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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3월 5일
영국 로슬린연구소 돼지 복제 성공
복제된 돼지들.
복제돼지가 2000년 3월 5일 세계 최초
로 영국에서 탄생했다. 복제양 돌리를 만
들었던 영국의 로슬린연구소 소속인 PPL
세러퓨틱스사는 3월 14일 다섯 마리의
복제 암컷 돼지를 만들었다고 공식 발표
했다. 복제돼지는 돌리와 비슷한 방법인
핵이식을 통한 체세포 복제방식으로
탄생했다.
▶2015년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 피습 당해
서울특별시에서 문화운동단체 우리마당 대표 김 기종에게 강연도중 습격을 당해 얼굴과 팔에 상처를 입었다.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뒤 3월 10일 퇴원했다.
▶2010년프랑스 여성 전쟁 영웅, 앙드레 필 사망
▶2010년‘조선일보 창간호’ 3·4·13·14면(面) 입수
1920년 3월 5일 발행된 조선일보 창간호가
조선일보사 창간 90주년을 맞아 입수해 공개 되었다.
1920년 3월 5일 발행된 조선일보 창간호가 조선일보사 창간 90주년을 맞아 입수해 공개 되었다. 발견된 지면은 창간호 제3·4면 3장, 제13·14면 3장 등 모두 6장 12쪽으로, 미술사가 황정수씨가 소장하고 있다가 최근 근·현대사 자료전문가 김영준씨가 입수해 공개했다.
이번에 발견된 창간호는 한국 언론 역사의 공백을 메워줄 귀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번 발견을 통해 조선일보 창간호가 16면으로 그 판형(版型)도 오늘의 신문과 같은 배대판(倍大版)이라는 그간의 정설이 확인되었다. 또한 일왕의 연호를 뒤집어 인쇄한 ‘의문의 오식(誤植)’ 을 통해 당시 조선일보 관계자 중 누군가가 일제에 대한 반감을 표시하기 위해 일부러 글자를 뒤집은 것이라는 추정에 힘이 실리게 됐다.
이번 일제하에서 최초로 창간된 우리나라 민간신문인 조선일보 창간호 일부 발견을 통해 조선일보 역사뿐 아니라 한국 언론사의 복원을 위해 의미가 큰 일이라는 평가이다.
▶2007년법무부 검사장급 이상 검찰
고위간부 51명 승진·전보 인사
▶2004년세계 최고령 남성 114세 몰씨 사망
비공인 최고령자!!
주인공은 칠레의 할아버지 셀리노 비야누에바 하라미요. 언론에 공개된 주민증을 보면
할아버지는 1896년 7월 25일 태어났다.
▶2003년부산시 당감동 과학영재학교 첫 입학식
▶2003년주룽지 중국 총리 퇴임
▶1997년고건 제30대 국무총리 취임
▶1993년방일영문화재단 발족
▶1986년정부, 농어촌종합대책 발표
▶1983년중국 국제노동기구(ILO) 복귀
▶1983년호주 노동당 집권
▶1982년제68차 국제노동기구(ILO) 업저버자격 획득
▶1982년소련, 금성 우주탐색선 비너스 14호 금성 착륙
▶1981년주택 임대차 보호법 제정
▶1979년중국 베트남서 전면철군 발표
▶1976년국무회의, 물가안정-공정거래법
3월 15일부터 시행키로 의결
▶1975년쿠웨이트, 석유산업 국유화
▶1974년영국 윌슨 노동당 내각 발족
▶1973년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추천 국회의원 73명 추천
▶1973년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 제주권 지정
▶1970년핵확산방지조약(NPT) 발효
핵확산방지조약 [ 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 ; NPT ]
NPT 1968년 7월 미·소·영 등 총 56개국이 핵무기 보유국의 증가 방지를 목적으로 체결, 1970년 3월 발효된 다국간 조약. 이는 1960년 프랑스, 1964년에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하여 구서독·일본 등 2차대전 패전국의 핵무장을 우려한 미국의 의견에 따라 성립된 것이다. NPT는 1967년 1월 1일을 기준으로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은 나라를 구분하여, 전자에는 핵무기를 줄이기 위한 '성실한 협상의 의무'만을 후자에는 'IAEA에의 신고와 핵사찰을 받을의무'를 부과한 불평등조약이다. 우리나라는 1975년 4월 23일 86번째로, 핵보유국인 중국은 1992년 3월, 프랑스는 동년 8월 가입했으며, 1995년 현재 가맹국은 178개국에 이르고 있다.
▶1969년서독, 4대 대통령선거로
구스타프 하이네만 당선
▶1969년가정의례준칙 선포
1973년 6월 1일, 가정의례준칙이 제정되자
초등학교 교사들이 교동 초등학교 교정에 모여
이의 실천을 다짐하는 집회를 갖고 있다.
▶1966년미국 미시시피주 등에 돌풍으로 500명 사상
▶1966년영국 제트여객기 일본 상공서 폭발 124명 사망
▶1959년미국-터키-이란-파키스탄 상호방위협정 조인
▶1958년한국전 참가 16개국(유엔군)은
중공의 한반도 철수제안을 거부
▶1954년최초의 전투기 조종사인 김영환 공군 준장,
비행 훈련중 사망
김영환 공군 준장.
▶1953년스탈린 사망
30년간 철권으로 소련을 다스렸던 스탈린.
ㆍ소련 전성기 이끈 ‘철권의 독재자’
스탈린은 러시아제국의 일부였던 그루지야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세계 최강 시절의 소련(소비에트연방)을 이끌었던 입지전적인 독재자였다. 본명은 이오시프 비사리오니치 주가슈빌리. ‘스탈린’은 ‘강철 사나이’란 뜻으로 처음엔 그의 필명이었지만 정치입문 후 이름처럼 쓰이게 된다.
그를 발탁한 것은 레닌이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에 성공한 레닌은 새로운 러시아 건설에 의욕적으로 나선다. 하지만 기득권층의 반발, 당 내 노선 갈등, 낙후된 경제조건 등 레닌의 사회적 실험에는 너무나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병마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결국 ‘강철 요새’ 같은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모든 장애물을 깨부술 냉혹하고 추진력 있는 인물이 필요했다. 결국 스탈린을 선택한다.
건강이 악화된 레닌은 22년 스탈린을 소련의 초대 서기장으로 추대하며 힘을 실어준다. 트로츠키파와의 노선투쟁에서 스탈린의 손을 들어준 것인데 임종 전 그의 중용을 후회했다고 한다. 유서를 통해 “스탈린을 서기장직에서 제거하고 그보다 인내심 있고 충성스러우며 사려깊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 지도체제를 만들라”고 권유할 정도였다. 하지만 권력은 이미 스탈린의 손에 있었고 유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스탈린은 24년 1월21일 레닌의 사망과 함께 소련을 완전히 장악한다. 이후 53년 3월5일 숨을 거둘 때까지 약 30년간 최고 권력자로 자신의 이름처럼 ‘철권’을 휘둘렀다.
2차대전의 승전국이 되면서 권력기반은 더욱 강화됐다. 집권 기간 내내 우상화를 통해 ‘만능 천재’ ‘빛나는 태양’ ‘위대한 지도자’ 등 낯뜨거운 찬양을 받았다. 공업화와 수출장려로 경제발전을 주도하며 정치적으로는 정적 제거에 나섰다. 34년부터 38년 사이 이른바 ‘대숙청’ 기간 동안 희생된 사람은 약 2000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스탈린은 한국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53년 3월1일 침실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반신마비 상태로 4일을 앓다가 숨을 거뒀는데 뇌출혈 혹은 뇌경색 가능성이 있었지만 부검결과가 사라진 탓에 원인을 알지 못한다. ‘대숙청’의 행동대장이던 심복 라브렌티 베리야에게 암살됐다는 설도 있다.
사망 후엔 우상화와 무분별한 숙청이 폭로되며 위상이 추락한다. 2000년대 중반 ‘강철 같은 러시아’의 기틀을 다진 민족영웅으로 재평가되기도 했지만 그는 여전히 개혁과 폭력을 동일시하고 살육을 자행한 독재자로 기억되고 있다.
▶1953년북한, 박헌영(부수상겸 외상)을
반역자라고 해임
▶1951년미국-영국 38도선 이북 진격에 합의
▶1949년제1회 서울시 예술상 시상
▶1947년철도경찰청 발족
▶1946년처칠 영국 수상, 미 대학연설에서
`철의 장막` 표현 첫 언급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
“발트해의 스테틴에서 아드리아해의 트리에스테까지 ‘철의 장막’이 대륙을 가로질러 드리워지고 있습니다.”
1946년 오늘 미국 미주리주 풀톤시의 웨스터민스터대학에서 윈스턴 처칠은 ‘철의 장막’(Iron Curtain)이란 신조어를 만들어낸다. 소련에 대한 불신의 표현이었다. 이후 ‘철의 장막’은 2차 세계대전 후 소련 진영에 속하는 국가들의 폐쇄성을 풍자하는 단골 수사로 사용돼 왔다.
당시 처칠은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45년 총선에서 패한 야인이었다. 그는 이날 ‘세기의 연설’을 통해 역사의 흐름을 정확히 읽어내는 지도자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동서냉전 시대의 개막을 미국을 비롯해 전세계에 알린 경종이었다.
그동안 소련과 미국과 영국은 ‘전우’였다. 2차 대전에서 독일에 맞서 공동전선을 폈고 전후 세계질서의 기본틀을 짰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소련은 참전을 구실로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 동유럽에 사회주의의 색깔을 물들였다. 영국과 미국을 축으로 하는 서구 자본주의 진영은 전체주의 대신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위협에 직면한 상황이었다.
‘철의 장막’은 전후 세계질서와 관련된 또다른 말들의 뿌리였다.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자본주의 및 사회주의간 싸움을 빗댄 냉전(Cold War), 공산 중국의 배타적인 정책을 중국 명산물인 대나무에 비유한 ‘죽의 장막’(Bamboo Curtain), 1970년대 동서진영간 긴장완화를 일컫는 데탕트 등이다.
옐친 러시아대통령은 1994년 북대서양조약기구가 동유럽권으로 세력을 뻗치자 ‘싸늘한 평화’(Cold Peace)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철의 장막’은 동구권과 소련의 몰락으로 종말을 고했다.
▶1946년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토지개혁법령` 공포
1946년 3월 실시된 토지개혁을 선전하는 홍보포스터.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1941년미국-파나마 방위협정 조인
▶1936년영국의 최신예 전투기 스피트 파이어 처녀비행
▶1922년경성우편국 용산전화분국
(용산전화국 전신) 설치
▶1920년조선일보 창간
조선일보 창간호 [한국학중앙연구원]
지금의 조선일보는 어느 서베이 조사에서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불신하는 신문 1위에 오른 신문이며, 중앙일보, 동아일보와 함께 극우보수 신문이다. 하지만, 조선일보의 초창기를 보면 본래 창간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일보는 1920년에 창립하였으며 일본의 소위 문화정치가 실시되면서 동아일보와 함께 조선총독부로부터 허가되었다. 창간 당시에는 대정친목회(송병준, 이완용, 민영휘 등이 속한 것을 보면 단체 성격은 뻔하다)를 모체로 조진태 사장으로 그 역사가 시작한다. 그러나 영친왕과 일본 왕족인 마사코(이방자)와의 강제결혼을 비판하는 기사로 인해 압수당했고 대정실업친목회가 약속했던 자본금 불입을 하지 못해서 대정실업친목회 부회장이었던 초대 사장 조진태가 물러나고 변호사 출신 2대 사장 유문환이 취임했다.
같은 해 8월 27일에는 방한한 미국 의원단을 환영하는 조선인들을 일본 경찰이 부당하게 탄압했다고 비판한 논설을 실어서 1주간 정간을 당했다. 같은 해 9월 5일자에 실린 "당국의 소위 문화 통치는 奇怪(기괴)치 아니한가" 라는 논설로 인해 무기 정간을 당했다. 이러한 끊임없는 정간과 일제의 탄압을 당하면서 자금난에 시달리게 되고 결국 1921년 4월 8일 판권을 친일관료 송병준이 인수하고 3대 사장으로 송병준은 자신이 신문경영 전면에 나서지 않고 원로 언론인 남궁훈을 사장으로 영입한다. 하지만, 친일 갑부 송병준이 대놓고 전면에 나서지 않은데다가 남궁훈 또한 민족 독립운동가로 송병준에게 놀아나지 않자 자금을 끊어버리고 다시 조선일보는 자금난에 허덕이게 된다.
1924년 9월 13일에 신석우가 만석꾼 부친을 설득하여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는 반일 민족주의 신문으로 변화하여 4대 사장으로 민족의 사표인 월남 이상재 선생이 취임한 후에는 신간회 결성을 주도하고 문자보급운동의 일환으로 한글 교재를 무상 배포하는 등 문화보전에 힘썼다. 조선일보를 인수한 신석우는 우리가 현재 쓰는 국명인 ‘대한민국’이라는 명칭을 임시정부 첫 국무회의에서 국명으로 제안한 인물이다.
이 때는 일제와 타협적이던 동아일보와는 달리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성향을 띄었다. 좌파와 우파가 연합한 최대 독립운동조직 신간회 결성을 주도하기도 했으며, 홍명희와 박헌영,김단야 등 사회주의자들이 대거 조선일보에 입사하면서 사회주의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 당시에 조선일보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를 실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장려하기도 하였다. 월남 이상재 선생이 작고하고 나서 5대는 신석우가 맡았다가, 다시 조선일보 주필이자 발행인인 안재홍이 6대 사장에 취임한다. 조선일보는 계속적인 민족독립운동가들로 인하여 민족 정론지로서의 가치를 드높였다.
하지만, 1932년 '재만 조선인 동포를 위한 의연금' 가운데 일부 자금을 조선일보가 빼돌려 회사 운영비로 사용한 것으로 인하여 안재홍이 구속된다.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조선일보가 오랜 기간동안 반일논조와 민족주의적인 논조를 보이면서 총독부로부터 수차례 정간과 탄압을 받으면서 경영난이 심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 7대 사장 유진태를 거쳐 8대 사장에 고당 조만식이 취임한다. 조만식 선생이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한데에는 숭실학교 후배인 조병옥의 힘이 컸다. 조병옥이 일제에 의해 구속되었다가 출감하였는데 이때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가 그에게 사장을 맡아 달라하였고 이에 조병옥은 조만식에게 요청하여 이를 수락하여 사장을 맡게 된다.
조만식은 조선총독부로부터 신사참배와 지원병제도를 협조하라는 요청이 왔으나 모두 거부하였다. 하지만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온데다 경성부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하여 결국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 악화로 힘들어지자 당시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있던 광산업으로 벼락부자가 된 방응모가 경영권을 인수한다.
조선일보는 방응모가 인수한 이후로 친일신문으로 적극 변절하였고, 그 모습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밤의 대통령’으로 대한민국 정,재,검경,언론계를 지들 멋대로 농단하고 있는 중이다.출처: 블로거 길거리 인문학도
▶1912년프린시프 드 오스트리아호
세바스티안부근서 좌초, 500명 사망
▶1897년장제스(장개석)
전 대만 총통의 부인 송미령 여사 출생
▶1895년러시아 소설가 레스코프 사망
▶1891년국문학자 가람 이병기 출생
▶1871년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출생
▶1827년이탈리아 물리학자 볼타 사망
볼타 [Volta, Alessandro (Giuseppe Antonio Anastasio), 1745.2.18~1827.3.5]
이탈리아의 물리학자이며 전기 개발의 선구자인 알레산드로 주제페 볼타가 1827년 3월 5일 사망했다. 1745년에 태어난 볼타는 처음에는 문학에 취미를 가졌지만 프리스틀리가 쓴 전기연구의 역사에 관한 책을 읽은 뒤부터 전기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볼타는 두개의 다른 금속을 소금 용액내에서 접촉시킬 때 전류가 흐른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이 실용 배터리(전지)의 시초가 됐다. 볼타는 여러 개의 소금용액 그릇에 전기줄을 이 용액에 담아놓아 하나씩 순서대로 소금 용액 그릇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전기줄 한쪽 끝은 구리판을 또 다른쪽은 아연판을 연결시켜 이 양끝을 접촉시키면 전류가 흐르는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볼타의 이름을 따서 볼타전지라 이름지어졌고 따라서 전기를 발생시키고 저장하는 전기 저장소, 즉 전지를 세계최초로 발명함으로써 인류에게 지대한 공적을 남기게 됐다.
프랑스의 지도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볼타의 연구에 감동을 받아 백작의 작위를 주었다. 볼타는 세상을 떠난 뒤에도 추앙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을 따서 기전력을 측정하는 단위에 볼트(V)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1815년근대적 최면술의 선구자
독일의 메스머 사망
▶1770년영국군, 보스턴 주민 살해,
`보스턴 학살의 날`
▶1454년조선 단종2년, 세종실록 163권완성
https://youtu.be/ZnNsP4AJYSY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