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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 18-20
여호와 하나님이(1)
저도 심신이 약해 있을 때마다 결혼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때에는 결혼을 안 하거나, 늦게 하는 것이 저에게도 유익하고, 상대에게도 유익할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한참 늦게 제 생각이 천주교의 성경 해석 방식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생각하지 않을 때 오염된 생각을 피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연약성과 부족을 모르고 독불장군이나 되는 것처럼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고는 하나님도 모르고 자신을 도무지 모르는 것이 됩니다.
1. 본문 18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입니다.
1) 이제 모세는 여자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설명합니다.
상호적인 사회를 이루어 나갈 수 있는 인류가 이 땅 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의도가 자손들에게도 연장되어야 하는지는 의심할 여지가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불편하여 조력자가 될 아내가 창조되어야 했다는 것을 단순히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 사회의 첫 단계를 실제로 착수하시고 동시에 다른 것도 각기 고유한 위치에 포함되도록 하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사회적인 인물로 지음 받았다는 최초의 조건은 일반 원리를 나타냅니다.
인간은 여지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결합에 거룩한 유대 관계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괄목할 만한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이러한 유대 관계에 의해 한 몸과 한 영혼으로 결합됩니다. 플라톤도 자연을 통해서 이와 같은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건전한 부류의 철학자들도 이것을 천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 대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것을 아담에게 국한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는 이 말씀을 인간 사회의 공통 법칙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이 말씀을 자신에 대하여 기록되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섭리로 면제해 줄 때를 제외하고는 혼자있는 것이 좋지 않다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은 독신생활이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참해지지 않으려고 결혼하는 것을 피합니다. 이방 작가들은 ‘아내 없이 지내는 일생이 진정한 행복이라’ 고 정의합니다. 죠비니안에 반대하는 제롬의 첫 번째 책에도 결혼생활을 증오스럽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단의 사악한 주장에 대해 신실한 자들은 부부생활이 인간의 파멸이 아닌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경건한 교부들은 성직자들은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짓된 교훈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아내와 함께 사는 것이 순결이라고 선언하고 결혼을 적극 권장하였습니다. 일반 신자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오히려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작정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우리말 “그를 위하여” 라는 이 구절은 히브리어로 (케네게도) 라고 하는데, 마치 ‘맞은편에 있는 것처럼’ 이나 ‘대면하여’ 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카프)는 ‘유사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구절은 일반 의미입니다. 마치 그녀가 일종의 아담의 상대인 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여자는 남자에 응답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남자에 ‘대면하거나’ ‘맞은편에 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사성을 나타내는 분사가 일반적인 언어 형식에서 취해 온 것이기 때문에 덧붙여진 것으로 봅니다. 헬라어 주석가들은 이 말을 아주 성실하게 (카트 아우톤)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제롬은 ‘그와 같을지도 모르는’ 이라고 번역합니다. 여기에서 모세께서는 두 사람의 평등성을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자는 오직 번식을 위해 지음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견해가 배격됩니다. 그리고 ‘좋은’ 이라는 말씀을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후손을 생산한다는 것에 국한시키는 사람들의 잘못이 배격됩니다. 그들은 아담이 그때까지 정욕에서 해방되었으므로 아내가 필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마치 그녀가 아담의 생애의 불가결한 조력자가 아니라 동침하는 상대자로만 지음 받았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견해에서 여성을 성적인 노리개로 취급하려는 세속성이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카포) 는 중요합니다. 이것은 결혼이 생활의 모든 분야와 관습에까지 확대된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것을 ‘순종하도록 준비를 갖추게 하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타당성이 없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더욱 분명히 그리고 더 많은 것을 표현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3) 본문 18절 끝에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남자를 창조하실 때처럼 ‘우리가 ..을 만들 자’ 라고 복수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를 문제삼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이러한 방법으로 분명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남자가 여자보다 얼마나 우월한지를 보여준다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반대되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 다른 것으로 이행합니다.
인류가 남자의 인격에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공통적인 숭고성은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만들자’ 라고 말씀하실 때 한가지 찬사로 ‘영예롭게 된다는 것이다’ 라는 해석을 더 좋아합니다. 마찬가지로 여자를 창조하실 때에는 남자에게 부속된 그녀를 반복해서 언급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여자도 제2단계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자를 창조하실 때 하신 말씀은 여자에게도 해당된다고 결론짓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남자의 조력자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아내들에게 일의 법칙을 알려 주고 의무를 다하도록 가르칠 뿐만 아니라 남자들에게 결혼이라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의 법칙 속에 여자가 남자의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내포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반려자입니다. 그리고 친구로서 남자가 더 잘 살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지음 받았다고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이와 같이 타락된 인간 사회에서 하나님의 복은 인식되지도 효력을 발휘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죄의 원인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연의 질서가 우리에 의해 왜곡된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인간의 완전무결함이 태초에서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다면 그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는 분명히 분별되고 결혼에 있어서의 가장 행복한 조화도 충분히 효력을 발휘했을 것입니다. 남편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바라보고 여자도 이런 점에서 남편을 돕는 신실한 조력자가 될 때, 두 사람은 하나로 일치되어 자애스럽고 화평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거룩한 교제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의 오류와 자연의 타락으로 인해서 결혼의 행복이 크게 말살되었습니다.
또 여러 가지 불편한 것으로 혼합되어 나쁜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분쟁, 문제, 슬픔, 불화, 끝없이 깊은 악의 바다 등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남자들은 아내 때문에 방해를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많은 실망과 실의를 겪게 됩니다. 그런데도 결혼은 하나님께서 일단 말씀으로써 재가하신 복이 완전히 폐지되고 말살될 만큼 인간의 타락에 의해 손상되지는 않았습니다.
퇴폐한 자연의 소산인 결혼의 수많은 불편한 것 중에 아직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어느 정도 남아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다 꺼진 듯한 불 속에 타고 있는 불씨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더욱이 여자들은 남편을 도와야 한다고 가르침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준수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신 질서와 규범을 차근차근 알아볼려고 하는 방식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남자들도 자신의 반려자에게 댓가로 갚아야 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두 사람의 의무는 상호적인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조건에서 여자는 남자를 돕는 조력자로써 그 위치에서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감당해야 하는 존재로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며 지도자의 위치를 감당하기 위한 존재로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자가 남자의 조력자로 불릴 때, 아담의 타락이래 인간의 무력함에 대한 어떤 필요성 때문이라는 시사가 전혀 없었다는 점입니다.
여자는 남자가 완전할 때조차도 남자의 배필이 되도록 작정되어 있었습니다. “돕는 자” 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로써 고도한 수준을 뜻합니다. “배필”이라는 말씀도 “거기에 상응한다, 동등한 위치에 있는 존재다. 잘 어울린다” 는 뜻입니다.
이런 말씀은 여자의 신분, 여자의 가치, 영육에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힘의 양과 질을 표시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분의 안목과 그분의 의지 안에 두셨던 일의 실현으로서 남녀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타락한 욕망으로 인해 치유책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이중적인 은총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① 최초의 제도와 명령도 우리의 것이요,
②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치유의 은총을 받아서 이 길을 가는 자가 된 것입니다.
2. 본문 19-20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입니다.
1) 이것은 18절에 대한 보다 충분한 설명입니다.
여기에서 모세께서는 모든 동물이 질서 있게 배치될 때, 아담과 말상대가 되거나 아담에게 알맞은 상대가 하나도 없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짓는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들의 본질을 파악해 나가고 규명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생애를 함께 보낼 동반자를 선택할 정도로 성품이 유사한 종류가 없었습니다. 짐승은 아담에게 대등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아주 다른 피조물들이었습니다. 짐승들이 아담에게 도움은 주지만 그것은 아주 저급한 수준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무지 때문만은 아닙니다. 모든 동물이 종류대로 아담 앞을 지나갔습니다. 아담은 무턱대고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지 않습니다.
매우 신중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알고서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그들 사이에는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내가 아담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면 그처럼 적절하고 고유한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지냈을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아담에게 짐승들을 데려오셨다는 것은 단지 그들을 순종하도록 하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아담은 스스로 인간 앞에 나타난 짐승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제각기 본성에 알맞은 적절한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짐승의 온순함은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하여 이전에 받았던 모든 것을 상실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지금까지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을 대적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자신에 대한 야수들의 잔인성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어떤 동물은 별 어려움이 없이 길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짐승은 언제나 야수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같은 짐승들 중에서도 어떤 것은 너무나 맹렬하여 공포를 자아낼 정도였습니다. 한편 창세기 9장 2절에서도 보게 되겠지만, 어떤 짐승들은 이전에 지니고 있었던 유순한 기질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모세는 사람들과 가장 가까이 지내는 동물에 대해서만 언급했습니다. 물고기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붙인 이름은 하나 하나가 가장 적절한 근거에 유래해서 붙여진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다른 것과 더불어 쓸모 없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2)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음으로” 는 어떤 의미의 말씀이겠습니까?
두 인격이면서 하나로 통일을 이루는 인격이 예정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홀로가 아니라 같이 가도록 하신 최초 교회 방식이 기대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둘이면서 하나 같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추구할 인격체를 예정하신 것입니다. 나뉨이 없으면서 거룩한 질서의 체계를 내다 보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한 마음으로 받아 준행하게 하시는 거룩한 질서를 보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 진리로만 통일될 가정이나 교회 체계를 내다보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진리로 통일되는 가정의 모습, 또 교회의 모습을 기대 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