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로 건너 가 이어진 역사
지금까지 소개(紹介)한 대만, 남아프리카공화국, 이란, 이스라엘의 사례(事例)는 어쩌면 많이 알려진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로써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이스라엘은 더 이상 국산 전투기 개발을 재개(再改)할 것으로 판단(判斷)되지 않고 대만과 이란은 유동적(流動的)이나 지금까지의 결과(決科)를 고려(考慮)한다면 앞날이 그리 밝아보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서두(序頭)에서 언급(言及)했듯이 갈수록 최신 전투기(最新戰鬪機)의 제작(製作)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완제기 대신 업그레이드나 개조 등으로 항공산업 방향을 틀었습니다, 신형 정찰기 Oron
그런데 요구 기준(要求基準)이 지금만큼 까다롭지 않았던 시절에 전투기의 자체 개발을 꿈꾸고 시도했던 더 많은 나라가 있었습니다.
이점은 의외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생각보다 '아니 그 나라가 전투기를 만들었었어?'하는 반문(反問)이 저절로 나올 만한 나라들이 이 분야(分野)에 뛰어들었고 일부는 정식(正式)으로 제식화(制式化)하기도 했습니다. 아르헨티나(Aregentina), 스페인(Spain), 이집트(Egypt), 인도(India), 체코(Czech), 유고슬라비아(Yogoslavia), 루마니아(Romania)가 바로 그렇습니다.
↑체코의 훈련 및 경공격기인 L-159
그중 먼저 소개할 아르헨티나의 경우는 상당히 흥미(興味)로운 구석이 많습니다.
구주 열강(歐洲列强)이 전쟁(戰爭)으로 피해(被害)를 입어 어려움을 겪던 당시에 전화(戰火)를 피하고 식량 공급국(食糧供給國)으로 국부(國富)를 축적(蓄積)한 아르헨티나는 제2차 대전 종전(終戰) 당시에 경제 대국(經濟大國)의 반열(班列)까지 국력(國力)이 비상(飛上)한 상태(狀態)였습니다.
이런 자신감(自信感)을 바탕으로 이에 걸 맞는 군사력(軍事力)을 구축(構築)하여 남미(南美)의 맹주(盟主)가 되고자 했고 그러한 일환(一環)으로 국산 제트전투기 개발(開發)에 착수(着手)했습니다.
↑1940년대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번화가 같은 시기 유럽과 비교해 결코 뒤지지 않는 수준입니다
사실 아르헨티나는 거대한 국토(國土) 때문에 항공 운송 산업(航空運送産業)이 애초(艾草)부터 활발(活潑)하게 발달(發達)했고 이와 더불어 FMA I.Ae.(Fabrica Argentina de Aviones)가 다양(多樣)한 종류(種類)의 민간기(民間機)와 군용기(軍用機)를 라이선스 혹은 자체 생산(自體生産)했고 지금도 가동(可動) 중입니다.
2차 대전 중반부터 제트 전투기 제작(製作)에 돌입(突入)했을 만큼 항공 산업의 트렌드도 상당히 앞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체 개발에 수많은 난항(難航)을 겪었는데 바로 이때 독일의 패망(敗亡)은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1940년대 FMA I.Ae. 생산 시설
실전(實戰)에 투입(投入)된 최초의 제트전투기인 Me 262를 만들었을 만큼 독일은 뛰어난 기술(技術)을 보유(保有)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패망(敗亡)하자 기술자(技術者)들이 연합국(聯合國)과 소련의 전리품(戰利品?)이 되어 버리는 처지(處地)로 전락(顚落)했는데 이를 피해 수많은 엔지니어들이 제3국으로 망명(亡命)하는 선택(選擇)을 했습니다.
그래서 흔히 1세대 전투기로 불리는 2차 대전 직후 등장(登場)한 전 세계 대부분의 제트전투기들은 독일 기술진(技術陣)들의 입김이 담겨 있습니다.
↑종전 후 Me 262를 카피해 제작한 소련의 Su-9
그 중에서 전쟁 전부터 독일과 관계(關契)가 원만(圓滿)했던 아르헨티나로 망명(亡命)한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제트 전투기 개발에 애를 먹고 있던 아르헨티나에게 구세주(救世主)와 같은 존재(存在)가 되었습니다.
대표적(代表的)인 인물(人物)로 유명(有名)한 D.520 전투기를 개발(開發)했지만 전쟁 중 독일에 부역(附逆)하여 매국노(賣國奴)가 되어버린 프랑스인 드와땡(Emile Dewoitine, 1892~1979)과 Fw 190의 제작자(製作者)로 유명한 탕크(Kurt W. Tank, 1898~1983)도 있었습니다.
↑남미 최초의 제트전투기인 풀퀴 I
드와땡이 주도(主導)해 1947년 초도 비행(初度飛行)에 성공한 IAe 27 풀퀴 I(Pulqui I)은 남미 최초(南美最初)의 제트 전투기였습니다.
비록 단 1기만 제작(製作)되어 연구용(硏究用)으로만 사용되었으나 아르헨티나는 미국, 소련, 영국과 거의 동시에 1세대 전투기 제작국 반열(製作國班列)에 올랐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도전(挑戰)은 곧이어 IAe 33 풀퀴 II의 탄생(誕生)을 이끌었습니다.
풀퀴 II는 한마디로 독일이 개발하던 Ta 183의 환생(還生)이라 할 만한 작품(作品)이었습니다.
↑아르헨티나 항공박물관에 전시 중인 FMA I.Ae. 33 풀퀴 Ⅱ 전투기
↑후퇴익 전투기인 풀퀴 II
패전(敗戰)으로 중단(中斷) 된 Ta 183 프로젝트를 진행(進行)하던 탕크가 풀퀴 II의 제작(製作)을 주도(主導)했기에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1950년에 초도 비행에 성공한 풀퀴 II의 성능이 1세대 전투기의 대명사(代名詞)인 F-86과 MiG-15에 필적(匹敵)할 만한 수준(水尊)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시에 영국이나 프랑스도 아직 후퇴익(後退翼) 전투기를 선보이지 못한 시기(時期)였습니다.
그런데 아르헨티나의 도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