 원인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김태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