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은 피하지 말고 뚫고 들어가라
세월본장이망자자촉(歲月本長而忙者自促)
천지본관이비자자애(天地本寬而鄙者自隘)
풍화설월본한이노양자자용(風花雪月本閒而勞攘者自冗)
세월은 본래 길 건만 마음 바쁜 이가 스스로 짧다 하고
천지는 본래 넓고 넉넉하건만 마음 천한 이가 스스로 좁다 하며
바람, 꽃, 눈, 달은 본래 한가롭건만 악착스러운 이가 스스로 번거롭다 한다.
이것은 채근담에 나오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잠 못 드는 이에게 밤은 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1월 26일은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신 <성도재일>이었습니다.
신도님들께서도 스님들과 함께 철야 정진을 하면서 부처님 성도의 의미를 되새기셨을 것입니다.
오늘은 부처님 성도의 의미를 말씀드리기에 앞서 부처님의 출가 인연부터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원인 없는 괴로움은 없다.
부처님께서는 인도의 <카필라국>이라고 하는 작은 나라의 왕자 싯다르타로 태어나셨습니다.
카필라 국은 비록 작은 나라였지만 왕자는 성안에서 부족함을 모르고 성장하셨습니다.
하지만 싯다르타 왕자는 성 밖의 생활이 궁금했고 동‧서‧남‧북 네 성문을 통해 밖을 나가보면서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生老病死) 사람의 네 가지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이것이 익히 알려져-있는 싯다르타 태자의 사문유관입니다.
태자는 성 밖의 사람들, 나아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겪는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이 고통을
남의 일로 보지 않고 나 자신에게 잠재해 있는 가능성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러한 삶과 죽음의 과정을 겪게 될 것이면서도
그것을 나 자신에게 존재하는 문제로 보지 않고 남의 일로만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내 자신의 문제로 삼고 일체 사물을 스승으로 여긴 것이야말로
부처님이 출가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고해, 고통의 바다입니다.
고통이 한두 가지 아니기에 바다 같다는 것입니다.
그 고통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벗어나는가가 부처님께서 출가를 결심한 동기입니다.
그렇기에 불교 철학의 핵심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 길이 바로 ‘사성제(四聖諦)’, 즉 고(苦), 집(集), 멸(滅), 도(道)입니다.
이 고집멸도(苦集滅道)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첫 번째 ‘고(苦)’란 괴로움입니다. 그렇다면 괴로움이 왜 문제일까요.
사람들은 즐거움 때문에 고민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괴로움이 있으면 고민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괴로움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원인이 없는 괴로움은 없습니다.
그 괴로움의 원인을 찾아야 하는데 그 원인이 바로 ‘집(集)’, 집착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괴로움이 정말 문제라고 생각된다면
그 괴로움의 소멸을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괴로움을 소멸할 수 있는 길을 반드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괴로움에는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을 제거하면 즉 ‘멸(滅)’하면 그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은 바로 ‘도(道)’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성제를 느끼는 존재, 즉 나라는 이 존재는 어떻게 이뤄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오온(五蘊)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다섯 가지 요소가 쌓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불교 철학의 중심이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인데
괴로움을 느끼는 이 나라는 존재는 바로 다섯 가지 요소의 쌓임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일체 사물을 스승으로 여겨야
『반야심경』을 살펴보면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 시 조견오온개공(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 時 照見五蘊皆空)’이라,
‘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실 때 오온이 공함을 보시고’라고 했습니다.
즉 부처님께서 성도(成道) 하실 때도 이 오온이 공함을 보셨으며 이것이 부처님 성도의 요체입니다.
나라는 존재를 이루고 있는 이 오온(五蘊)이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말합니다.
이 가운데 ‘색’은 물질, 나의 몸을 뜻하며 ‘수상행식’은 여러 감각과 의식의 작용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육체와 정신인데 유교에서는 이를 혼백, 즉 혼과 뼈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내 몸과 내 몸으로 들어오는 감각,
그리고 그를 느끼는 의식까지도 모두 공하다는 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이었습니다.
이처럼 공한 것이 오온인데 이 오온이 쌓여 만들어진 몸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받는 고통은 어떤 것일까요.
티베트의 옛 고승 <쌍게예세>가 영가의 세계를 살펴보니
암컷 아귀 한 마리가 5백 마리의 새끼를 낳아 놓고는
‘먹을 걸 구하러 인간세계에 간 지 12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는 남편 아귀를 찾아 달라’라고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스님이 암컷 아귀의 부탁을 받아 인간 세상을 살펴보니 남편 아귀가 보였습니다.
<쌍게예세>가 남편 아귀에게 암컷 아귀의 말을 전하며 ‘먹을 것은 찾았냐.’라고 물으니
수컷 아귀가 ‘먹을 것을 구했다’라며 내민 것이 손가락 한 마디 만 한 가래침이었습니다.
수컷 아귀는 ‘이것은 스님의 가래침이라 수많은 아귀가 그것을 얻고자 다툼했는데
내가 간신히 이것을 차지했다’라며 자랑스럽게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지옥 아귀가 이 세상에서 12년 동안을 헤매 구한 먹을 것이라는 게 고작 가래침 한 덩이인데
그나마도 스님 것이라 조금 더 맑고 깨끗하다며 다투는 아귀들이니
그들이 겪는 고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겪는 고 역시 이와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육도 윤회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불교 철학은 바로 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소멸에 이르기 위한 수행의 방법으로 ‘바라보는 것’을 제시합니다.
‘바라본다.’라는 것은 ‘지관(止觀)’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바라보는 순간 그것은 그친다는 뜻입니다.
괴로울 때는 괴로운 나를 바라보고, 즐거울 때도 즐거운 나를 바라보세요.
그러면 어느 순간인가 즐거운 나와 바라보는 나가 구분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소멸에 이르는 길입니다.
고통, 피하지 말고 뚫어라.
대부분 종교는 괴로움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이야기하다가 점점 깊어져
그 괴로움을 어찌하지 못하는 단계가 되면 그 괴로움을 외면하거나
무작정 신에게 의지해 버리는 것으로 적당히 괴로움과 타협해 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불교는 괴로움에 대해 알게 되는 순간부터
그 괴로움을 소멸해 버릴 때까지 괴로움의 문제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괴로움을 소멸시키기 위해 바라보게 하고 집중하게 하고 수행하게 합니다.
이것이 불교가 가진 가장 큰 힘입니다. 그만큼 치열한 종교입니다.
불교는 피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불교를 접한 사람이라면 어떤 것도 피하지 않고
뚫고 들어가 그것의 소멸에 이르기까지 정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행복해지고 싶다면 그 마음에 대해 포기하지 말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그 마음을 한시도 놓치지 말고 노력하여 그 완성에 이르러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성도(成道) 하신 것도 괴로움과 타협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바쳐 죽음을 각오하고 수행하였기 때문입니다.
- 보경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