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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아름다워(723) - 100세에 우리 곁을 떠나신 어머니
초복이 내일, 엊그제 복지관의 봉사자들이 마련한 삼계탕으로 복달임을 하였다. 유럽과 알래스카 등 곳곳에 유례없는 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데 전국에 걸친 장마전선의 영향으로 어제오늘 한결 시원한 날씨다. 집앞의 들판은 무럭무럭 자라는 작물들로 싱그러움을 더해주고. 모두들 건강한 여름철 보내시라.
지난주 금년으로 100세에 이르신 어머니께서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 며칠간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장례를 치르느라 긴박하게 보냈다. 누구나 겪게 되는 엄숙한 시간, 불혹(40세)에 아버지의 임종을 맞았던 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체험이다.
1920년생인 어머니는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4남매를 슬하에 둔 아버지의 후처로 우리 가문과 인연을 맺으셨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여섯 살 아래의 큰아들과 열 살 아래의 큰딸 등 4남매와 슬하의 8남매를 낳고 기르신 어머니의 일생은 우리 모두가 겪은 근현대사의 굴곡과 시련, 성장과 번영을 온몸으로 받아낸 파란만장의 한 세기다. 앳된 새각시는 시부모와 일찍 청상이 된 양모, 머리가 굵은 시동생과 시누이 등 층층시하의 시집살이를 잘 견디시고 서울에 살다가 맞은 6∙25전쟁으로 많은 가솔을 이끌고 고향으로 내려간 피란길, 1950~60년대의 가난한 농촌생활, 열명이 넘는 자녀들 뒷바라지 하느라 집과 전답마저 털고 이곳저곳 떠돈 유랑생활 등 고단한 삶을 잘 이기시고 200명이 넘는 가문의 큰 어른으로 중심을 잡으시며 80세가 넘어서까지 손수 살림을 주관하면서 수많은 손자, 손녀들을 거두시기도 하였다.
2002 월드컵으로 전국이 들썩이던 해, 83세가 되신 어머니를 광주로 모셨다. 초기의 광주생활 5년 여, 더러 서울의 자녀들을 보러 상경하기도 하면서 한곳에 있는 교회와 요양원을 드나들며 정정하게 지내셨는데 80대 후반에 이르니 기력이 쇠하시고 정신도 혼미해지셔 우리 가족이 10년 넘게 봉사하던 요양원으로 옮기셨다. 요양원생활 5년여, 92세 때 폐와 장의 기능이 약해져 입원과 퇴원을 여러 차례 겪으며 위중한 상황을 맞았다. 그해를 넘기기 어렵다고 판단한 자녀들은 어머니를 향한 사랑과 감사의 뜻을 담은 글을 써서 그해 12월 어머니를 기리는 문집(제목은 크신 사랑 받으소서)을 만들었다.
2012년에 만든 어머니 관련 문집의 표지사진, 30년 전에 모인 가문의 단란한 모습이다
그 덕분인가 어머니는 기력을 되찾으시고 회생하셨다. 93세가 되신 다음 해, 서울 근교에 요양원을 차린 사촌 동생의 주선으로 거처를 경기도 군포시 산본으로 옮겼다. 그로부터 7년, 요양원 직원들의 정성어린 보살핌으로 친가와 시가를 통틀어 유례가 없는 100세에 이르셨다. 지난봄 가문의 성묘행사 때는 이를 기려 할아버지 70주기, 어머니 100세를 기리며 가문의 이름으로 두 번 째 문집을 펴냈다.
치매증세와 쇠약하긴 하지만 그런대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신 어머니는 한 달 전부터 식사를 잘 못하시며 점점 기력이 떨어지셨다. 열흘 후면 어머니의 100세 생일, 그때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일 것을 기약하였는데 보름을 남겨두고 식음을 전폐하시더니 이틀 만에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셨다. 마침 외국에 거주하는 손자와 손녀가 휴가를 맞아 귀국한 터, 그들이 할머니를 찾아 온 후에 하늘 여행 떠나실 예정이셨을까. 며칠 전까지 자녀들은 순차로 어머니를 찾아뵈었고 막바지에 찾은 나는 어머니 곁에 머물며 임종에 이르는 과정을 누님과 함께 지켜볼 수 있었다. 은혜롭게 장례를 치른 후 어머니의 마지막 상황과 장례과정을 적은 기록을 가족카페에 올렸다. 타산지석이 될 수도 있을 터, 다소 길지만 이를 요약하여 덧붙이니 참고하시라.
어머니, 하늘의 위로와 평안을 누리소서
지난 토요일(2019년 7월 6일), 어머니께서 우리 곁을 떠나셨다. 1920년에 태어나셔서 금년으로 100세가 되신 우리 어머니, 한 세기에 걸친 간고의 세월을 온몸으로 견디시고 평안한 모습으로 하늘 문에 들어서신 어머니, 하늘의 위로와 평안을 누리소서.
어머니의 마지막 가시는 과정을 간추려 정리한다.
1. 첫째 날, 이렇게 떠나시다.
한 달 전부터 식사를 잘 못하시고 기력이 점점 쇠하시더니 막바지에 곡기를 끊으시고 물도 마시지 않으신지 이틀 만에 편안한 모습으로 먼 길 떠나셨다. 이때를 기다리셨을까, 세네갈과 프랑스에 살고 있는 손자와 손녀가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이용하여 찾아 뵐 때까지.
지난 월요일(7월 1일)에는 세네갈에서 돌아온 손자가 할머니를 찾았고 화요일에는 막내아들이 들러 오랜만에 어머니께서 식사를 하셨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하였다. 목요일 낮에 파리에서 들어온 손녀가 할머니 곁에 다정하게 앉은 모습을 요양원의 사무국장이 스마트폰에 담아 전송하여 주었다. 그날 오후에는 형님이 방문하여 여러 시간 머물고. 손녀가 돌아간 후 깊은 잠에 들어간 어머니의 용태가 예사롭지 않은 것을 본 형님은 마지막이 가까운 것을 직감하고 고향 가까운 광주의 사촌 동생과 만약의 상황에 대비한 묘지 조성을 의논하였다.
금요일에 나는 급히 어머니 곁으로 달려갔다. 전날 손녀가 다녀간 이후 유동식 투입을 거부한다는 직원들의 말, 마른 입술을 적시러 물을 몇 차례 대드려도 입을 열지 않으신다. 저녁 7시경, 막내여동생이 도착하여 어머니 곁에서 머물고자 하였으나 감기 기운이 있어 나 혼자 있기로 결정, 요양보호사들이 수시로 어머니 방을 드나들면서 상태를 체크하는 동안 회의실로 사용하는 방에서 밤을 보냈다. 아침 일찍 도착한 누님과 함께 찬송과 기도를 드린 후 자주 심방하시는 누님 네 교회 목사님께 연락, 예배를 부탁하였다.
오전 8시경 목사와 부목사가 내원, 그분들도 막바지에 이른 것을 직감하고 이에 적합한 찬송과 말씀으로 천국 문에 들어서기를 간구한다. 11시쯤 경험이 많은 복지사가 어머니 발에 청색증(임종이 가까울 때 나타나는 증세인 듯)이 보인다며 걱정스런 표정이다. 누님과 함께 어머니 손을 붙잡고 계속 찬송을 부르며 ‘어머니, 저희가 곁에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편안히 가십시오.’라고 말하니 갑작스럽게 눈을 크게 떠서 한 동안 바라보시다가 눈을 감으신다. 복지사는 ‘편안히 가십시오’ 하는 순간에 운명하였다고 말하는데 아직 내 손에는 맥박이 잡히는 느낌, ‘아, 그렇게 가시는구나.’를 체득하는 엄숙한 순간이었다.
곧바로 인근에 있는 원광대학교 부속병원 장례식장에 안치하는 등 후속조치에 임하였다. 빈소를 정하고 정신을 가다듬으니 문상객을 맞을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곧바로 조화가 답지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등 빈소가 부산하게 움직인다. 바쁜 틈을 내어 8년 전 어머니께서 위중하실 때 만든 어머니 관련 문집에서 몇 쪽을 발췌하여 문상객들에게 나눠줄 자료를 만들어 비치하기도.
우리 가문은 200명이 넘는 대가족, 저녁시간이 되니 가족들로 북적이고 문상객들로 빈소가 붐비더니 밤 10시가 되자 조용해진다. 가족들도 처소로 돌아가고 막내 동생과 둘이서 빈소를 지켰다.
간소하게 꾸민 빈소
2. 둘째 날, 문상객들로 붐비다
다음날(7월 6일, 일요일) 오전 8시 반, 가족들과 예배를 드렸다. 예배의 주제는 ‘편히 쉬리라’, 8년 전 어머니가 위중하실 때 10여 차례에 걸쳐 1992년의 유럽연수여행 중 어머니에게 쓴 편지글을 읽어드리며 부른 찬송과 살핀 말씀에서 따온 것이다. 이제 편히 쉬기를 소망하는 자녀들의 기원을 담아.
이른 시간에 전날까지 어머니를 돌보던 요양원 직원들이 퇴근길에 들러 문상을 한다. 흐느끼며 오열하는 직원들의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지성으로 어머니를 보살핀 진정을 되새기며 ‘여러분, 너무나 수고하셨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11시 경부터 문상객이 밀려든다. 계속하여 손님을 맞느라 식사할 겨를 없이 오후 3시의 입관시간에 이른다. 젊어서의 아름답고 단아한 모습 사라진 차가운 얼굴을 쓰다듬고 메마른 젖무덤도 어루만지며 마지막 고별의 순간을 마음에 담았다. 수의는 어머니가 손수 만드신 것, 오래되어 약간 퇴색되었지만 그 옷을 입고 싶다는 유지를 따랐다. 입관을 주관한 직원의 말, 지금까지 많은 시신을 다루었지만 이처럼 깨끗한 경우가 드물다며 보살핀 이들의 정성이 대단하다는 설명이다. 일반인은 모르는 일, 전문가의 평가에 귀 기울이며 그렇게 잘 모신 이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오후 들어 문상객과 여러 교회의 성도들이 한꺼번에 몰린다. 멀리 광주에서도 여러 분이 올라오고. 여동생과 누님네 교회에서는 빈소에 모여 각기 예배를 드리기도. 어머니는 80세가 넘어 누님이 출석하는 교회에서 세례를 받으셨다. 그 교회의 예배 주제는 어머니의 기도,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라는 말씀으로 어머니의 100년 삶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내가 준비한 자료를 함께 살피고 어머니에 대한 소개 말씀을 부탁한다. 이에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자식 넷을 거느린 아버지에게 시집온 사연, 전실 자녀를 친자식 못지않게 잘 기르신 부덕, 전쟁과 가난의 질곡을 겪으며 11남매를 거두신 인고의 세월을 성공적으로 감내하신데 대하여 가족들이 공로패에 담아 헌상한 글귀 등을 소개하며 하늘의 상이 있기를 공중 앞에서 염원하였다.
저녁식사 때까지 문상객이 줄을 잇다가 밤이 되니 전날처럼 조용해진다. 그런 중에 뒤늦게 소식 듣고 늦은 발걸음을 한 분도 있으시다. 멀리 출타한 친구 부부는 모두가 쉬는 시간에 들러 미처 인사를 나누지 못하였다. 친구여, 미안하이.
오랜 친분의 목사가 전해온 장례식장 스케지, 둘째날의 모습이다
3. 셋째 날, 영원한 안식처로 향하다
사흘째(7월 8일), 발인준비로 바쁘다. 오전 6시 반, 첫날부터 기도와 예배를 인도한 목사의 집례로 발인예식을 치렀다. 주제는 어머니의 잠,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심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는 말씀으로 위로한다.
오전 7시, 장례식장을 출발하여 고향의 선영으로 향하였다. 버스기사는 신통하게도 고향 인근 마을 출신이어서 선영으로 가는 길목을 환하게 알고 있다. 마치 하늘 문에 들어서는 안내자의 예표처럼. 출근길이라 잠시 밀리던 버스가 수도권을 벗어나자 막힘없이 잘 달린다. 20여 명의 가족들이 동승한 단출한 일행, 8년 전 위중하실 때 어머님께 올린 자녀들의 편지글을 하나씩 읽으며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과 고결한 삶에 마지막 경의를 표하였다. 읽는 동안 간간이 목이 메고 목소리가 떨리기도 하였지만 다른 이들이 쉽게 할 수 없는 귀한 기회라 여기며.
순조롭게 달린 버스는 오전 11시 경 고향마을에 도착하였다. ‘어머니, 우리가 살던 옛집에 돌아왔어요.’ 영정을 들고 방과 대청을 돌아 나오는 순간, 하늘 높이 나는 비행기의 은은한 여운이 먼 길 돌아 찾아온 옛집에 이른 어머니의 행로를 반긴다.
연꽃 활짝 핀 저수지 지나 선영에 도착하니 11시 반, 사촌 동생과 묘소관리인 등의 주도로 이미 준비 작업을 끝낸 묘역을 최종 마무리하고 어머니의 육신을 유택에 모셨다. 선영이 명소인 것은 익히 알거니와 붉은 색깔의 황토가 너무나 보드랍고 푸근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랑하는 어머니, 낙원처럼 아늑한 선영에서 편안히 쉬소서.
12시에 하관예배, 주제는 ‘크신 팔에 안기세’, 8년 전 어머니의 편지를 읽어드리며 마지막으로 기도한 내용을 살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는 말씀으로 이 땅의 모든 수고와 근심 내려놓으시고 하늘 문에 들어가기를 염원하였다. 하나님이여, 저희들의 간절한 소망에 귀 기울이소서.
하관예식을 끝낸 후 인근의 식당으로 향하였다. 고향의 특산인 젓갈과 싱싱한 생선찌개가 밥맛을 돋우는 점심이 깔끔하다. 식사 후 다시 묘역 행, 깨끗이 뒷마무리한 묘역을 둘러보고 오후 2시 경 귀로에 올랐다.
3일 동안 긴박하게 치른 모든 일정이 무사히 마무리되어 감사하다. 한마음으로 참여한 가족 모두 수고가 많으셨고 물심양면으로 위로와 후의를 베푸신 지인, 친지, 교우 분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의 뜻을 표한다. 하늘이시여, 우리 모두를 축복하소서.
영원한 처소에 이르신 어머니, 온갖 시름 거두시고 편히 쉬소서
* 어머니는 언행에 법도와 지혜가 있으셨다. 어떤 상황에서 한 말씀 하실 때 촌철살인의 예지를 발휘하시기도. 30여년 전 고향을 찾을 때 교통단속에 걸린 적이 있다. 그때 어머니가 하신 말씀, '뱀과 경찰은 난데 없이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이니라' 이를 소재로 내가 봉직하던 대학의 신문에 '사람을 놀라게 하는 뱀과 경찰'이라는 칼럼을 쓰기도 하였다. 3년 전 여동생이 어머니를 찾았을 때 맑은 정신이 드셨는지 또렷한 육성으로 어머니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셨다. 무거운 짐 내려놓으시고 편히 쉴 곳 찾은 어머니를 기리며 이를 올린다.
기적처럼 말씀하신 어머니의 육성
(2016년 10월 30일, 여동생이 채록한 것을 지난봄에 펴낸 가족문집에 수록)
이만하면 잘 먹고 잘 놀고 잘 살고 좋다!
이제 그만 자자. 나도 자고 너희도 자자!
딸들이나 며느리들이 너무 잘해 줘서 좋다.
아들들은 아들대로 잘 해서 재미있게 잘 먹고 간다.
한 가지도 섭섭한 것 없이 매사에 원만하다.
나 갔다고 서운해 하지 말고 잘들 살아라.
너희도 내가 그렇게 가서 편안하고 좋아해라.
한 가지도 섭섭한 것 없다.
먹기도 잘하고 입기도 잘했으니 얼마나 좋겠냐?
마지막 가는 길이 만족하니 좋다.
한 구석도 섭섭한 마음 없으니 좋다.
젊어서는 어쩔 수 없이 힘들었어도
늙어서는 섭섭지 않게 살아서 좋다.
마음 놓고 갈란다.
첫댓글 참으로 행복한 어르신이십니다.
생전모습도 고우시더니 뒷모습은 더욱 아름다우셨네요.
부디 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