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이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배 한척. 선원 한명이 바다에 표류하고 있는 물체를 인지한다. 사람의 형체로 보이는 물체가 보인다. 카메라가 바다 심연으로부터 서서히 물체에 접근하면, 물위에 둥둥 떠 있는 한 남자(맷 데이먼)의 뒷모습이 화면에 비춰지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미동조차 없다. 신체가 건장한 이 남성을 선원들 몇이 달려들어 겨우 물위로 끌어 올린다. 순간 꿈틀 움직이는 사내의 손 때문에, 모두를 움찔하며 소스라치게 놀란다. 아직 의식이 없는 사내를 어렵게 배안 탁자위에 눕히고 한 남자가 그가 입은 잠수복을 칼로 가르면, 두 개의 총알이 등에 박혀 있다. 마지막으로 엉덩이에 있는 총알을 꺼내고 보니, 총알에 비춰지는 스위스 계좌번호….
사내는 의식을 회복하지만, 자신이 누군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를 살려준 선원에게 그는 호소한다. “계산도 할 수 있고, 몇 시인지도 알고, 커피도 탈 수 있는데... 내가 누군지 기억이 안나요!” 한 마디로 미치고 환장할 일이다. 의식은 분명한데, 일상생활 하는데도 전혀 문제가 안 되지만, 나 자신이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물론, 이런 경험이 없으므로 짐작은 잘 안가지만, 엄청난 정신적 충격과 혼란을 경험할 것이 분명하다.
남자는 자신을 찾기 위해 무작정 스위스 은행으로 향하고, 은행 금고에 맡겨둔 자신의 소지품을 확인한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코자 찾은 소지품에서 쏟아져 나오는 여러 이름과 국적을 가진 자신의 여권들을 보고,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한다. 그리고 자신의 소지품으로 보이는 물건들과 돈을 가방에 쓸어 담아 나오는 순간, 경찰이 그를 부르며 그에게 다가온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위험을 감지하고 능숙하게 경찰관들을 제압한다. 자신을 쫒는 알 수 없는 적들을 피해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그는 달리고 도망친다.
이런 정체성이 어떤 사고나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해 망각이 되었다면, 그 개인의 삶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지나 데이비스 주연의 '롱키스 굿나잇'(1996)에서 주인공 사만다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괴한이 그녀의 집을 침입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녀를 죽이기 위해 침입한 괴한으로 인해 자신의 무의식속에서 살고 있던 ‘찰리’가 다시 살아난다. 몸에 밴 익숙한 기술로 괴한을 때려눕히고 공포에 떨고 있는 그를, 망설임 없이 죽인다. 꼭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러고 나서 서서히 고개를 쳐드는 그녀... 그 모습을 지켜본 가족들은 충격에 빠진다. 평소의 사만다가 아닌 것이다.
사만다는 자신이 고도의 살인 훈련을 받은 비밀 요원이었고 임무 수행중 사고로 기억을 잃고 현재의 사만다로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기억이 되살아난 후, 사만다와 찰리는 각기 다른 인격처럼 서로 오가며 서로를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그녀의 모습은 순간순간 돌변한다. ‘찰리’는 사고이후 기억을 잃고, 그 무의식에서 편하게 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황이 그녀를 다시 불러들이자 그녀는 평범한 여자로 전락시킨 ‘사만다’를 비난한다. “쓸데없이 엉덩이 사이즈만 키웠다”며.
도발적이고 공격적인 찰리로 돌아온 그녀는, 심지어는 자신의 아이조차 냉담하게 대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지는 않지만, 대체로 모성은 위대하다. 그녀의 모성은 자신의 아이를 구출하기 위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재구성한다. 한 때 살인 기계였던 찰리에서 평범한 가정주부이며, 한 아이의 엄마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 영화는 투자대비 흥행을 거두지 못한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본 영화이지만, 흥행 실패로 부부였던, 배우 지나데이비스와 감독 레니할린이 이 영화를 찍고 난 후, 결별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두 영화에서 모두 해리성 기억상실이 일어나지만, '본 아이덴티티'와 '롱키스 굿나잇'의 차이점은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고 사느냐 아니냐의 문제로 보인다. 즉 '본 아이덴티티'의 경우는 기억만 잃어버렸을 뿐,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괴로워한다. 그러나 '롱키스 굿나잇'의 여주인공은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살며, 이전의 기억을 의식적으로 되찾으려 노력하지 않는다.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이전 기억이 떠오르게 되면서 스스로 혼란스러워하며, 이전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통합시키는 과정이 나온다. 만약, 두 개의 인격이 하나로 통합되지 않고 각각의 인격으로 존재하면서 일시적인 기억상실을 경험한다면,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의심해야 할 것이다.
해리성 정체감장애(解離性正體感障碍: 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란 흔히 이중인격 또는 다중인격이라고 불리는 정신질환으로서, 해리(Dissociative)는 ‘분리’ ‘분열’의 의미로 어떤 정신적 충격이 계기가 되어 불안정한 개인의 기억 등의 일부가 해리돼 마치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는 증세다. 정체성 결여 문제로 자신이 누구인지 혼란스러워하고 때로는 자신이 복수의 인격으로 행동하는 장애이다. 통계상 환자의 90%가 여성인 것으로 알려진 이 질병은 현재 정신질환 일종으로 분류된다. 과거 빙의라거나 다중인격장애라고 불렀다.
이 해리성 정체감 장애는 실제로 인격이 여러 개 있어 그 인격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정신 상태 일부가 육체를 장악하는 증상이다. 그것에 따라 다중인격이라는 명칭을 1994년 해리성 정체감 장애로 변경했다. 고대를 위시해 과거에는 이것이 귀신에 의한 작용이라고 잘못 판단해 빙의라고 표현했다. 그것이 질병으로서 나타난 것인지 확인하는 데는 평균 7년 정도가 걸리고 최면을 가장 유효한 치료법으로 간주한다.(박소진/한국인지행동심리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