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을 출발(27일 새벽3시 30분)하기 직전까지 주미 대사에게 전화해 트루먼 대통령 면담을 지시하고 맥아더 장군과의 통화를 시도했다.
27일 낮 대구에 도착했는데 대통령은 침통한 표정이었다. "내 평생 처음 판단을 잘못했다"며 열차를 돌려 도로 올라갔다. 대전역에 도착한 시각이 27일 오후 4시 30분. 수원까지 가서 자동차로 서울에 들어갈 작정이었다. 미 대사관 참사관이 유엔 결의 소식과 트루먼의 긴급 무기 원조 명령을 알려 오면서 대전에 머물게 된다. 29일 맥아더 장군의 방한 소식에 미군 조종사가 모는 경비행기를 타고 수원으로 가 소령 때 알던 맥아더와 극적인 상봉을 했다. 대전으로 돌아오는데 대통령이 탄 비행기는 두 번이나 야크기의 추적을 받았다. 맥아더의 한강 방어선 시찰 이후 미국은 지상군 참전을 전격 결정했다. 6.25전쟁의 결정적 순간이었다. 대전으로 내려간 뒤부터 전쟁 내내 이승만 대통령은 권총 한 자루를 침실 머리맡에 놓고 자는 습관이 생겼다. 아내 프란체스카 여사에게는 "최후의 순간 공산당 서너 놈을 쏜 뒤 우리 둘을 하나님 곁으로 데려다줄 티켓"이라고 말했다.(프란체스카 회고록)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린 7월 29일 밤 프란체스카 여사를 불러 "적이 대구 방어선을 뚫고 가까이 오면 제일 먼저 당신을 쏘고 내가 싸움터로 나가야 한다"면서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로 떠나라고 했다. 여사는 "절대로 대통령의 짐이 되지 않겠다"며 함께 있겠다고 했고, 대통령은 "우리 아이(병사)들과 여기서 최후를 마치자"고 했다.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갈 때 미국은 해외나 제주도 망명정부를 계획했지만 거부했다.
더우나 추우나, 적의 박격포가 떨어지는 상황에도 매주 전선을 방문하는 고령의 이승만을 보면서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정치가 ·애국자'라고 평가했다.
6.25전쟁 내내 이승만 대통령은 北進통일의 의지를 피력했다. 맥아더 후임인 매슈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은 확전론에 반대하는 입장이어서 "(이승만 때문에) 내 머리털이 많이 빠지게 됐다"고 토로했을 정도다.
북이 먼저 무력으로 38선을 파괴했으니 존속시킬 이유도 없다면서 북진을 고집한 강경파였는데 한국내 일부 세력은 한강 다리 끊고 남쪽으로 도주한 '비겁한 런승만'이미지로 뒤집어 폄하해왔다.
생각의 자유라는 외피를 쓰고 갖가지 궤변과 왜곡이 독버섯처럼 번져 젊은 세대의 역사관까지 흐려놓는 이념 전쟁이 우리 사회에 소리없이 확산됐는데 너무 오래 눈 감고 입 닫아왔다. 미화할 필요도 없다.
1875년에 태어나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엄혹한 시기를 살아온 초대 대통령의 90 평생 궤적을 직시하는 것 자체가 역사의 교훈이다.
대중적 각성의 101분을 제공해 준 김덕영 감독의 용기에 감사할 따름이다.
2024년 2월 19일(월) 경북도민일보 버네이즈 아마존출판대행 한승법
이승만과 '건국전쟁'
설날 연휴에 영화 <건국전쟁>을 봤다. 평소 이승만 박사를 존경하고 여러 편의 칼럼도 썼기에 나름 약간의 지식도 있었다.
관람 전에 김성원 그라운드씨 대표의 <건국전쟁 완벽해설> 유튜브 영상으로 사전 공부도 하고 영화를 봤는데, 미처 몰랐던 역사적 사실들도 있었다.
이승만 박사가 종북 좌파 세력에 의해 난도질 당하고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된 것이 너무 가슴 아팠다. 공산주의 사상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젊은 가슴을 뛰게 만든다. 불평등과 착취의 구조적인 결함을 가진 자본주의를 통렬히 비판하고, 평등과 정의에 대한 약속은 너무 멋지다.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불공정을 혁명으로 근본적인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공산주의 좌파사상은 젊은 내 가슴을 뜨겁게 했다.
나는 비록 운동권 주류가 아닌 단지 대학생과 야학 교사로서 비주류 운동권이었지만 혁명을 향한 열정만큼은 뜨거웠다.
이 가슴을 차갑게 식힌 것은 역설적으로 소련에서 만난 공산주의의 민낯이었다.
70여 년간 공산주의 체제에서 살아온 소련 시민들의 수준은 제3세계보다 못했다. 인간의 얼굴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성 말살, 돈에 대한 천박한 탐욕, 가진 자에 대한 질투와 시기심 등은 나를 정말 힘들게 만들었다.
우리가 꿈꿨던 혁명 뒤의 지상낙원은 모스크바에 존재하지 않았다.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 옐친 대통령, 푸틴 대통령까지 10여 년을 모스크바에서 유학하며 결론을 내렸다.
모스크바에게 내일은 없다. 인간의 얼굴은 대한민국에 있고, 우리에게 내일이 있다. 그게 내 결론이다.
우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삶 자체가 기적이다. 그가 태어난 19세기 말은 그야말로 세기말적 구한말이었다. 한줌도 안 되는 왕족과 양반이 무지몽매한 절대다수 백성들을 착취하던 시대였다.
90%가 넘는 문맹률의 나라에서 무슨 희망이 있었겠는가?
이승만 박사는 니체가 말하는 초인과 같은 선각자이다. 류석춘 전 연세대 명예교수이 말처럼 100년을 내다본 예언자이다. 역사에서 가정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하지만 만약 이승만 박사가 없었다면 조선의 독립은 아예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이 패전했더라도 우리는 영구히 일본의 식민지로 살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조선의 독립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이승만 박사의 치열하고 천재적인 외교전 덕분이다. 설사 일제로부터 독립했다 하더라도 99.9%의 확률로 공산화됐을 것이다. 당시 공산화는 콜레라처럼 대유행이었고, 공산주의 해독성에 대해 대부분 인지하지 못했다.
심지어 대부분의 미국인들도 소련을 선량한 동맹국으로 믿었다. 당시 남한의 대부분 지식인들은 공산주의 사상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미국에서 혼자 귀국한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그것은 마치 손흥민 선수 한 명이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11명과 맞서 싸워 이긴 것과 같다. 그 어떤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고 감동적인 스토리다.
영화 <건국전쟁>을 보면서 눈물이 흘렀던 것은 이승만 박사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국부 이승만 박사가 쓸쓸하고 외롭게 이역만리 하와이 땅에서 생을 마감한 것에 대한 연민이었다.
좌파들은 왜 그렇게 이승만 박사를 저주하고 난도질하는 걸까? 무섭기 때문이다. 이승만 박사가 제대로 평가받으면 김일성 주석은 역사적 패룬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의 지시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종북 좌파에게 이승만 박사는 '철천지원수'다. 그들은 역사적 천벌을 닫을 것이다.
한승범(버네이즈 아마존출판대행 대표)