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일야 방성대곡>을 쓴 뛰어난 언론인이다.
張志淵 : 1864 ~ 1921.
자는 순소. 호는 위암, 숭양산인.
장지연은 1864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장용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지연은 1894년(고종31)에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1895년(고종32)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시해되자 장지연은 의병을 일으킬 것을 호소하는 글을 각 지역에 보냈다. 이에 곳곳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다. 이듬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자, 장지연은 고종이 궁궐로 돌아올 것을 요청하는 상소문인 만인소의 초안을 썼다.
독립 협회에 들어가 활동하던 장지연은 1898년에 새로 창간된 <황성신문>의 기자가 되었다. 같은 해 이상재, 이승만, 남궁억 등과 만민 공동회를 열어 애국 계몽 운동을 벌이는 한편, 정부의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였다. 이어 1901년 <황성신문>의 사장이 된 장지연은 민중 계몽과 독립 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05년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맺어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자,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이 날을 목 놓아 통곡하노라)>이라는 논설을 썼다. 이 논설에서 장지연은 일본이 우리 나라 권리를 빼앗은 사실을 폭로하고, 우리 나라를 일본에 넘겨 준 을사오적을 규탄하였으며, 우리의 주권을 되찾기 위하여 온 국민이 일어설 것을 호소하였다. 그 논설로 서울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 일로 장지연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65일간 옥살이를 했으며, <황성신문>은 발간이 중지되었다.
장지연은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06년 윤효정, 나수연 등과 더불어 민중 계몽 단체인 '헌정 연구회'를 바탕으로 하여 '대한 자강회'를 만들었다. 1907년 일본이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로 물러나게 하자 장지연은 대한 자강회를 중심으로 격렬하게 반대 시위를 펼쳤다. 이 일로 대한 자강회가 해산당하자 권동진, 남궁억 등과 '대한 협회'를 만들어 활동을 계속하였다.
일본의 탄압이 거세지자 장지연은 1908년 일본의 탄압을 피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해조신문>의 주필(논설위원)이 되었다. 경영난으로 신문사가 문을 닫자 장지연은 상하이, 난징 등지를 거쳐 귀국하여 1909년 진주 <경남일보>의 주필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한일 합방이 되었고, 장지연은 한일 합방으로 울분을 참지 못해 자결한 황현의 시를 <경남일보>에 실어 일본의 침략을 규탄했다. 이 일로 인해 <경남일보>는 폐간되었다. 그 뒤 장지연은 고향에 내려가 나라를 잃은 울분 속에 지내다 1921년 마산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장지연
저번에 이토 후작이 한국에 왔을 때,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순진하게도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에 동양 3국이 정족하는 안녕을 주선한다고 자처하던 사람이었으니 오늘날 그가 한국에 온 것은 반드시 우리 나라의 독립을 굳게 부식하자고 할 방법을 권고하리라."
고 하여 시골에서부터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이나 상하가 환영하여 마지 아니하였는데, 천하의 일에는 헤아리기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뜻밖에도 5조약은 어디에서부터 나왓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 뿐아니라 실상 동양 3국이 분열할 조짐을 빚어 낼 것이니, 이토 후작이 본래부터 주장했던 뜻은 어디에 있었던가.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강경하신 성의가 거절하여 마지 아니하였으니 이 조약이 성립되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컨대 이토 후작 스스로 알고 스스로 간파하였을 것이어늘.
아! 저 개돼지만도 못한 이른바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이 영달과 이득을 바라고, 거짓된 위협에 겁을 먹고서 머뭇거리고 벌벌 떨면서 달갑게 나라를 파는 도적이 되어, 사천년을 이어 온 강토와 오백년의 종묘와 사직을 남에게 바치고, 이천만 쇼??령으로 하여금 모두 다른 사람의 노예 노릇을 하게 하였으니, 저들 개돼지만도 못한 외부대신 박제순 및 간부 대신들은 족히 깊게 나무랄 것도 없거디와, 명색이 참정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우두머리인데도 다만 부자로써만 책임을 막고서 이른을 유지하는 밑천이나 꾀하였던가. 김청음(김상헌)이 국서를 찢고 통곡하던 일도 하지 못했고, 정동계(정은)가 칼로 할복하던 일도 못하고서 그저 편안히 살아 남아서 세상에 나서도 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상 폐하를 다시 대할 것이며, 무슨 면목으로 이천만 동포를 다시 대하리오,
아! 원동하고도 분하도다. 우리 이천만이 남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과 기자 아래의 사천년의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잉데 별안간 멸망하고 끝났도다. 아! 원통하고 원통하도다. 동포여! 동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