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스포츠는 "한 방" 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전문적인 이야기를 떠나 그냥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모든 스포츠의 역사는 "한 방" 과 무관할래야 무관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 축구 전문가들이 얘기하는 4-백에서의 일자 라인 형성의 중요성, 미드필드 게임의 중요성, 커버 플레이의 중요성 등 전문적인 축구 지식에 기반하여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야말로 경기의 승패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겁니다.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거스 히딩크 감독이 대한민국 대표팀에 불어넣은 압박 축구의 묘는 월드컵 4강을 가능케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대다수가 기억하는 건 월드컵 사상 첫 승에서의 황선홍의 다이렉트 한 방, 박지성의 믿을 수 없는 볼 컨트롤에 의한 한 방 그리고 안정환의 기적과 같은 이태리 함몰 골든볼 등등입니다.
뭐가 더 중요하고 이런 게 아닙니다. 그저 후자가 저장해두었다가 보다 꺼내기 쉬운 그런 기억들이기 때문입니다.
1992년 NCAA 결승전도 그러합니다. 경기 중 펼쳐진 온갖 이야기들은 다 필요없습니다. 그저 그랜트 힐의 정확한 패스와 크리스쳔 레트너의 믿을 수 없는 "한 방" 으로 모든 게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1998년 NBA 파이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시카고 불스는 유타재즈의 난공불락 Pick&Roll 을 완벽하게 막아냈지만 우리가 쉽게 기억에서 꺼낼 수 있는 부분은 바로 마이클 조던의 "The Final SHOT" 일 겁니다.
어떤 한국 시리즈가 가장 기억에 남으시는지요? "8점 내주면 다음 회에 12점 뽑으면 되지?" 시리즈나 작년 처절했던 수도권 팀들의 대결 등등보다 가장 강렬히 남는 기억은 이승엽과 마해영의 한 방으로 모든 게 설명 가능한 지난 2003년 한국 시리즈일 겁니다. 퀸란의 3점포 한 방으로 한국 시리즈 사상 최초의 "거꾸로 스윕" 에 도전했던 두산은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죠. 이 역시 강렬한 기억입니다.
또 스스로 생각해보자구요. 우리가 기억하는 "재밌었던 스포츠, 재밌었던 시리즈, 재밌었던 경기" 들이 많을 겁니다. 술자리든 밥먹는 자리든 스포츠 얘기가 나왔다 하면 주저함없이 토해낼 수 있는 그런 기억의 단편들이 많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경기들을 지금 눈 앞에 펼쳐보신 후 공통점을 한 번 묶어보세요.
대다수의 경기에는 도저히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한 방의 기억" 이 강렬하게 맺혀있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강력한 "한 방의 기억" 은 그 어떠한 이야기보다 기억되기 쉬울 뿐 아니라 자신이 갖고 있는 기억의 저장 창고 안에서 밖으로 꺼내기 쉬운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미디어는 이런 "한 방의 기억" 을 존중해줍니다. 그 어떠한 부분보다 드라마틱한 이 "한 방의 기억" 을 더욱 세밀하게 묘사하고 더욱 가치적인 부분으로 만들어냅니다.
여러 번 언급했던 얘기지만 예전에 현대 걸리버스의 KBL 경기 리캡을 코리아스포츠닷컴에 제공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해보니까 알겠더라구요.
a. 경기 내내 박터지는 경기, 완벽한 팀 플레이, 완벽한 수비력, 막판 자유투로 왔다갔다 하다가 얼래벌래 A팀의 승리.
b. 경기 내내 다소 루즈, 그러나 막판가서 슬슬 접전, 4쿼터 막판 2분 정도 남기고 몰아넣기 영웅 등장, 결국 B 팀의 승리.
경기를 보는 입장에서는 개인적인 기호에 따르면 a. 가 훨씬 더 즐겁습니다. 하지만 기사를 쓰는 입장에서는 b. 가 훨씬 더 쓰기 편하고 문장 하나하나 만들어내는 흥미가 a. 를 압도하고도 남더라는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A"s D top B" 라는 헤드라인보다는 "Superman got the game" 이라는 헤드라인이 읽는 입장이나 만들어내는 입장에서 볼 때 더욱 흥미롭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정재근 좋아합니다.. 예전에 현대-삼성 간의 욜라 루즈한 경기가 하나 있었는데 4쿼터에 김동광 감독이 강혁을 정재근에게 붙입니다. 그리고 정재근이 미스매치로 강혁을 박살내고 10+ 득점하면서 역전승합니다. 그 날 정재근 영웅 만들어버렸습니다..)
마이클 조던의 신화, 그리고 미디어가 마이클 조던의 신화에 접근하는 그 방법은 다소 과장되었다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많이 지나치지 않느냐란 생각이 들 수도 있으니까요.
잠시 딴 소리를 하자면 마이클 조던은 여러모로 운이 좋았던 사나이입니다. a. 매직 존슨-래리 버드의 라이벌 관계가 없었다면 마이클 조던은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스포츠 스타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농구는 다수의 미국인들이 열광적으로 즐기는 스포츠가 아니었을 테니까요. b. 마이클 조던이 데이빗 스턴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Global Air Jordan" 은 없었을 겁니다. 데이빗 스턴의 해외 시장 팽창 정책은 NBA 가 먹는 파이의 범위를 한도 끝도 없이 벌려놓았습니다. 물론 이를 위해 스턴은 조던을 선봉장으로 내세웠고 조던 역시 이 혜택을 본 겁니다만.
어쨌든 이 것도 다 천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자유칼럼 게시판 - supsup 님의 글 - 폴님의 꼬리말에서도 언급되었다시피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아무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에슐리 커처? 배우 이름 정확하게 모릅니다. 단지 그 선수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카일 코버가 슈퍼스타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다시 미디어 얘기로 돌아가면 미디어가 마이클 조던의 신화를 조작하고 날조했다는 그런 음모론적 발상을 저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조던이 신화를 만들어냄에 있어서 미디어의 역할을 절대적이었지만 이는 미디어가 조작한 것이 아니라 마이클 조던이 미디어를 그렇게 움직일 수 밖에 없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기억하는 농구 스타 가운데, 그리고 모든 스포츠 스타 가운데 마이클 조던만큼 강렬한 "한 방의 기억" 을 끊임없이 만들어냈던 그런 선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신성모독] 이라는 글을 보면 마이클 조던의 대학 1학년 시절 NCAA 파이널에서의 한 방이 제임스 워디의 토니 활약을 묻어버리는 걸 이해할 수 없다라는 식의 언급이 되어 있는데요. 그건 마이클 조던을 재평가하는 과정에서 다소 오바적인 접근이었다라는데 어느 정도 공감을 합니다만 제가 NCAA 토너먼트를 보아온 이후를 생각해보면 조던의 당시 플레이 하나는 그 정도 가치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64강 단판 토너먼트 최종판에서의 게임 위닝샷 한 방만큼 드라마틱한 장면이 그 어떤 스포츠에 존재하겠습니까? 게다가 1학년이요?
또한 그 경기를 NCAA 명장면 중 하나로 만든 데 있어서는 마이클 조던의 대학 이후 활약 역시 굉장히 중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조던은 이후에도 그런 장면들을 수도 없이 연출했습니다. 정말 셀 수도 없죠. 그로 인해 당시 결승전에서의 "한 방" 은 그저 몇 년에 한 번씩 일어나는 NCAA 토니 결승전에서의 결정적인 "한 방" 수준의 평가를 뛰어넘어 "마이클 조던의 유구한 한 방의 역사" 의 시작점으로 평가받게 된 겁니다. 그렇게 되니 당시 장면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게 되구요.
시카고 불스의 90년대 지배에 있어서 스카티 피펜의 존재, 너무나 강력한 수비력, 효율적인 후보들, 잘 짜여진 분업화 등등 여러 가지 중요한 요인이 있겠지만 이들은 마이클 조던이라는 이름에 비하면 초라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미디어는 "불스의 강력한 수비가 승리를 만들어냈다" 라는 것보다 "마이클 조던의 4쿼터 영웅적 활약이 승리를 만들어냈다" 라는 기사를 쓰게 되기를 더욱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던은 미디어가 열광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영웅적 활약들을 수도 없이 온 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니 미디어는 조던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불스의 우승에는 조던만이 존재했다라고 주장하는 일부 팬들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아주기 위해 불스의 수비를 위한 칼럼이 쏟아지고 피펜에 대한 찬사가 쏟아지고 이런 건 당연히 있어야 했던 부분이고 실제로 그러했죠.
요는 미디어의 날조나 조작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만 다소 지나쳐보일 수준의 집중화 현상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미디어가 짜고 치는 고스톱마냥 "나 오늘 1면 조던인데 니들도 1면 하는 게 어때?" 였던 게 아니라 조던이 미디어로 하여금 그렇게 따라올 수 밖에 만든 면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었다라고 생각합니다.
미디어가 사랑하는 조던은 바로 조던이 미디어로 하여금 뿌리칠 수 없게 하는 매력을 끊임없이 분출했기 때문에 존재했던 겁니다. 조던의 "한 방의 역사, 한 방의 기억" 을 거부할 수 있는 그런 간 큰 미디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미디어는 조던을 찬양하고 추대하는 과정에서 조던의 라이벌이나 조던의 동료들, 조던의 후계자들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조던을 찬양할지언정 피펜의 가치를 절대 무시하지는 않았던 것이죠. 치우침 속에서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미디어의 노력과 이를 통해 가능했던 끊임없는 스타 생산의 과정은 결국 지금의 NBA 를 유지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지난 해 우리 프로야구에서 우리 언론들의 이승엽에 대한 접근법에는 다소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이승엽이 가진 뿌리칠 수 없는 매력에 미디어가 절대적으로 열광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그로 인해 심하게 뒤로 쳐져야만 했던 심정수나 김태균을 지금에서야 부각시키는 걸 보고 있노라면 무언가 한 타이밍 놓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첫댓글 더 하고 싶은 말도 없군요. 다 나와 있어서.
Word Up Brotha'...Two Thumbs up...wish I had Three...
한마디로 요약을 하자면 '시너지 효과' 인게죠..
동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