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4월 1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개헌논의 중지와 제5공화국 헌법에 의한 정부이양을 핵심내용으로 하는 4·13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이에 사회 각계 인사들의 비난 성명이 이어지는 가운데, 5월 27일 재야세력과 통일민주당이 연대하여 형성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발족되었다. 이후 국민운동본부는 유월항쟁의 구심체 역할을 담당하였다.
6월 9일 연세대학교 학생들은 6월 10일로 예정된 국민대회에 출정하기 위해 연세인결의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중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공식성명을 통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조작·은폐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국민의 분노는 전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에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는 6월 10일 ‘박종철군 고문살인 조작·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전국적으로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국민대회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 주요 도시에서 약 24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경찰은 6만여 명의 병력을 투입했지만, 전국 각지로 분산된 경찰 방어력은 자신의 커다란 한계를 보여줄 뿐이었다. 게다가 시위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산발적인 야간시위와 철야농성으로 이어지면서, 지속적 투쟁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특히 서울 명동성당 점거농성은 6월 15일까지 계속되었는데, 이는 항쟁의 지속과 전국적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국민운동본부는 산발적 시위투쟁을 다시 결집시키기 위해 6월 18일을 ‘최루탄 추방의 날’로 선포하고 최루탄 추방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날 전국 16개 도시 247곳에서 일제히 시작된 이 대회에는 150여만 명의 민중이 참여하였다. 이날 부산 지역 시위에서 이태춘은 경찰의 다연발 최루탄 난사 직후 얼굴 전체에 최루탄을 뒤집어 쓴 채 고가도로에서 떨어져 숨졌다.
6월 24일 전두환과 김영삼의 여야 영수회담이 결렬되자, 6월 26일 국민운동본부는 ‘국민평화대행진’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이 날의 평화대행진은 사실상 유월항쟁의 절정을 이루게 된다. 전국 34개 도시와 4개 군에서 130여만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경찰의 원천봉쇄 방침에도 불구하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날 경찰은 전국적으로 10만여 명의 경찰병력을 배치했으나 효과적인 진압작전을 벌이지 못하였다.
전국적으로 경찰서 2개소, 파출소 29개소, 민정당 지구당사 4개소 등이 파괴 또는 방화되었으며 3,467명이 연행되었다. 이 날의 평화대행진은 당시 민주화투쟁의 열기를 한군데로 집약시킨 결과물이었고, 결국 전두환 정권은 직선제 개헌과 제반 민주화조치 시행을 약속하는「6·29선언」을 발표하게 되었다.
6.10민주항쟁은 전두환 정권 출범 이후 점증된 민주화 열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제5공화국의 실질적 종말을 가져왔다. 그러나 유월항쟁에 참여한 다양한 저항 주체들은 대통령 직선제라는 요구 관철 이후 이해관계에 따라 급속히 해체되는 양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6.10민주항쟁의 부분적 성공은 한국현대사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절차적 민주주의의 달성은 1980년대 후반 사회 각 부문 운동이 분화되고 조직화되는 계기가 되어, 19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과 농민집회,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형성의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