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짚어 보다
<주님 수난 성금요일>(2022. 4. 15. 금)
(요한 18,1-19,42)
신약성경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나서
몇 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기록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있는 ‘예수님의 수난기’는, 사도들과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고 있고, 알고 있는 상태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되짚어 보기 위해서’ 기록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장에서 보고 듣는 대로 곧바로 기록한 이야기가 아니라,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 “그땐 그랬었지.” 라고 기록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당시에는, 사도들과 신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금방
부활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아예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절망감과 허무감, 그리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예수님이 그렇게 돌아가신 것에 대한 슬픔과 고통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일에 예수님 부활 직후에 곧바로 복음서를 기록했다면,
부활이 얼마나 기쁘고 놀라운 일인지를 길고 자세하게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 예수님의 부활을 ‘당연한 진리’로 믿고 있는
상태에서 복음서를 기록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은 간단하게 기록하고,
“예수님께서는 왜 그렇게 고통스러운 수난과 죽음을 겪으셔야만 했는가?”를
묵상하면서, 수난기를 길고 자세하게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예수님의 수난기를 읽을 때, 마치 예수님의 부활을 모르는
사람처럼 읽을 것이 아니라, ‘부활 신앙’을 바탕으로 해서 읽어야 하고,
수난기를 기록할 때의 사도들과 복음서 저자들의 심정을 묵상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수난을 회상할 때 어떤 심정이 되었을까?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부끄러워하면서 계속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라고 변명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버려두고 달아나서
예수님만 체포되고 자기들은 무사했던 것을 몹시 부끄러워했을 텐데,
그 일이 사실은 그들을 보호하려는 예수님의 의지가 작용한 일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다.‵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 이는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사람들 가운데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고 당신께서 전에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8,8-9).”
만일에 제자들에게 ‘부활 신앙’이 있었다면,
즉 예수님께서 금방 부활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었고, 알고 있었다면,
그들은 그렇게 달아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말은, 그 뒤에 사도들의 ‘삶과 죽음’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후에 ‘부활 신앙’으로 완벽하게 무장되어 있었던
사도들은 예수님 수난 때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용감하고 위대한 순교자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고, 우리 자신의 부활도 믿고 있고,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들과 인생살이에서 만나는 고난과
시련들을 ‘부활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부활 신앙’이 있더라도 아픈 건 아픈 것이고, 슬픈 건 슬픈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은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갑니다.
힘든 일을 만났을 때,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의 인생은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현세의 삶’만 생각하다가 허무하게 끝나지만,
신앙인들은 죽음 너머에 있는 영원을 향해서 나아갑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
예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그렇다고 해도 꼭 그렇게 십자가의 길을 갈 필요가
있는가? 좀 더 쉬운 길을 찾는 것이 현명하지 않은가?”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 말은, 예수님에게 “어차피 부활할 거라면 처음부터 곧장 부활로 직행하지
왜 수난과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쳤는가?”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입니다(로마 5,18).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일, 우리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죽음으로 끝나버렸다면(부활이 없다면),
그 일은 그냥 ‘허망한 일’이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죽음은 더 이상 그분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로마 6,9).”
‘주님 수난 성금요일’의 수난 예식과 십자가 경배 예식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때문에 거행하는 예식입니다.
(십자가만을 경배하는 예식이 아니라, 십자가 너머에 있는 부활을
경배하는 예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함으로써
예수님의 부활에도 참여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거행하는 예식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로마 6,4-5).”
성금요일은 부활절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
그런데 결코 생략할 수 없는 징검다리입니다.
지금의 우리 인생도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징검다리입니다.
사람에 따라 더 힘들거나 덜 힘든 차이가 있긴 하지만,
목적지는 같고, 그곳에서 누리는 행복도 같습니다.
지금은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남들보다 더 무겁고 힘든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불공평하게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그곳에 도착해서 보면, 모든 것이 공평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 송영진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