꼽추가 등을 펴고
김 아무개 딸의 불치병- 돼지 간질(猪癎)이 씻은 듯 완쾌되었다는 소문은 같은 병을 앓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사방으로 펴져 나갔다.
'병은 자랑하라'고 했다지만 간질이나 나병 등 소위 천질(天疾)이라 불리 우는 병을 앓는
당사자와 가족들은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으로만 고민하게 마련이다. 병자와 그 가족들의
심적 고통이란 이루 형언키 어려울 정도이지만 더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 누구와도 털어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충청도내 어느 지역은 '×× 지랄'이라는 성어(成語)가 나올 정도로 지랄병, 다시 말해 간
질환자가 많았다. 또 경상남도 내 어느 지역은 '××치질'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치질 환
자가 특히 많았다.
병도 병 나름이라 서로 쉬쉬하며 지냈던 서울의 한 복판에서 만나 서로의 '말못할' 비밀이
공공연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그러나 어쨌든 이들은 희망이 있기에 조금은 마음이 편했고
남부끄럽다는 생각도 덜 드는 것이었다.
2층 건물이 자리한 넓직한 마당에는 경향 각지에서 모여든 병자와 병자 가족들로 연일 만
원을 이뤘다.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하는 사람, 홀로 땅만 내려보고 있는 사람, 고통에 절
여져 일그러진 얼굴로 한숨만 몰아쉬는 사람 등 각양각색이다.
한 가지 공통점은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얼굴에 거무튀튀하고 음산한 죽음의 빛이 드리워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숨이 멈추는 그 날까지 지니고 살아갈 한 가닥 실 날 같은 재생(再
生)의 희망을 버리지 못해 언제나 성지(聖地)를 순례하는 구도자처럼 '용타는' 사람을 찾아
각지로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어디선가 소문을 듣고 이곳에 찾아온 것이었다.
주교동 운룡의 주처(住處)는 이렇게 죽음의 공포에 짓눌려 사는 기구한 삶의 마지막 순례
지가 되어 많은 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 지랄' 환자들은 비록 서울에서 치료를 받는 기간 동안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각별하게 지냈으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즉시 땅 팔고 집 팔아 가지곤 각자 어디론가 다른 지
역으로 떠났다고 전한다. 병이 나았다고는 하지만 '지랄병'을 앓았었다는 낙인이 찍혀 그런
줄 아는 사람들끼리는 혼인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떠나면서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운룡의 주처를 알려주곤 하여 그 지역
지랄병 환자들은 대부분 상경하여 치료를 받고 돌아갔다.
'×× 치질'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 숨기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세상에 비밀이란 있을 수 없는 법이어서 대충 인지하고 있는 터이다.
그런데 그렇게 남들이 인지하건 말건 숨기고 부인하던 병도 일단 자기가 고치고 나면 치
병의 길을 알려주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 동병상련(同病相憐)하는 병객들의 의리다.
곱사등이 처녀 인순이 운룡을 찾은 것은 이 무렵이었다. 인순은 병객들 틈에서 자신의 차
례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불치병의 치료방을 알려주는 인물에 대한 구구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혹자는 그가 묘향산에서 20년 수도 끝에 도통(道通)을 한 도사라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그가 도사가 아니라 살아 있는 부처님임에 틀림없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였다.
혹자는 또 그가 대선비[大儒]로서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지을룡(池乙龍)선생이라고 말하기
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선비이든 도사이든 아니면 산 부처님이든 신비의 의술로 많은 불치
병 환자들을 구제하였다는 사실만은 다같이 인정하는 바였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다만
의술을 베푸는 보통의사가 아니라 하늘이 보낸 의사(天醫)이거나 아니면 신선세계의 신인
(神人)이 인간을 병고(病苦)로부터 구제하기 위하여 잠시 사람으로 화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고 제각기 추측하였다.
의사는 의사로되 천의(天醫)이거나 신의(神醫)요, 사람은 사람이로되 생불(生佛)이거나 신
인(神人)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인 것이었다.
인순은 갑자기 아득한 구름 저편 세계의 신화(神話)의 고향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
도로 어리둥절하였다. 그리고 불현듯 묘향산의 백발노인이 자신의 등을 어루만져 펴게 하였
던 꿈속의 광경의 떠올랐다. 정말 저 분이 어떤 분이며 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꿈에 본 것처럼 그렇게 백발을 흩날리는 노인일까, 아니면 절에서 본 자비로운 모습의 부
처님을 닮은 모습일까. 참으로 궁금하였다. 또는 만에 하나라도 '병 고칩네' 하고 소문을 퍼
뜨려 환자들로부터 돈이나 받아 챙겨 가지고 달아나는 사이비 의사는 아닐는지 온갖 생각이
교차되었다.
"뭘하고 있어? 인순이 차례가 됐는데 어여 들어가봐"하는 철이 엄마의 재촉에 인순은 잠
시 생각을 멈추고 몇몇 환자들이 나오는 방안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아-. 인순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방안에 들어서는 자신을 힐끗 쳐다보는 상대
방의 눈동자에서 눈부신 섬광이 비치어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기 때문이다. 백발의 노인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분명히 꿈에 본 노인의 얼굴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였고 게다가 이루 형
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엄이 서려 있었다.
법당에서 예배하듯 인순은 정중하게 절을 드린 뒤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슨 말
을 어떻게 하여야 할지 몰라 망설이느라 일순간 방안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꼭 등을 펴고 싶나?"
인순은 더 없이 자비로워 보이면서도 위엄을 갖춘 운룡의 따듯한 말에 왈칵 설움이 복받
쳐 자기도 모르는 새에 줄줄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만감이 교차되면서 급기야는 걷잡을
수 없는 흐느낌으로 변하였다.
"하루를 살아도 등을 펴고 남들처럼 떳떳하게 살고 싶지? 결심하고 치료하면 되는 거야.
힘은 들지만 노력해서 안 되는 것은 없어. 내 가르쳐준 대로 해볼 건가?"
"선생님, 방법만 있다면 저는 하다가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하라 시는 대로 따르겠사
오니 꼭, 꼭 이 병신을 면토록 해주십시오. 저의 평생의 한이며 또 소원입니다."
"원리를 설명하자면 한없이 긴 이야기가 필요하니 되는 방법만 일러주는 것이야. 원리를
몰라도 등이 펴지기만 하면 되겠지?"
운룡은 인순을 눕도록 하고 웃옷을 위로 치켜올리고 아래옷을 밑으로 내리게 하여 손가락
을 자로 삼아 위치를 측량하더니 배꼽 위쪽과 바로 밑 부위에 붓으로 먹을 찍어 점을 표하
였다. 그리고 위쪽에 쌀알 크기 만한 뜸쑥을 올려놓고 이어 배꼽 밑쪽에도 뜸쑥을 올린 다
음 성냥을 그어 위쪽부터 불을 붙이고 아래에도 붙였다.
배꼽 위쪽 4횡지(橫指)의 지점을 한의학에서는 중완혈(中脘血)이라 하고 배꼽 밑 3횡지
지점을 관원혈(關元穴=丹田)이라 부른다.
운룡은 불치병의 치료에 있어서 약을 쓸 만한 경제적 여건을 갖춘 사람들에게는 더러 약
처방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중완과 관원에 쑥뜸을 뜨는 것을 제1의 처방으로 삼고 있
다.
쑥뜸은 어떤 약보다도 효과가 확실할 뿐 아니라 비용도 거의 들지 않는다 할 정도로 소액
이고 순전히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자기의 질병을 고친다는 자유롭고 지혜로운 최상의 자가
요법이기 때문이다.
이 지구상에 수많은 명의(名醫)가 왔다 갔어도 그들이 남긴 의료방은 그들이 떠난 뒤에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효용성이 떨어지거나 심지어 사장(死藏)되어버리는 예가 허다하다.
또 불세출의 몇몇 성자(聖者)들이 불구를 고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오지만 그것은 그이의
개인적 영능(靈能)의 힘일 뿐, 후세 사람들이 의지하여 고칠 수 있는 방법은 전하여지지 않
는다.
불구를 고치고 도 불치병을 고치겠다는 병고 극복의 의지가 아무리 강렬하다 하여도 자연
의 원리에 따른 지혜로운 방법을 모르면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다.
그 사람이 떠나면 방법도 빛을 잃는 그러한 의료방을 만고불변의 의약적 지혜라고 볼 수
있을 것인가. 유사(有史)이래 축적된 경험적 의약의 지식이 온갖 동서양의 의서(醫書)를 화
려하게 장식하고 있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이미 생명력을 잃은 '죽은 지식'일 뿐 산 지혜가
아님을 세상 사람들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운룡은 지구촌 가족의 건강과 장수와 진정한 성도(成道)를 위해서는 지상의 모든 의서부
터 소각해야 한다는 변함 없는 지론을 갖고 있다. 불구 같은 경우야 별반 관계가 없으나 다
른 제 질병의 경우 지극히 쉽고도 간단한 치료방법들이 얼마든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발달된 의료술'의 무지한 방법에 의하여 병든 부위를 제거하는 등의 치료를 통해 결국 병자
를 생으로 죽이고 마는 비극을 초래하는 것이다.
간단한 예로 독사에 물려 죽어갈 때도 그 부위에 쑥뜸을 하게 되면 어떤 방법 또는 약을
쓰는 것보다 훌륭하게 치료가 되건만 대개 이리 뛰고 저리 찾고 하다가 환자를 죽게 만든
다. 극약을 먹었을 때도 중완혈에 한 장이 15분 타는 숙뜸 9장만 떠 주면 틀림없이 살아나
는데도(운룡은 실제로 여러 번의 치료경험을 갖고 있다) 대부분 발달되었다는 의료술의 무
지(無知)로 인해 얼마든지 살릴 수 있는 생명을 죽게 하고야 마는 것이다
독사에 물려 죽어갈 때는 동해산 마른 명태(보통 黃太라 부름) 5마리를 푹 삶아 그 국물
을 먹게 하여도 죽는 법이 없으나 좀 배웠다는 의사·한의사·약사들조차 실험해 볼 생각을
않고 '민간요법을 쓴다고 시간을 끌면 더 위험한 사태를 초래한다'며 옅은 의료지식의 고집
을 보이기 일쑤다.
요즘에는 독사가 드물어 독사에 물리는 일이 적어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갔던 것이다. 마른 명태국이나 쑥뜸은 비단 독사독만이 아니라 연
탄가스 중독과 기타 화공약독에 의한 중독 증세에도 탁효가 있는 신약(神藥) 신방(神方)이
지만 세상 사람들은 고독한 지자(智者)의 지혜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운룡은 불구와 불치병 병객들에게는 반드시 손수 병객의 이름을 적고 그 밑에 처방을 쓰
거나 또는 뜸을 떠야 할 경우 직접 뜸자리를 잡아준다.
인순의 배 위에서 타고 있는 뜸장은 첫 장의 쌀알 크기에서 다섯 장 째부터 토종 밤톨만
한 크기로 눈에 띄게 커졌다. 중완과 관원에 각각 아홉 장을 떠준 다음 운룡은 붓으로 배
위에 뜸 재를 쓸어내고 나서 인순을 일어나라고 하였다.
"이같은 방법으로 한 장 타는 시간이 5분 넘는 쑥뜸을 계속하되 해마다 봄·가을로 뜨도
록 하라. 5년 안에 반드시 등이 펴지게 마련이니 고통이 따르더라도 중단하지 말고 돼지
고기 닭고기 술 성관계 등을 뜸뜨는 동안 반드시 금기하도록 하가. 자, 뜸쑥은 한약 건재
상에서 강화약쑥으로 구하여 쓰면 된다. 어서 돌아가 가르쳐 준대로 열심히 해야 한다."
뒷날 인순은 봄·가을 거르지 않고 초인적 인내심으로 쑥뜸의 뜨거운 고통을 감내하며 뜬
결과 3년 만에 완전히 등뼈가 바로 펴졌다. 그 후 2년 간 뜸을 더 뜬 뒤 인순의 몸은 정상
인이 되었고 혈색은 정상인 보다 훨씬 더 고운 도화(桃花) 빛깔의 아름다운 처녀가 되었다.
66년 가을 무렵, 인순은 사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서울 충무로 5가에서 한의원을 경영하고
있는 운룡을 찾아와 곧 결혼하여 외국으로 떠날 예정이라며 앞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
르겠지만 평생 가슴속에 아버님으로 모시고 감사 드리며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운룡은 인순의 곱사등을 펴기 위해 뜸자리를 잡아주는 시기를 전후하여 즉 61년 무렵부터
서울 장안에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불치병자·불구자의 한(恨)을 풀어주었다.
이 무렵 운룡이 의주에 살 때 알고 지내던 보통학교 교장을 지낸 대구 김씨의 며느리가
찾아와 불구를 고친 일이 있다. 이미 시집가서 미리라는 아이를 두고 있었으므로 미리엄마
라 불리웠는데 앉은뱅이였다.
30이 넘은 미리엄마는 시집오기 전부터 척수염을 앓고 있었는데 결혼하여 아기를 낳은 이
후 급작스레 악화되어 허리가 굽어지고 다리를 못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녀 역시 절망을
딛고 관원과 양쪽 족삼리(足三里) 혈에 쑥뜸을 뜨기 시작, 60일이 지나면서부터 허리가 펴지
기 시작하더니 1백 일도 안돼 자신의 힘으로 일어설 정도가 되었다. 그 뒤 3년 만에 그녀는
아무도 그녀의 몸이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을 정도로 고쳐졌다.
운룡은 신축년(61년) 여름이 지나 의주군 피현면 출신인 박 장로와 종로 5가에서 시중(施
衆)한의원을 동업(同業)하였다. 연배가 비슷하였고 주교동 김 아무개와도 친한 사이였으므로
양옥집 하나를 빌어 한의원을 시작한 것이다.
삼가 여백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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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상담실
신의 이야기 (34) 꼽추가 등을 펴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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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21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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